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은 연애> 스무 번째 이야기
9시까지 등교해야 할 아이가 8시 30분에 겨우 일어났다. 그리고 아직 자고 있는 나를 깨운다.
“엄마! 리모컨 어딨어?”
눈을 짧게 뜨고 길게 감기를 반복하며 방향 감각에만 의지한 채 부엌으로 엉금엉금 향하는 나에게 아이가 리모컨이 어디 있는지 물어봤다.
“알았어. 찾아줄게. 기가지니. 리모컨 찾아줘!”
“멜로디로 리모컨을 찾아보겠습니다.”
순간, 나와 아이는 말소리를 죽였다. 정적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익숙한 리모컨의 ‘저 여기 있어요’ 멜로디를 들을 수 있다. 지금 그 멜로디는 소파 매트 틈에서 들려온다.
덕분에 아이는 원하는 TV프로그램을 틀어 놓고 잠을 깨우며 책가방 챙긴다. 나는 센 불에 달군 프라이팬에 날달걀을 깨트려 넣었다. 다행히 아이가 반숙 프라이를 좋아해서 저데로 흰자 테두리만 갈색으로 바삭하게 튀겨지며 먼저 익기를 기다리면 된다. 익으면서 종종 기름이 튀는데 익숙해져서 그런 건지 아직 잠이 덜 깨서 그런 건지 뜨거운지도 모른다. 책가방을 다 챙긴 아이가 자기 몫의 밥을 담은 그릇을 들고 계란 프라이를 기다리고 있다.
“엄마 아까부터 문자 오는 거 같더라.”
뜨거운 계란 프라이를 알맞게 식은 찬밥에 맛있게 비벼 먹으며 아이가 내 핸드폰 근황을 알려준다.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톡이 들어오는 알림 소리가 들리긴 하는데 소리가 너무 작아 어디에 있는지 위치를 모르겠다. 기가지니가 내 핸드폰 위치까지 알려주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운동화를 신고 막 집을 나서려는 아이를 붙잡았다.
“엄마 핸드폰에 전화 좀 걸어봐 주라.”
“나 학교 가야 되는데?”
“그러니까 학교 가면서 걸면 되잖아.”
“싫은데.”
“아, 왜?”
“소파에 있으니까. 잘 봐봐. 리모컨이랑 같이 소파 틈에 껴 있었어. 크크크.”
뭔가 꾹 참았던 웃음이 아이가 쓰고 있던 마스크 밖으로 새어 나왔다. 아까 리모컨 찾을 때 내 핸드폰을 봐놓고선 모른척한 거다. 저 녀석 저거, 있다 저녁에 만나면 어떻게 약 올리지.
[누님! 어떻게 지내십니까?]
소소한 광고성 톡과 있는지도 몰랐던 쇼핑몰 쿠폰이 얼마 안 남았으니 반드시 사용하길 바란다는 재촉톡 사이에서 오랜만에, 거의 3년 만에 안부를 물어오는 톡이 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겨우 바쁜 아침이 지났다. 답톡 대신 나는 모자란 잠을 마저 채우기로 했다. 게다가 오늘은 모처럼 낸 휴가다. 아이 없이 혼자 TV리모컨을 차지할 수 있는 소중한 날. 일단 더 잘 거다. 점심까지 숙면을 취해보자.
<붐붐붐! 붐붐붐!!>
‘으! 누구냐? 아이는 학교에 있을 때는 전화기를 꺼 놓는데…’
머리로는 받지 않으려고 했는데 내 손이 더 빨랐다. 잠이 덜 깬 늘어지는 테이프 같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 보… 세… 요.”
<“아, 누님!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요? 누님 저 세호예요!”>
“알아… 세호. 근데… 왜?”
거의 3년 만에 뜬금없이 톡으로 안부를 물어오던 세호가 답장이 없자 전화까지 걸었다.
<“아, 왜는요. 누님이 궁금해서 전화했죠. 그런데 목소리가… 지금 어디십니까?”>
“응? 네가 그걸 알아 뭐하게?”
<“이 시간까지 주무시고 계셨나 보네. 휴가?>”
“어? 어… 응. 뭐 그래. 암튼 그래서 나는 잘 지내니까 너도 잘 지내라.”
