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위의 무법자
직접이든 간접이든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취미가 무엇이세요?
포털 가입이나 멤버십 신청서처럼 사소한 곳에도 취미와 특기를 적어야 하면 나는 생각이 잠깐 멈춘다.
그리고 결국 이렇게 쓴다.
취미 : 작문
특기 : 독서
독서는 어릴 때부터 내 생활의 일부였다.
자발적으로 학급이나 학년, 때로는 학교 전체의 독서부장을 맡았을 정도다.
독서에는 자신 있지만 누군가에게 책을 추천하는 일은 능숙하지 않다.
좋은 책을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받으면
나는 전원이 꺼진 기계처럼 잠시 멈췄다가 가방 속 책을 건네곤 했다.
아니면 상대에게 질문을 몇 가지 던진 뒤 어렵게 한 권을 골라주었다.
젊었을 땐 하루키 소설 '상실의 시대'나 기형도의 시집 '입속의 검은 잎'을 주로 들고 다녔다.
그래서 몇 번이고 샀는데 내가 좋아하는 책이라서 누군가에게 건네기 좋았다
당시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 걸을 때나 대중교통을 탈 때나 누군가를 기다릴 때 책을 읽었다.
지금도 그때처럼 책을 펼치지만
예전처럼 새로운 분야를 찾아 읽기보다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일이 잦아졌다.
내 군대 주특기는 소총 부사수였지만 인생 주특기는 독서가 됐다.
나에게 글쓰기는 취미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공책에 글을 끄적였다.
음악감상도 취미라 할 수 있겠지만 나는 글을 쓸 때 주로 음악을 튼다.
혼자 일할 때나 야근하는 밤이면 스윙재즈나 클래식을 켜둔다.
음악감상은 글쓰기를 위한 부속품처럼 느껴져서 취미란에 적지 않는다.
어찌 보면 나는 오랜 시간 글을 썼지만 실력은 늘지 않았다.
그래서 글쓰기가 취미라고 말할 땐 부끄럽다.
그렇다고 없는 취미를 꾸며내기보다 있는 그대로 말한다.
요즘은 독서나 작문을 취미로 가진 사람이 드물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내가 취미와 특기를 대답하면
‘특이하다’ 거나 ‘운동할 줄 알았다’고 말한다.
보통은 작문이 특기이고 취미가 독서일 테니까 말이다.
어쩌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 ‘보기보다 똑똑하다’ 거나 ‘차분하다’는 말을 덧붙인다.
독서를 특기로 가진 나의 장점은 어떤 대화에도 끼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가끔은 의미심장한 대답을 하기도 하고 왜 그렇게 잘 아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독서를 통해 쌓은 간접경험 덕분에 새로운 환경에도 금세 적응한다.
예전엔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고 했다.
이제는 라디오 DJ나 교양 프로그램에서나 가끔 듣는 말이 됐다.
가끔 누군가는 음악을 들으며 독서를 하는 내게 무슨 음악을 듣는지 묻는다.
문학이 인기 없는 시대라서일까.
나는 빅밴드 스윙재즈, 낭만파 클래식,
OST(한스 짐머, 대니 엘프먼, 엔니오 모리코네, 류이치 사카모토)를 즐겨 듣는다고 답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외계인을 보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이제는 그런 반응에도 무덤덤하다.
나 역시 학창 시절엔 록과 클래식을 주로 들었다.
나이를 먹으며 취향이 조금 변했을 뿐이다.
물론 지금도 록을 완전히 놓은 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황야의 무법자’ OST를 듣고 있다.
마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되어 황야를 떠도는 듯한 기분이 든다.
백지가 되어가는 세상에서 활자로 만든 총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
어쩌면 방금 그 취미를 해낸 셈이다.
일주일 만에 다시 이 백지에 무언가를 남겼으니.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야이 야이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