어설픈 성장의 한 페이지
99년도 이맘때쯤 중고등학교 동창 녀석이
갑자기 지리산에 함께 가자고 졸랐다.
혼자 가고 싶었지만 부모님 설득을 하지 못한 친구는 나와 함께 가는 조건으로 허락을 받아냈다.
친구 부모님은 시외버스 요금은 물론 터미널까지 차로 데려다주셨다. 그리고 용돈도 두둑이 챙겨주셨다.
나는 얼떨결에 처음으로 지리산에 가게 되었다.
처음 글을 쓸 때는 시외버스를 탔던 것 같았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기차였던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지금도 정확하게 확신할 수는 없다.
서대전역에서 남원역까지 갔던 것 같기도 하고 대전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남원행 시외버스를 탔던 것 같기도 하다.
여하튼 우리는 남원에 도착했다. 친구의 계획대로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로 가기로 했다.
원래는 시외버스를 타려 했다. 하지만 택시 기사들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여기서 쌍계사까지 30분이면 도착합니다. 요금도 얼마 안 나와요."
그 말에 친구는 망설임 없이 택시에 올랐다.
한낮의 폭염에 지친 우리는 더 이상 힘들게 이동하고 싶지 않았다.
친구는 부모님에게 받은 돈 외에도 넉넉한 용돈을 갖고 있었고 나는 사실상 빈손이라 친구의 뜻을 따랐다.
택시 타면 얼마나 편한가 말이다.
당시 연애 중이었다. 그래서 돈만 있으면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했기에 돈을 모을 겨를이 없었다.
쌍계사 근처에 도착해 주변을 둘러보다 민박을 잡았다. 우리는 지리산에 올라 쌍계사를 구경하고 불일폭포에 발을 담그며 산 위로 올랐다.
그러다 길을 잘못 들어 깊은 숲에서 길을 잃었다.
우리 둘 다 모두 휴대폰이 아예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통화권 이탈이었다.
우린 꽤 당황했다.
마침 숲에서는 이상한 새소리인지 귀신이 나올 듯한 소리와 풍경이 겹쳐져 오싹한 기분마저 들었다.
더듬더듬 산길을 걷던 우리는 마른 계곡인지, 암석이 쭉 깔린 내리막길인가를 발견했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인가가 나올 거야. 외화에서 그러던데."
내 말에 친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막연했다. 우리는 그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때로는 길을 찾는 것과 같다.”
– 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당시 시계는 오후 네 시를 넘기지 않았지만 숲은 벌써 어둑했다.
짙은 나무 그늘 아래 돌계단처럼 이어진 내리막이 펼쳐졌다.
우리는 그곳을 뛰기 시작했다.
돌과 돌 사이를 날 듯이 넘으며 아래로 내려갔다.
지금 생각하면 위험천만한 짓이었다.
하지만 당시엔 무모하다는 감각조차 없었다.
우리는 둘 다 생일이 지나지 않은 만 열여덟이었다.
폭염 탓인지 돌에 낀 이끼는 마르고 말라 미끄럽지 않았다.
그 덕분에 다람쥐처럼 날렵하게 계곡을 타고 하류로 내려올 수 있었다.
도착한 곳은 하동 청학동과 삼성궁 인근이었다.
산을 넘어 화개면에서 청암면으로 빠진 것이다.
짐은 쌍계사 사하촌 초입의 민박집에 두고 나왔기 때문에 청학동은 그냥 지나쳤다. 삼성궁은 멀리서만 바라봤다.
우리는 화개장터로 나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다시 민박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왔다.
고단한 하루였다.
대전에서 남원으로, 남원에서 하동 쌍계사로, 산을 넘어 청학동을 거쳐 화개시장에서 다시 쌍계사까지.
반나절 동안 지나친 지명만도 여러 곳이었고, 그 절반 이상은 발로 직접 걷거나 헤맨 곳이었다.
하지만 그런 게 청춘이다.
어둑한 밤 민박집에 도착한 우리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근처 슈퍼에서 술과 안주를 사 왔다.
나는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있었던 일을 전했다.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친구가 울고 있었다.
녀석은 한 손에 소주잔을 들고 다른 손으론 전화기를 붙든 채 흐느꼈다.
녀석은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취한 목소리로 자꾸만 미안하다고 말했다.
녀석은 쌍계사, 쌍계사라는 단어를 더듬더듬 반복했다.
통화를 끊고 들은 이야기로는 그 헤어진 여자친구 집이 쌍계사 근처였다고 했다.
하지만 전화를 걸던 그때 그녀는 인천에 있었다.
녀석의 말을 듣는 순간 괜히 울컥했다.
나는 친구 옆에 조용히 앉아 밤새 술을 마셨다.
울음과 웃음이 뒤섞여 말도 안 되는 말들을 나눴다. 나는 다시 나가서 소주 댓 병을 사 왔다. 그렇게 우리는 폭음을 했다.
어쩌면 그 밤의 폭음은 친구에게 꼭 필요했던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또 다른 친구의 부탁으로 다시 불일폭포에 올랐다.
폭포수를 떠 오기 위해서였다.
몸은 피곤했지만 이상하게 발걸음은 가벼웠다.
폭포 앞에 서니 어제의 무모한 하루가 꿈처럼 느껴졌다.
친구는 내게 애들에게 절대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렇게 하루를 더 머문 뒤 우리는 대전으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해 여름은 단지 폭염이 아니라 십 대의 마지막 폭주 같았다.
“나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어른이 되기 싫었다.”
– J.D.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그리고 그렇게
그해 여름 우리는 어른의 탈을
조금씩 얼굴에 새기고 있었다.
1999년 여름, 지리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