<”그럼 정말 잘 됐네. 오늘 언제 시간 되시죠? 한 번 뵙죠!”>
“응? 싫어.”
<”아니 왜요? 누님! 제가 안 그래도 오늘 소양에 가거든요. 진짜 잘 됐다. 누님 집이 소양이잖아. 딱 촉이 와서 연락하고 싶더라니. 누님 현수 누군지 기억나시죠?”>
“현수? 기억 안 나. 기억이 안 난다고.”
<”아, 누님! 현수요, 현수. 현수가 왜 기억에 없다고 하십니까? 현수가 그때 누님이랑 그, 그, 그전남편 그 자식, 아니 그 녀석이랑 데이트하라고 영화표도 공짜로 주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 그래 영화표는 기억난다. 그래서 왜 만나야 되는데?”
“저하고 현수 그리고 누님까지. 오늘 1시에 단출하게 빼갈에 중국요리.”
정말이지 세호도 갑작스러운데 웬 현수까지. 둘 다 이혼과 결혼 전에, 그러니까 10년도 전에 클럽에서 놀 때 어울리던 몇 살 아래 동생들이다. 이때가 지금의 전남편을 만났던 때이기도 하다. 그때 나는 젊었고 이 친구들은 어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줌마고 얘네들은 아저씨다. 게다가 나는 그냥 아줌마가 아닌 꽤나 모범적인 학부형 역할도 하고 있다. 옛날 놀 때를 생각해보면 어떤 의미로는 신분세탁을 한 거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대단하긴 했다. 어떻게 그렇게 하루가 멀다 하고 밤새 놀았는지.
“아우! 몰라. 세호야 나중에 통화하자. 나는 더 자야 돼.”
<”누님! 잠깐만요, 누님! 현수에 대해서 아셔야 할 게 있어요.”>
“뭔데?”
전화기 너머로 세호가 크게 한 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웬 한숨이야! 너 아직도 담배 피냐?”
<담배요? 네, 담배는 아직 피죠. 아니, 그런데 그게 아니라!”>
“아니면 그럼 뭔데?”
<”… 현수가 혈액암 4기래요.”>
“… 왜?”
멍청하게 왜냐고 이유를 물어보다니. 자괴감이 들면서 잠이 확 깼다.
<”굳이 왜냐고 물으신다면… 글쎄요…”>
이놈 세호!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건 잘도 하면서 눈치 없이 이럴 땐 대답을 하려고 들다니!
“아니, 이유는 중요한 게 아니고 그래서 현수… 지금은 어때? 어떻게, 괜찮아? 치료는?”
<”아, 그럼요! 현수 다 나았어요!”>
“뭐? 야!”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 깜짝이야! 누님 진정하시고 들어 보세요. 현수가 혈액암 4기였다구요. 그런데! 혈액암 4기였는데! 지금은 치료를 잘 받아서 어제 완치 판정받았다고 연락이 왔거든요.”>
“엥?”
<”그래서 축하자리를 마련하면서 누님도 함께 모시고자 하는 거죠. 그럼 너무 좋겠죠? 1시에 소양역 앞, ‘드래곤차이’! 자, 빨리 준비해서 허리 업!”>
뭐지… 걸렸다는 혈액암에 걸렸지만 또 다 나았다고 하니 다행이긴 다행이고 기쁘긴 기쁜데, 그러면서도 뭔가 걸쩍지근한 것이… 열이 좀 받는 것 같은 이 기분적인 기분.
씩씩거리며 네이버 지도로 ‘드래곤차이’를 검색했다. 잠은 다 깨버렸고 슬슬 나갈 준비나 해야겠다.
[미안. 애가 학교에서 코로나 때문에 갑자기 급식 안 해주고 집에 와서 급하게 점심 주고 나오느라 좀 늦음. 먼저 먹고 있어. 나는 애 점심 주면서 같이 뭐 먹음.]
[누님 걱정 말고 천천히 오세요. 택시 타고 오시면 택시비도 드립니다!!]
[오! 그래? 나 방금 버스 탔음. 그래도 택시비는 받음.]
[ㅋㅋㅋ. 누님, 저희 2층 제일 안쪽 룸에 있습니다. 카운터에 말하면 안내해 줄 거예요.]
