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

<식은 연애> 스물한 번째 이야기

by 옥광



눈을 감은 채로 얼굴을 힘껏 구겼다. 이마와 미간에 주름이 잔뜩 잡혔고 아래위 어금니를 세게 물고 입술을 열었더니 ‘스읍’ 소리와 함께 공기가 들어왔는데 순간 이명이 같이 들렸다. 다시 잠들고 싶은데 이 이명이 시끄러웠다.


“깼어?”


남자 친구 목소리가 들렸는데 어디서 들리는지 가늠이 안됐다. 손을 뻗어보니 만져지는 게 이불뿐인 게 그가 침대에 있는 건 아니었다. 눈을 떠보려고 구긴 눈에 조금씩 힘을 줬다 뺐다 해보았는데 힘을 풀 때마다 ‘아, 씨발!’, ‘아, 씨발!’ 욕이 추임새로 나왔다. 왼쪽 가슴에 있어야 할 심장이 뇌로 올라와 머릿속에서 두근두근 뛰는 것 같았다. 머리가 터질까 말까 약을 올리는 것 같다.


“어디 아프니?”


얼굴 쪽으로 그늘이 드는 게 느껴졌다. 남자 친구가 내 머리맡에 서서 물어본다. 좋은 커피 향이 나는 게 커피잔을 들고 있나 보다.


“응… 오빠, 집에 혹시 두통약 같은 거 있어?”

“… 없지.”

“그래? 알았어. 좀 지나면 나아지겠지.”

“그러니까 어쩌자고 그렇게 술을 마셔가지고. 빨리 일어나 아침은 먹자. 뭘 먹어야 술도 깨지. 얼른 씻고 나와, 알았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 호흡에서 달달한 술냄새가 울컥 났다. 어제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건지. 남자 친구 집에는 무슨 정신으로 왔는지 기억이 또렷하지 않다. 택시에서 쏟아져 내렸던 게 기억이 나고... 택시비는 왠지 그가 결제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제일 싫어하는 것 중 하나를 어제 또 해냈구나 싶어 그의 눈치가 보였다.


주섬주섬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소변을 보며 샤워를 할지 말지 고민했는데 결론은 세수만 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지난주에 이 집에 있던 나의 마지막 속옷을 다 버렸기 때문이다. 오줌이 크게 마렵지 않았는데도 소변 줄기가 끊기지 않고 계속 나와 변기에 앉은 채로 내 칫솔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럼 그렇지, 그의 것 한 개만 덩그러니 꽂혀 있다. 내 건 속옷 버릴 때 같이 버린 게 확실하다. 속옷이며 칫솔을 다시 사다 놨어야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다. 살짝 화장실 문을 열어 그가 부엌에 있는 걸 확인하고 그의 칫솔로 이를 닦아 버렸다. 이것도 그가 싫어하는 것 중 하나다.


“뭐 해?”


부엌에서 채소를 다듬는 그의 허리를 뒤에서 안았다. 나는 화장실에서부터 그가 샐러드를 만들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물어봤다. 뭔가 말을 걸고 싶었다.


“다 씻었어?”


그가 고개를 돌려 대답을 했고 나는 놓치지 않고 그의 입술에 얼굴을 들이밀어 자연스레 대답을 하느라 벌어진 그의 입술 사이로 내 입술을 포갰다. 잠시 그가 아무것도 못 하고 얼었다. 그대로 그의 양볼을 당겨 혀로 그의 아랫입술을 핥았다. 순간 그의 날숨이 훅 느껴졌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는 오이 냄새. 그냥 입에서 나는 입냄새가 아닌 소화기관, 저 안쪽 위에서부터 올라오는 오이 냄새. 지난밤 마신 술기운 때문일까? 그 냄새에 구역질이 나려고 했다. 다행히 역한 냄새에 구겨진 내 얼굴은 보지 못한 채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직 화가 나 있다는 걸 증명하려는 톤으로 말했다.


“너!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지.”


그가 내 입에서 나는 치약 냄새를 맡았나 보다. 나는 치약 냄새가 새 나가는 게 눈치가 보여서, 또 갑자기 역하게 느껴지는 오이 냄새 때문에 숨을 최대한 얕게 뱉고 들이마셨다. 답답했지만 꾹 참고 최소한의 호흡만 했다.


“왜? 오빠 칫솔 써서? 아니… 내가 너무 이를 닦고 싶어서, 아니 그래야 뽀뽀도 하고. 미안, 미안해 오빠.”

“너는 정말!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순간 그의 언성이 올라갔다.

“… 미안해.”


대화가 끊겼다. 그는 고개를 돌린 채 말없이 파프리카를 썰기 시작했다. 그의 아일랜드 식탁 한켠에 놓인 샐러드볼에 채소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소복이 담긴 샐러드 채소 맨 위에 얇게 저며진 오이가 잔뜩 올라가 있는 게 보인다. 그는 오이 위에 방금 썬 파프리카 한 줌을 올려놓고 양파수프가 담긴 작은 냄비를 들고 와 의자에 앉고 나를 불렀다. 평소 같으면 그의 맞은편 자리에 얼른 가서 앉았겠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계속 버티고 서 있던 건 아니다. 최대한 느리게 걸어가서 앉았다. 여기서 평소라함은 그에게 차인 다음 날을 말한다.


그는 어제 나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이게 열한 번째 아니 열두 번째던가? 아니 열두 번째가 지난주였던가? 횟수가 확실치 않다. 중요한 건 내가 어제 친구의 생일파티에 갔다는 거다. 여기서부터 그는 싫어했다. 생일을 맞이한 그 친구가 남자라는 것 때문에.


