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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예 Oct 28. 2024

한 주먹의 쌀과 두 그릇의 죽

한 주먹 쌀로 만든 죽


그날은 산꼭대기에서의 저녁거리가 걱정이었다. 20km 이상을 이미 걸은 상태라 몸은  고단했지만 며칠 전부터 식량이 거의 바닥난 걸 알고 있었기에 오늘 저녁이 '배부른 축제'가 될 리 없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가방 속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건 그저 한 줌의 쌀.


평소에야 하루 세끼가 기본이지만, 트레킹 중 점심은 에너지바나 간식으로 때우기 일쑤라 두 끼 반 정도면 충분했다. 가끔씩은, 예정된 것보다 조금 더 혹은 덜 먹게 되는 날도 있었다. 그렇기에 항상 여유분의 음식을 좀 더 챙기는 편인데 그때는 며칠전날의 폭식 덕분에 우리의 음식 계획이 살짝 뒤틀렸고, 이제 남은 식량으로는 고작 이 한 줌의 쌀로 저녁과 내일 아침을 해결해야 했다. 


밥을 짓고 밥은 다음날 아침 식사로 남겨두고 냄비에 붙은 밥으로 숭늉을 만들어 때운 그 날의 저녁



육포 찌꺼기 몇 조각을 반찬 삼아 밥을 만들었다.  밥을 지었지만 2인이 먹기엔 턱 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대부분은 내일 아침을 위해 따로 보관했고, 나머지는 최대한 양을 늘리기 위해 죽을 끓였다. 죽이라기보다 거의 쌀 냄새나는 물에 가까웠다. 이윽고 해가 지고, 광활한 산꼭대기엔 영하에 가까운 추위가 찾아왔다. 손을 덜덜 떨며 죽을 한 모금, 두 모금 들이켰지만, 물로 채운 배는 금세 허기를 잊게 하진 못했다. 꼬르륵, 꼬르륵.... 배에서 울리는 소리가 산속에서 메아리처럼 울렸다.


밤이 깊어가자, 텐트 안 대화는 자연스럽게 먹을거리 이야기로 흘러갔다.


"따끈한 삼겹살... 오우... 그 맛 생각나지?"


"난 갓 튀겨낸 프렌치프라이가 간절해. 눅눅한 건 안돼. 바삭한 거 말이야. 산에서 내려가면 맥도널드에서 프렌치프라이 꼭 먹어야 해. 약속해. 알았지?  프렌치프라이다." 


프렌치프라이... 프렌치프라이... 나는 마치 주문이라도 외우듯 프렌치프라이를 반복하며, 머릿속에 완벽한 그 바삭함을 상상했다. 그날 밤, 광활한 자연 속에 지어진 텐트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최대의 오락은 허기진 배를 달래며 그리운 음식을 떠올리고 꿈꾸는 것이었다.



그날의 캠핑존. JMT는 허가증이 있는 하이커에 한하여 트레일과 물에서 어느정도 떨어진 곳에서는 어디서든 캠핑이 가능했다. 이 날은 우리를 포함해 세개의 텐트가 이 곳에 있었다.



다음날 음식을 픽업하러 갔던 렌치에서 우리는 허덕였던 전날밤을 생각하며 준비한 음식 외에 하이커박스에서 음식을 좀 더 보충하고 산행을 이어갔지만, 내가 그토록 갈망했던 프렌치프라이를 입에 넣는 날은 10일이 훨씬 더 지나서야 찾아왔다. 콩한쪽도 나눠먹어야 한다는 속담처럼 흰 죽을 나눠 먹으며 서로를 토닥였던 그날의 순간은 백패킹음식 중 단연 가장 깊게 기억에 남는 한 끼로 자리 잡았다.




허기는 졌지만 감성만은 풍족했던 그 날 해질녘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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