밥 한 번 먹는데 굳이 룸까지 잡다니. 이 녀석들은 옛날에도 술을 먹어도 양주만 먹어야 한다며 허세를 부리곤 했었다. 물론 물어보면 코로나 때문이라고 하겠지.
‘드래곤차이’의 2층, 룸으로 가는 복도는 어두웠다. 미닫이 문이 열리자 통창으로 되어 있는 룸 창문에서 점심 햇빛이 쏟아졌다. 눈이 부셔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아! 누님 얼굴 좀 피세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거기 블라인드나 좀 내려라. 이것들아!”
테이블에는 깐풍기, 팔보채, 동파육이 반쯤 남아 있었고 거의 손을 대지 않은 단무지 접시가 놓여 있었다.
“와, 누나 진짜 오랜만이다. 잘 있었지?”
세호가 블라인드를 내릴 동안 내가 들어왔다고 잠깐 엉덩이를 뗐다가 앉는 현수가 보였다. 10년? 아니 13년 만인가? 내 기억 속 현수는 마르고 호리호리한 체격에 때 되면 파마를 하는 애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길에서 우연히 지나치면 못 알아볼 수도 있을 만큼 퉁퉁해졌다. 물론 파마를 할 일도 당분간은 없어 보인다.
“… 어머, 현수야… 너 진짜 아팠어. 진짜 아프구나. 진짜 진짜로 아팠던 거였어. 너 왜 이렇게 부은 거야? 이게 다 항암 부작용이야?”
“아, 부은 것도 좀 있긴 한데, 그런데…”
현수가 말끝을 흐렸다.
“그런데 왜? 뭐가?”
“살찐 거야. 결혼하면서 한 15킬로 쪘거든. 그러고 나서 걸린 거지.”
“아…”
“아! 누님 아픈 게 아니라니까요. 제가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현수, 이 자식 지금은 깔끔하게 완치 판정받았다고요.”
“아니, 나도 알아. 안다고!”
약간, 정말 아주 약간 짜증이 났는데 티 내고 싶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아직 현수 너 머리카락이랑 털이… 진짜 다 없네. 면도한 거야? 아니면 저절로 다 빠진 거야? 그 TV나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이건 그냥 부작용이야. 어차피 항암 하면 다 빠지니까 미리 빠짝 면도한 것도 있고. 안 그러면 너무 아프니까.”
“안 그러면 아프다니, 어떻게 뭐가 아파?”
현수는 작년에 허리가 안 좋아서 크게 고생했다고 했다. 하는 일이 건축 설계라 책상에 너무 오래 앉아 있어 얻게 된 고질병인 줄로만 알고 크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간 병원에서 찍어본 엑스레이상으로는 척추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한 거다. 물론 거북목에 약간의 디스크 눌림 그런 소소한 문제는 있었지만 큰 통증을 야기시킬 만한 원인이 보이지 않아 뼈스캔을 받아 보았는데 하얗게 보여야 할 뼈들이 곰팡이 피듯 중간중간 시커멓게 보였다는 거다. 그리고 진단받은 혈액암 4기. 그때가 현수가 결혼한 지 만으로 3년 차 된 해였다고 한다.
“그런데 누나도 소양 사는구나. 나도 결혼하면서 신혼집 알아볼 때 누나 사는 동네 아파트도 알아봤었는데. 그때 거기로 들어갈 걸.”
“그래? 너 오면 웃겼겠다. 나는 이혼해서 오고 너는 결혼해서 오고.”
“지금 사는 집은 신축인 거 말고는 베네핏이 없어. 어때? 지금 누나네 집 많이 올랐지?”
“글쎄 잘 모르겠는데. 다 낡은 아파트. 나는 그런 거 관심이 없잖아.”
“야, 누님 모르냐? 원래 누님은 그런 거 모르잖아. 그렇죠? 누님은 여전히 주식 같은 것도 안 하고 그렇죠?”
“하긴 누나가 좀 그랬어. 돈을 몰랐지. 세상 물정에 지나치게 해맑았어.”
“야야, 너네 뭐냐? 왜 막 열이 받으려고 하지?”
