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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예 Oct 14. 2024

하이커의 음식들

백패킹 음식

산행의 맛


산을 오르는 동안, 나의 머릿속을 가장 많이 지배하는 건 깊은 철학도, 미래에 대한 묵상도 아닌 바로 음식이다. 산은 삶의 축소판이고, 음식을 향한 갈망은 그 산행의 중심에 놓인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다. 높은 곳을 향해 발을 옮길수록, 산행의 리듬과 함께 마음 한 구석에서 피어나는 것은 인스턴트로는 채워지지 않는, 익숙한 맛에 대한 그리움이다. 나의 긴 등산을 마친후에 꿈꾸는 상상 속 최종 보상은 꽁꽁 언 하겐다즈 바닐라 스위스 아몬드 아이스크림이다. 내겐 한 여름날의 뜨거운 햇살과 맞서 싸우며 정상을 향하는 인내의 상징이며 끝없는 여정을 마무리하는 작은 트로피와 같다고나 할까.


그런데 생각해 보면 경험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음식들은 생각나지 않는다.  미슐랭 쓰리 스타 요리보다 따뜻한 어묵 국물이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걸 보면, 우리의 욕망도 결국 경험의 울타리 안에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닐까 싶다. 미지의 맛은 나의 산행에서는 불러낼 수 없는 환상일 뿐이다.


한국에서 출발전 여러번 체크하지만 현지에서도 산을 올라가기전 가방을 풀고 여러번 음식을 다시 체크한다.  기존 포장지는 다 제거하고 음식용 지퍼백에 모두 담아 준비한다.


산행의 쏘울 푸드 : 누룽지와 블럭국 그리고 사발면


백패킹에 들고 다니는 음식들은 사람들마다 다양한데 나는 물만 넣으면 국이 되는 블럭국은 꼭 챙겨가는 편이다. 북엇국, 미역국, 시래깃국, 해장국 등등 종류도 다양한 데다 맛과 영양도 좋고 조리도 간편하기 때문에 빠지지 않는 아이템이다. 그리고 밥 대용으로는 경량이고 간단하게 조리할 수 있는 누룽지를 조금 챙겨 간다. 예전에 약간의 쌀도 챙겨간 적이 있는데 가스도 많이 쓰이고 무겁기까지 하기 때문에 쌀은 효율적이지 못하다. 누룽지는 물에 살짝 불리면 밥이 되고 물을 많이 넣으면 국처럼도 되기 때문에 아침식사대용으로 이만한 것도 없다.



등산시작하고 2일까지는 신선한 음식을 보관 할 수 있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신선한 샐러드와 스테이크, 소세지를 챙겨간다.


한국 전투 식량 하나와 김을 넣은 주먹밥 + 참치 조합이면 2인상이 뚝딱 차려진다. 이 정도면 산에서 진수성찬이다. 전투식량 껍질과 보냉 은박지는 여행 내내 보온역활로 쓰였다.



그리고 라면, 그중에서도 김치사발면은 빠르게 익어가는 면발처럼 산에서의 시간을 압축해 준다.  김치사발면 몇 박스 사서 면만 모아 대형 지퍼백에 대충 부셔 넣으면 대략 10개씩 정도 들어간다. 면을 부술 수록 공간효율이 높아져서 더 맘에 든다. 사발면의 면은 빨리 익고 김치의 얼큰함은 나를 다시 한번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힘이 있다.  한 번은 튀김우동과 다른 맛의 라면도 가져간 적이 있는데 고도가 높다 보니 가스도 빨리 쓰이고 질리기도 했기에 그 뒤로는 김치사발면만 믿고 간다. 거기에 누룽지를 넣어 먹으면 산에서 이보다 완벽한 한 끼도 없다. 이 모든 음식은 단순한 배를 채우는 수단이 아닌, 나의 여정을 이어가게 만드는 연료인 셈이다.



프로틴 절충


백패킹 간식으로는 육포와 안주용 마른오징어, 그리고 견과류를 들고 다닌다. 에너지바로는 부족하니, 따로 챙겨간 견과류로 프로틴을 보충한다. 한 번은 캐나다에서 만난 유럽 하이커가 책가방 크기보다 작은 짐을 메고 다니는 걸 봤다. 그 친구는 텐트도 없이 나무 밑에서 잠을 자고, 옷은 단벌신사에 하루 종일 프로틴 가루로 버티며 산행을 이어갔다. 그것도 몇 주가 아닌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참으로 독한 놈이 아닐 수 없다.