처음엔 그냥 그가 나를 너무 좋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가 없는 모임에서 그냥 남자인 동료와 간단하게 어울리기만 해도 그는 진지하게 이별을 고하기 시작했다. 그럼 나는 모든 일을 제쳐두고 그에게 찾아갔다. 그리고 성심성의껏 그와 섹스를 했다. 어디를 어떻게 만져주면 좋아하고 어디를 어떻게 비벼줘야 반응하는지 살피며 정말 열심히 했다. 그렇게 해 주면 다음 날 아침, 그의 이별의사는 철회되었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 다행히 몇 번 반복되고 나니 언젠가부터 다행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나는 원래 섹스하는 걸 참 좋아했는데 어느 순간 섹스가 즐겁지 않게 되었다. 좋아하던 취미가 직업이 되고 더 이상 즐겁지 않은 노동이 되는 과정처럼. 그래서 어제 그가 이별을 고했을 때, 나도 큰 맘먹고 그에게 찾아가지 않으려 술을 엄청 들이부었다. 그런데 무서운 관성의 법칙! 적당히 취했어야 할 것을 너무 취했었나 보다. 정신줄을 놓으니 무의식 중에 그에게 찾아갔고 술에 취해 즐거운 척하는 섹스를 또 했고 이별을 삼키는 아침을 또 맞이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계속 이 연애를 이어가야 하나 싶었는데…


“커피 줄까?” 아까부터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계속 삐져 있다.

“음… 얼음 있어? 나는 ‘아아’가 마시고 싶은데.” 숨 쉬는 게 편치 않으니 왠지 시원한 게 땡겼다.

그가 한숨을 크게 쉬고 “너, 내가 몇 번을 말하니… 아침부터 차가운 건 몸에 안 좋다고.”


그가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향이 좋은 커피잔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이 커피 잘 안다. 압구정동에 있는 어떤 아파트 상가에 있는 작은 원두 전문점에서 그가 항상 사다 먹는 커피다. 그는 이 원두로 만든 커피가 아닌 다른 커피는 그냥 새까맣게 탄 열매 우린 물이라며 취급하지 않는다. 처음, 내가 이 집에 놀러 온 것도 그가 내려주는 이 커피맛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건 머리가 쪼개질 듯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 나가서 아아 한 잔만 사 올께. 찬 게 마시고 싶어서 그래.”

“커피 거기 있잖아. 뭘 사 온다는 거야?” 그는 싸구려 탄 물을 돈 내고 사 마시려는 내가 이해가 안 갈 것이다.

“빨리 사 올께.”

“너 정말 이럴 거야?”


그가 나를 대역죄인 취급하듯 쳐다보기 시작했다.


“너 자꾸 이러면 우리 계속 만나기 어려워.”


평소 같으면 무조건 그의 말에 "응!"을 외쳤을 내가 아침에 마시면 몸에 해롭다는 그깟 '아아' 한 잔 마셔보겠다고 안 하던 짓을 하니 그도 안 하던 짓을 하기 시작했다. 헤어진 다음 날엔 보통 다정한 남자 친구가 되어 있었는데.


“빨리 가서 사 올께. 갔다 와서 이야기해.” 최대한 그와 마주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소파에 그가 정리해 놓았을 나의 옷과 가방이 놓여 있었다. 바지만 주섬주섬 챙겨 입고 위엔 옷걸이에 걸려 있던 그의 바람막이 점퍼를 걸친 채 가방에서 지갑만 꺼내 그의 슬리퍼를 신고 현관문을 열려고 하는데 그가 나의 손목을 잡았다.


“왜?”


순간 욱해서 고개를 돌리는데 가까이 있는 그의 얼굴에서 아까의 그 오이 냄새가 났다. 그의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구역질 나는 오이 냄새. 그가 화가 난 듯 씩씩거리며 숨을 쉬는데 그 숨을 뱉을 때마다 오이 냄새가 코를 쑤셨다.


“아이씨, 오이 냄새! 토나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오이가 뭐?!” 그가 웬일로 소리쳤다.


그리고 샐러드 볼을 내 코앞으로 들고 와 얇게 저민 오이를 손으로 집어먹었다. 이 오이로 말할 것 같으면 동네 생협에서 산, 농약 한 방울 안 쓴 유기농으로 키운 귀한 오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또 이별을 고했다.


내가 몇 번을 말하니? 너는 정말 나랑 안 맞는 것 같아. 계속 이러면 우리는 헤어질 수밖에 없어.”


나는 그의 말에 신고 있던 그의 슬리퍼를 벗고 다시 안으로 들어와 입고 있던 그의 바람막이 점퍼를 제자리에 걸어 놓았다. 그리고 지난밤 섹스 후에 입었던 그의 티셔츠를 그가 보는 앞에서 벗어 버리고 다시 내 티셔츠를 입은 후 침대 맡에 있는 나의 핸드폰을 찾아 주머니에 넣었다. 그가 이런 나를 붙잡았다. 이러면 정말 헤어질 건데 괜찮겠냐고 나를 걱정해주면서 말이다. 나는 처음으로 그의 이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와, 진짜 그 오이 냄새는 도저히 못 참겠다.”


말도 안 된다며 생협에서 샀다는 증거를 위해 '생협 종이봉투'를 뒤지는 그를 남겨두고 토 나오는 오이 냄새를 피해 그의 집에서 빠져나왔다. 나는 길 건너 카페에서 1500원짜리 차가운 커피를 들이킬 생각만으로 숙취가 나아지는 것 같았고, 그동안 어떻게 숨을 쉬었는지 의아할 정도로 비로소 제대로 숨을 쉬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서울 공기가 이렇게 상쾌하다니!










오이. by 옥광

keyword
이전 08화낮 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