7년 전, 이혼하면서 서울에서 소양으로 이사를 왔다. 지금 사는 집은 그때 구한 집이다. 나름 강남과 가까운 수도권이라 서울로 출퇴근이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으나 아이와의 시간을 생각해서 회사도 소양으로 옮겼다. 회사를 옮기면서 하던 일의 종류도 바꿔야 했다. 경력이 단절되고 월수입도 줄었지만 크게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때 제가 누님 뵈려고 이 동네 처음 놀러 온 거잖아요.”
“그래, 네가 그때 그렇게 오지랖 오브 오지랖을 부렸지. 야, 양세호! 너야말로 아직도 주식을 따위를 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비트코인이니 뭐니.”
“누님 또 왜 그러십니까? 그런 것도 다 총알이 있어야 하는 건데, 저는 뭐 총알은커녕 콩알탄도 없습니다.”
“현수 너는? 너는 뭐 결혼까지 했으니까 쟤 같은 뻘짓은 안 하지?”
“에이, 현수는 그런 큰돈 쓸 배포는 없죠, 누님.”
“으이그! 배포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세호는 내가 소양으로 막 이사 왔을 무렵, 내 이혼에 대한 격려 차원에서 밥을 사겠다며 소양으로 나를 만나러 왔다. 세호를 처음 알았을 무렵, 세호는 용산에서 조그맣게 카메라 관련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게 꽤 잘 되었는지 세호는 클럽에서 양주만 사는 애였다. 주변엔 여자애들도 꽤 많았는데 양주병이 바닥을 보이면 그 여자애들도 바닥을 보이며 곁을 떠났다. 그런 세호가 내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에는 연락 한 번 없더니 내 이혼 소식에는 연락을 해왔다. 그리고 내 이혼 후의 삶을 응원하며 자신은 주식에 올인한답시고 사채까지 사용하다 하던 사업까지 모두 말아먹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래 놓고 밥을 사겠다는 오지랖이라니… 그날, 먹었던 밥값은 끝까지 세호 본인이 계산했다. 자기가 사기로 한 밥이니 그래야만 한다는 이유로.
나름 내가 꽤 불쌍하다고 여겼던 때라 밥 한 끼 얻어먹는 정도는 편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그날 이후로 너무 불편해져서 이혼격려밥 얻어먹기는 그만뒀다. 세호는 현수 소개로 건축 공사 현장에서 토목일 비슷한 걸 한다고 들었다. 매우 복잡하고 어려우며 몹시 힘든 일이라고 설명해주었지만 아무리 들어도 이해하기 힘든 내용뿐이었다. 뭐 대충 어디 어디 김포 빌딩은 세호 없었으면 못 올라갔다 그런 내용이다. 귀 기울여 들어도 도통 왜 그런지 모르겠는 그런 이야기.
“양세호! 그때 네가 내 동정표를 다 뺏어갔어. 내가 최고로 불쌍할 수 있었는데!”
“아~ 누님! 그게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제일 불쌍하다고 청승 떨 수 있었는데 네가 그걸 다 망쳤다고.”
“아, 누님이 뭐가 불쌍하다고 그러세요. 그러지 마시고 한 잔 받으세요.”
“아니 내가 불쌍하고 싶다고 이놈아!”
세호가 내 투정 아닌 투정을 묻으려고 소주잔보다 작은 빼갈잔에 고량주를 따랐다. 향이 너무 좋았지만 살짝 입만 데고 잔을 내려놓았다.
“뭐야? 누나가 왜 술을 꺾어?”
“그래요, 누님! 첫 잔은 비우셔야죠.”
“안 돼. 있다가 애 학원 끝나고 오면 저녁 해줘야 돼. 숙제도 봐줘야 되고 이것저것 놀기도 해야 되고. 암튼 바빠. 그래서 안 돼.”
“누님이? 누님이 직접 요리도 하세요?”
“왜? 누나가 안 해서 그렇지. 하면 또 잘할 거야. 그치?”
“시끄럽고, 내 새끼니까 해주는 거지. 내 밥은 나도 잘 안 해 먹어.”
그나저나 아까부터 궁금했던 걸 현수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근데 현수야, 그거 눈썹 그린 거 아니지? 문신한 거지? 왜? 항암 때문에 한 거야?”
