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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Aug 30. 2024

삶의 완전성

우리 중에서 그 누구도 "나는 산소를 호흡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는 곧 산소에 대해서는 결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결여되어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굳이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산소에 관해서 완전하다는 뜻이다. 결여의 반대는 충만이자 만족이며 충족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더 이상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건 바로 완전하다는 방증이다.

반대로 우리가 무언가를 말하게 된다면 이는 역으로 우리의 결여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말하며 왜 말하는 것인가라는 문제가 주어진다.

왜 우리는 말하는 것인가? 왜 혀를 움직이고 발성기관의 활동을 스스로 독려하는 것인가?

필요하지 않으면 움직임 없듯이 움직이는 것은 반드시 무언가의 필요를 절실히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말은 무언가에 대한 증명을 시도하는 것이다.

또 우리는 왜 무언가에 대한 증명을 시도하는가? 증명이라는 것은 쓸모 있음이자 의미이며 가치 있다는 것이다.

증명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나를 증명하기 위해 우리는 물을 마시고 음식을 섭취하며 바깥으로 나가 관계를 맺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왜 증명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설명을 마물었다면, 여기서 다시 무엇을 증명하는지에 관한 질문이 뒤따라오게 되어 있다.

무엇을 증명하는 것인가? 이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우리는 무엇을 증명하기 위해 부단히 움직이는 건가?

무언가가 바로 "나"가 아닌가? 나라는 주체가 이 무대에 갑자기 초대되었다는 건 비자발적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생을 원한 적이 없었다는 말을 하게 된다.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생을 부여받았다.

비록 그 생이 축복이 될지 악몽이 될지 모를지라도 반드시 우리에게 생을 부여한 존재가 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 존재는 우리의 거울이 된다.

그 존재가 값 없이, 대가를 바라지 않은 것처럼 부여한 생의 무대에 우리는 홀로 두 다리로 서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어 진다. 그것이 바로 주체로서의 삶이 지닌 숙명이다.

따라서 증명하고 싶은 그 무엇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아무런 대가 없이 부여된 생에서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여부가 바로 삶의 의미이다.

결국 나 자신의 기여이자 쓸모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삶이다. 그 삶의 의미는 삶의 완전성을 추구하고 획득할 때 성립한다.

따라서 인생은 자신을 완성하는 길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자신을 완성해 나가는 길은 제각기 다른 색깔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부여된, 태생적으로 타고 난 성향이자 기질에 따라 삶의 의미를 실현하고 충만해지도록 분투하는 것이 바로 삶이 초대한 무대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자 삶이다. 삶은 곧 자신을 증명하고 완성시키는 길이었다.

마치 산소에 대해 결여되어 있지 않아서 산소에 대해 완전해지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 완전해지는 것이 삶을 부여받은 존재가 짊어질 숙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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