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걸을 도시

by 진이설

부산 온천동에 왔다. 동래구의 이곳에서 나는 새 삶을 시작한다.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한 동네다. 어린 시절 구포 삼촌집에서 할머니 손잡고 온천동 작은할아버지 내외와 당숙들 살던 집에 놀라 갔던 기억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온천동에서 삼촌이랑 온천욕도 하고 동물원도 갔고 케이블카도 탔었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거칠게 그려졌던 온천동은 이제 꼼장어 골목의 연기 냄새와 전통시장의 활기 백화점의 번잡함이 공존하는 다층 일상의 공간이다. 이 거리에서 나는 하루하루를 쌓아간다.


정호승은 ‘시는 낯선 땅에서 길을 찾는 일’이라고 했다. 나는 온천동 골목을 걸으며 내 삶의 리듬을 찾는다. 아직 어색한 길이지만 발걸음 하나하나가 시를 쓰는 손처럼 느껴진다.


5월 초 서울에서 여섯 번 면접을 봤다. 대전에 살던 나에게 면접관들은 늘 같은 질문을 던졌다. 서울에서 일할 수 있겠느냐고. 부산 면접에서도 비슷했다. 회사 근처 원룸 시세와 교통편을 미리 알아둔 덕에 대답은 수월했다. 하지만 마지막 면접에서 한 면접관이 물었다. 왜 아직 결혼하지 않았느냐고. 나는 담담히 말을 꺼냈다. 오랜 연애를 끝낸 뒤로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그래서 이렇게 됐고 이번 생에는 결혼 계획이 없다고. 면접관은 더 묻지 않았다. 내 대답이 질문의 여지를 닫아버린 듯했다.


온천동은 영화 속 거친 이미지를 벗고 일상으로 채워진 동네였다. 어제 오후 네 시 반 원룸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좁은 방에 스며든 오래된 나무 냄새가 낯설었다. 오늘 아침은 청소와 빨래로 시작했고 오후에는 동네를 걸었다. 월요일부터 출근할 회사 앞에서 잠시 멈춰 서서 건물에 불 켜진 창문을 보니 설렘과 긴장이 뒤섞였다.


시장 골목을 걸으며 필요한 물건을 샀다. 비 오는 아침 공기는 서늘했고 젖은 아스팔트에서 나는 흙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낯선 길이 발걸음에 조금씩 익숙해졌다. 이 동네는 곧 내 일부가 될 것이다.


문득 백석의 시 흰 밤이 떠올랐다. 그는 만주 땅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내 고향 평안북도 정주에서는 지금쯤 그 무엇들이 열리며 또 맺히고 있을까’라고 썼다. 나도 온천동 낯 선 골목을 걸으며 대전 서구 용문동의 유등천변을 떠올린다. 강물 소리를 들으며 잠들던 밤과 봄이면 하얀 쌀밥 같은 이팝나무 꽃들이 흩날리던 길이 생각난다. 하지만 백석이 타향에서 고향의 정서를 시로 승화시켰듯 나도 이곳에서 새로운 언어를 찾아야 한다.


삶은 늘 새로운 곳에서 다시 걷는 일이다. 누구나 낯선 길 앞에서 어색한 시간을 보낸다. 정호승도 마흔네 살에 전업 작가를 하며 미래에 대한 고민과 희망을 마주했을 것이다. 그의 시가 어둠 속에서 빛을 건져 올렸다면 나는 온천동에서 내 커리어를 쌓아갈 것이다.


시장 골목에서 할머니가 손수레를 끌며 지나갔다. 손수레 위에는 가지런히 쌓인 채소와 과일이 조심스레 흔들렸다. 그 순간 깨달았다. 삶은 저렇게 흔들리며 나아가는 것임을. 온천동의 골목은 좁고 구불구불하지만 그 안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박자로 살아간다. 나도 그들처럼 내 박자를 찾아갈 것이다.


부산의 검푸른 바다를 떠올린다. 바다는 때로 거칠고 때로 잔잔하다. 내 삶도 그럴 것이다. 흔들리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나는 새로운 항해를 시작한다. 온천동은 단순히 생계를 위한 공간이 아니다. 이곳은 내 이야기가 다시 쓰이는 자리다. 골목 어귀에서 부는 바람과 시장의 왁자한 소리가 내게 말한다. 살아가라고. 흔들려도 괜찮으니 계속 걸어가라고.


대전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걸었던 유등천변은 봄이면 버들잎이 흩날리고 여름이면 매미 소리가 요란했던 곳이다. 그 길을 걸으며 새로운 도시에서도 이런 위로를 찾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이제 온천동에서 내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낯선 길을 나아가며 새로운 가능성을 품는다. 언젠가 이 길 끝에서 내가 어떤 얼굴로 웃고 있을지 궁금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걷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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