현수는 항암을 시작하면서 머리카락부터 겨드랑이, 사타구니까지. 팔, 다리와 얼굴의 눈썹, 솜털, 수염까지 전신의 모든 털이 다 빠졌다고 했다. 나는 어렴풋이 털이 가늘어지며 숭덩숭덩 힘없이 빠지는 건 줄로만 알았는데 현수 말은 그게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털들을 막 미친 듯이 쥐어 뜯기는 느낌이라고 했다. 이렇게 쥐어뜯기는 게 너무 아파서 빠짝 면도한 거라고 한다. 그리고 현재 현수는 눈썹만 까맣게 남아 있는데 꽤 잘돼 보인다. 눈썹의 털이 다시 난다면 같이 어우러져 꽤 자연스러울 눈썹 문신이다. 나중에 문신한 곳 정보 좀 공유하자고 해야겠다.
“아, 이 누나 진짜 섭섭하네. 이거 10년도 전에 우리 한참 같이 놀 때, 그때 한 거잖아. 그때 누나가 짱구눈썹이라고 놀려댄 거 기억 안 나?”
“내가? 내가 그랬다고?”
“그래. 그때 세호랑 같이 해서 우리 둘, 누나가 세트로 놀렸잖아. 기억이 안 나?”
이야기를 듣던 세호가 눈썹을 실룩거린다. 세호도 꽤나 자연스럽게 눈썹 문신이 그려져 있다.
“어머, 내가 그랬다고? 나는 금시초문인데. 어떻게 너네는 나도 안 하는 문신을 했냐? 안 맞아. 너네 나랑 안 맞아.”
“아, 이 누님이 또 섭섭하게 왜 그러십니까?”
세호가 한 잔 하자고 잔을 부딪힌다. 현수는 물 잔을 들고 나는 술잔을 들었다. 이번에도 살짝 입만 축이고 잔을 내려놓았다. 고량주는 거의 세호 혼자 마시고 있다. 내가 오기 전에 시작했으니 반 병쯤 비웠으려나.
“그런데요. 누님 제가 이제 와서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그러면 말하지 마.”
“전 누님, 그놈 그 이름이 뭐였더라?.”
“전형승!”
“아 형승이 그놈이 쓰레기인 거 진작에 알고 있었다구요.”
전형승은 전남편 이름이다. 세호는 나보다 세 살이 어리고 형승이는 세호보다 두 살이 어렸다.
“뭐?”
“그렇잖아요. 제 눈에는 다 보였거든요.”
“야, 이제 와서 그런 말 하면 뭐 하냐? 진작에 말을 해줬어야지.”
“아니, 그래도 그때는 누님이 연애중니까 제가 그 선택은 또 존중을 해드려야죠.”
“그만해. 무슨 다 늦게 뒷북이야, 얘는.”
“아니, 누나. 세호가 말을 좀 돌려서 못 해 그렇지. 나쁜 뜻은 없는 거 알지?”
“여기에 무슨 나쁜 이고 좋은 이고 뜻이 있을 게 뭐가 있어. 다 지난 일인데.”
나는 술 대신에 현수처럼 물 한잔을 벌컥 비웠다.
“내가 이혼하고 나니까 세호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백 명이야. 자기들은 진작에 쓰레기인 거 다 알고 있었데. 근데 그럼 뭐 어쩌라고. 나도 이미 알았으니까 이혼 한 거지. 다 지나고 나서 왜 아는 척이야. 하려면 결혼 전에 하던가.”
물을 마신다는 게 이번엔 나도 모르게 앞에 있던 내 술잔을 비웠다.
“크! 맛있다.”
오랜만에 고량주 향이 콧구멍을 찔렀다.
“그러니까 양세호, 너는 아는 척 좀 하지 마.”
“아니 그러니까요, 누님! 저는 그놈 문제 있다는 거 누님이 걔 만난다고 할 때부터 알고 있었다니까요.”
“아니, 알았다고. 그러니까 진작에 말해주지. 왜 이제 와서 말하냐고. 내가 알아서 이미 잘 헤어졌잖아. 안 그래?”
“아니, 누님! 그게 아니라 이유가 있었잖아요. 그때는 누님이 좀… 무서워서 그랬죠.”
현수가 내 빈 잔에 도쿠리를 기울였다. 세호도 그 새 한잔을 비우고 억울하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어머? 애 좀 봐라. 내가 뭘? 뭐가 무서워?”