물만 넣으면 메쉬포테이토가 되는 제품에 육포를 찟어 넣어 한끼를 만들수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 샀던 전투식냥 비빔밥. 가져간 김밥용 김에 싸 먹으면 든든한 한끼가 된다.



백패커의 음식준비에서 중요 포인트


긴 백패킹에서 가장 중요한 건 똑같은 음식을 너무 많이 준비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하나 골라 계속 먹을 수 있다고 자신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긴 산행 후의 매일 같은 음식 섭취는 생각보다 굉장히 빨리 질리게 되어 있다.  5일 산행이라면 15끼를 어떤 음식으로 버틸지 고민해야 한다. 나와 김치사발면은 오랜 신뢰를 쌓아왔지만, 그렇다고 세끼 내내 먹을 순 없다. 가장 흔한 실수는 에너지바나 간식을 똑같은 걸로만 챙기는 것이다. 미국 하이커들이 챙기는 오트밀이 그 좋은 예다. 간편하지만 금방 질린다.  어떻게 이걸 아느냐?


미국에서는 긴 트레일 중 음식을 조달하기 위해 운이 좋으면 마을로 내려가 장을 봐서 신선한 음식을 충전하기도 하지만, 트레일 중에는 산 중반에서 음식을 조달할 수 있도록 지정된 장소로 음식을 미리 택배로 보내서 나중에 픽업을 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 산속에서 산장을 운영하거나 하이커들을 대상으로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공간을 가면 많은 하이커들이 자신들의 질려버린 음식이나 필요 없는 물품들을 기증(좋은 표현으로 기증이고 말 그대로 버리고 가는 경우)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물품들을 모아둔 박스를 하이커 박스라 부른다.


JMT 중 미리 붙여둔 음식을 픽업하기 위해 들린 뮤어렌치. 오른쪽은 하이커들이 버리고 간 남은 음식들을 모은 바스켓들이다. 오트밀통이 따로 하나 있을 정도였다


그 속의 물품들을 자세히 보면 이걸 도대체 왜 산에 들고 다녔을까 생각되는 물품들도 많고 중간에 내가 필요한 아이템을 득템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다 떨어져 가는 모기 기피제라던지 인스턴트커피, 밴드나 의료용품 등인데 하이커 박스에서 빠지지 않고 늘 쌓여있는 물품이 오트밀인 거다. 오트밀 외에도 외부에서 사면 비싼 등산용 음식들(한국돈으로 이만 원 가까이한다)도 수두룩이다. 아마도 맛이 괜찮아 여러 개 사서 들고 다니며 먹다 이내 질려버렸거나 도중에 산 타기를 포기하고 내려가는 친구들의 물품일진대 이런 아이템들이 모인 하이커 박스는 다른 하이커들에게 보물박스일 수도 있는 것이다. 적어도 나에겐 아주 재밌는 경험 중 하나다.


하이커 박스에서 특이한 메뉴 중 하나는  직접 음식을 건조한 홈메이드 음식도 종종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퍼백에 무엇인지, 물을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등등이 적힌 지퍼백을 발견하면 꼭 한 두 개씩 집어오게 된다. 이것도 복불복이라 위험이 따르지만 색다른 맛에 대한 도전은 즐기는 편이기에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다른날 다른 곳의 하이커 박스에 보관된 음식과 그 날 득템한 물품들.  이때는 음식 부족현상을 격은 터라 엑스트라로 좀 더 챙긴 편이다
건조된 홈메이드 음식들. 맛이 보장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복불복이다. 물만 부으면 완성된다. 나름 도전하는 재미가 있다.


이렇게 집어간 음식들 중 맛이 없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근처에 쓰레기통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맛이 없더라도 눈을 감고 다 해치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행 내내 냄새나는 음식을 들고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초콜릿 맛의 오트밀 같은 홈메이드를 집어 왔었는데 얼마나 후회를 했었는지 울다시피 하며 해치운 적도 있다.  



결론적으로는,

백패킹 음식은 여러 가지를 다양하게, 영양가를 고려하여 검증된 맛으로 준비하는 것이 핵심이다.

부지런한 분들은 집에서 직접 음식을 하고 건조해 준비하기도 하지만 나에겐 너무 많은 노동을 의미하므로 나는 조용히 출국 전 대형마트로 가서 장바구니를 채우는 것으로 여행을 준비한다. 이미 시중에는 훌륭하게 만들어진 제품들이 많이 있다. 다만, 한 번의 긴 장거리 등산으로 1년 치의 인스턴트를 한 번에 먹는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최고의 뷰와 함께하는 인스턴트. 나쁘지 않은 조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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