“그게 아니라 세호 네가 그 형승씨를 불편하게 그랬잖아. 누나 그래서 그런 거 아니야?”
현수가 끼어들었다.
“뭐? 형승이 그놈한테 누님이랑 사귀고 나서도 호칭 정리 똑바로 해라. 그랬던 거?"
“뭐? 양세호 너 형승이한테 그랬니? 현수야, 너네 그랬었어?”
“아니, 누나! 나는 빼 줘! 나는 안 그랬어. 세호만! 세호만 그랬지. '아무리 사귀는 사이라도 누님은 누님이다. 맞먹는 거 아니다.' 이렇게 세호가 형이랍시고 꼰대 짓을 좀 했지.”
“아... 누님이 그래서 저희한테 섭섭했던 거구나...”
“아, 나는 빼라니까.”
현수의 눈썹 문신이 억울한 팔자 눈썹이 되었다.
“진짜 이것들이 웃기고 있네. 너네 그랬었어?”
전남편 형승이는 결혼 전에는 ‘자기야’라는 호칭을 쓰더니 결혼 후부터는 내 이름을 그냥 불렀다. 가끔 ‘야’라는 호칭도 사용했다. 이건 시댁 식구들과 함께 있을 때면 더 심해졌다.
“나는 너네 그랬던 건 진짜 몰랐고! 그때, 내가 너네한테 쎄하긴 쎄했는데 그건… 너네 맨날, 그 누구냐? 그 요가학원 패거리, 걔네한테 호구 잡혀서 허구한 날 돈 쓰는 거 꼴 뵈기가… 아휴 됐다. 내 돈도 아니었는데… 이것도 뭐 다 지난 일이지 뭐… 술이나 마시자.”
“아니, 누나 나는 안 그랬다고.”
현수가 물 잔을 벌컥벌컥 비워버렸다.
“현수 너도 그러는 거 아니야.”
“응? 내가 뭐를? 누나 내가 왜?”
“너 그 뮤지컬 티켓 기억 안 나?”
“아… 그게 왜?”
“좋기는 개뿔! 너 그거, 낮 시간대라 어디 유치원인지 초딩인지 단체 관람이 와서 죽는 줄 알았어. 애들 막 울고 웃고. 현수 너는 꼭 그런 것만 남 주더라.”
“그랬어? 정말? 왜 말을 안 했어? 나는 몰랐지.”
“뭐야, 너 그 티켓 그 요가학원애들이 달라고 했었잖아. 그걸 누님 드린 거였어?”
“누나가 오랜만에 연애하는데 좀 보탠 거지.”
“보태? 정말 양세호, 이거 봐라. 너는 다 알았다면서 현수는 왜 안 말렸니?”
“아니 그러니까요 누님. 제가 알긴 알았는데…”
“시끄럽고, 제발 우리 유구무언 하자.”
도쿠리 한 병을 다 비웠다. 한 병밖에 안 비웠는데 나는 집에 갈 시간이 됐다.
“근데 그거 알아? 우리 이렇게 낮에 보는 거 완전 처음이다.”
“어? 그렇네.”
“그래. 옛날에도 오밤중에 만나서 새벽에나 헤어졌지. 우린 아침에 해장술도 같이 안 했어. 너네는 맨날 요가 패거리 애들이랑 갔잖아.”
“아, 누님이랑 그런가요? 그렇네, 맞네!”
“이야… 근데 그걸 이제 알았는데 지금 헤어져야 한다구요?”
“응!”
“누나, 여기 타. 야야, 누나가 뒤에 타야지.”
어쩔 수 없이 물 밖에 안 마신 현수가 자기 차로 집까지 데려다준다고 얼른 타라고 한다.
“아무튼 너네 때문에 나는 불쌍해질 수가 없어.”
“누님, 또 뭐가 불만이세요. 얼마나 좋아요. 그래도 이렇게 우리 다 잘 살잖아요.”
나는 정말 의아했다.
“왜 나는 너네랑 이야기하면 꼭 우리 아빠, 아저씨들이랑 말하는 거 같지?”
“아니 누나! 나는 왜? 나도 그래?”
“어, 너도 그래. 아까 유시민이랑 이명박 의료보험 이야기할 때는 우리 큰 아빤 줄 알았어.”
“제 말이 맞죠? 누님! 이명박이 유시민 다 해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은 거라니까요.”
“네네, 알았어요. 알았어. 틀린 말 아닌 거 너무 잘 압니다.”
괜찮다고 하는데도 현수는 단지 안까지 들어와 내가 사는 동 앞에 내려주었다.
“아 누나 애까지 보고 가면 좋은데. 이거 나중에 용돈 줘.”
현수가 만 원짜리 지폐를 몇 장 꺼내고 있었다.
“누님 저도요.”
세호도 지갑을 뒤적이려고 하고 있다.
“아! 됐어! 왜 그래? 너네 진짜 너무 아저씨같애.”
“아, 그럼 누나. 다음에 다 같이 밥 한번 먹자.”
“그래요, 누님”
“됐어요, 됐어. 그런 빈 말은 하지 마시고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우리 진짜 무사무탈하게 살다가 나중에, 진짜 나중에 어쩌다가 한번 봅시다. 빨리 가. 그냥 가. 제발 빨리 가.”
토목 일을 하러 원주로 가야 할 세호가 그전에 날을 잡아 식사를 하자는 걸 겨우 조용히 시켜 돌려보냈다. 그런데 다음을 기약하며 밥을 먹자는 그런 못 지킬 말은 하지 말라고 선언한 내가 오히려 못 지킬 말을 한 사람이 되었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헤어진 그날 밤, 바로 이 녀석들에게 톡을 날렸다.
[큰일 났음!!!!! 우리 애가 지금 자가진단 두줄 떴음!!!!!!!!! 나는 음성이지만 너네도 검사해봐야 함!!!!!!!]
답톡이 없었다. 읽씹이었다.
[어떻게, 해 봤어? 왜 답이 없어? 빨리 나 불안함!!!!!!!]
[누님, 저 음성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누나, 나 음성.]
[아, 다행스.]
[누님이야말로 조심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진짜… 누나는 애랑 격리를 할 수가 없잖아?]
정말 다행히 아이가 양성이 뜬 다음날 나도 양성이 떴고 둘이 나란히 집에서 격리 생활을 즐겼다. 다행히 둘 다 고열이 아닌 미열 증세와 어차피 환절기에는 겪어야 할 비염 증세 정도의 증상만 보였다. 대신 나는 이틀에 한 번 꼴로 세호와 현수에게 자가진단을 종용했다.
[오늘도 자가진단 해봤어? 어때? 괜찮아?]
답이 없었다.
[왜? 왜 답이 없지? 현수는 현수 괜찮아?]
[아, 누님 저는요? 저는 안 물어보세요? 저 오늘도 음성입니다.]
[그래서 현수는? 현수는 왜 답이 없냐고?]
[안 그래도 오늘 현수 만나서 구로 갔습니다. 볼 일이 있어서.]
[아, 그래 다행이다. 이 정도 기간 동안 음성이면 난 안심해도 될 듯]
[현수 운전 중일 걸요.]
이건 정말 말도 안된다. 갑작스러운 코로나 때문에 내가 이 녀석들에게 집착하는 꼴이 되었다.
[구로? 왜 너네 둘만 가? 나는?]
[네에?!!!!!!! 누님은 지금 격리 중이시잖아요!!!!!!!!]
[뭐야? 너! 느낌표 기분 나뻐!!!!!!!!!!!!!]
세호는 무탈하게 원주로 갔다. 거기서 아주 가끔 원주의 허허벌판 사진을 보내며 심심하다고 하고 현수는 머리가 다시 자라더라도 옛날처럼 호리호리하지 않은 몸으로는 파마는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이놈들이 그러 던 지 말 던 지 상관없다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이것저것 궁금해하고 있다.
나는 ‘이혼’이라는 풍랑을 받아냈고 그것을 버텨내고 나니 가족 구성원 숫자가 바뀌었다. 세호는 순간의 선택으로 전재산이 털려 파산신청을 하고 지금은 ‘허허벌판’에 있다. 현수는 ‘혈액암’이라는 다소 겁이 나는 진단을 받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털을 잃었다. 풍랑은 견디기 거친 만큼 커다란 흔적을 남기지만 풍랑의 주인만큼은 건드리지 못한다. 적어도 풍랑의 주인은 그렇게 생각한다.
낮 술. by 옥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