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수 오빠

<식은 연애> 스물두 번째 이야기

by 옥광



오후 5시 57분. 시선을 모니터 엑셀 창에 고정해 둔 채 흰자로 왼쪽 하단 시계만 쳐다봤다.


‘이제! 3분만 있으면!’


심장은 속이 울렁거릴 만큼 두근거렸고 심한 조바심에 다리를 대놓고 달달 떨었다. 드디어 흰자로 보던 시계가 5시 59분에서 6시 00분으로 바뀌는 순간, 이미 ‘시스템 종료’ 위에 위치해 있는 화살표를 확인하자마자 마우스를 클릭했다. 마땅히 퇴근할 시간에 퇴근하는 것이므로 이제야 시계를 확인하는 동료들에게 따로 양해 따윈 구하지 않고 자기에서 튀어나왔다. 그럴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 오후 4시 23분에 친구 혜정이로부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부고 문자를 받았다.


혜정이와는 초등학교 때부터 등교를 같이 하던 친구 사이다. 서로 같은 반이 아니더라도 등교만큼은 꼭 같이 했다. 나는 <정혜네 슈퍼> 사장님의 하나밖에 없는 딸로서 아침마다 이른 장사를 시작하는 엄마 때문에 하루가 빠를 수밖에 없었고 그런 내가 학교를 가기 위해 혜정이네 집에 들르면 아직도 자고 있는 혜정이 대신 혜정이 아버지가 나를 맞이해 주셨다.


“혜정혜정혜정혜정혜 안녕?”


아저씨는 우리 이름으로 하는 말장난이 너무 재밌지 않냐며 매번 웃어댔지만 웃음이 적은 어린애였던 나는 쉽게 웃어주지 않았다. 그건 친구 혜정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거의 매일, 혜정이가 일어나 찡얼거리고 씻고 다시 졸고 겨우 옷을 입고 아침밥을 먹는 동안 아저씨가 주는 외국 과자를 우유에 말아먹으며 우리 집에는 없는 소파라고 불리는 침대처럼 생긴 푹신한 거실 의자에 앉아 사방 벽에 만화책만 꽂혀 있는 방에서 고른 만화책을 보았다. 나는 왜인지 <정혜네 슈퍼>에서 취급하는 과자도 공식적으로 먹기 힘든 입장이었기 때문에 혜정이 아버지가 제공하는 외국 과자가 너무 좋았다. …한 번도 좋다고 말한 적은 없지만.

우리 집은 내가 더 어릴 때 아빠가 돌아가셔서 아침에 엄마만 있었지만 혜정이네는 혜정이 어머니가 내 방문시간보다 더 이르게 출근을 하시기 때문에 아침마다 아버지만 계셨다. 대신 혜정이 어머니는 저녁에 놀러 가면 뵐 수 있었다. 물론 저녁에도 아버지는 같이 계셨다. 저녁에 계시는 혜정이 아버지는 혜정이 어머니에게 쉴 새 없이 말을 거셨고 어머니는 그 말들을 다 받고 거기에 따따블로 대답을 하셨다. 물론 두 분의 대화가 항상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다. 그래도 슈퍼에서는 모두와 그렇게 많은 수다를 떨면서 오직 나에게만은 “밥 먹어.”라는 말만 하는 엄마를 생각하면 이런 혜정이네가 가끔 부러웠다. 이제 뭐, 이것도 다 옛날 얘기다.


재작년, 외부업체와 오전 미팅을 마치고 사무실 복귀 전 점심으로 혼자 여유롭게 선짓국에 밥을 말아먹고 있는데 혜정이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혜정이는 너무 울어 이미 목이 잠길대로 잠겨 있었다. 핸드폰 너머로 뭐라고 뭐라고 말을 하는데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어 정말 여러 번 되물었었다. 그렇게 힘들게 알아들은 몇 마디가 혜정이 아버지가 췌장암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때 나는 췌장암이라는 단어를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울고 있는 혜정이에게 또 계속 끊임없이 되물었다. 그래서 혜정이는 이 바보 같은 나 때문에 진짜 여러 번 아버지가 췌장암이라는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나는 급속도로 목이 메어와 입에 한참을 물고 있던 선지에 사래가 들려 마른기침을 하며 선지를 뿜어댔다. 목이 아팠고 눈물이 났다. 다행히 핸드폰 너머 혜정이는 내 기침소리만 들었다. 그래서 그런가 오히려 아까의 부고 소식에는 생각보다 담담했다. 나도, 혜정이도.


[@미진 미진아, 어디야? 나는 지금 사당 지나고 있눈뎅 ㅎ.]1

[나 선바위.]1

[어? 그럼 나랑 가깝다. 미진! 너 대공원에서 내려라, 우리 만나서 같이 들어가자.]1

[뭐? 시러. 나 내내 서서 오다 사당에서 겨우 앉음. 나는 그냥 ㄱㄱ.]1

[흥, 친구보다 자리가 소중하구만.]1


혜정이와 미진이 나, 셋이 있는 단톡방에서 미진이와 톡을 주고받았다. 주고받은 톡들 옆으로 작은 숫자 1이 계속 남아 있었다. 혜정이다. 장례식장에 거의 비슷하게 도착할 미진이는 혜정이와 처음 술을 시작한 고등학교 때 만난 친구로 평소 마음에 없는 소리를 잘 안 하고 술에 취하면 더 진실만을 말하는 친구였다. 뭔가 나와 혜정이보다 어른스러웠다. 그런 미정이가 혜정이 아버지를 처음 만났을 때는 대학교 입학 후 1학기가 반쯤 지나서였다. 우리는 혜정이의 부름을 받고 신촌에 있으면서 이름은 <청담동>인 포차로 모였다. 그곳에는 우리 3명과 균형을 맞추어 혜정이의 과선배 오빠들 3명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중 한 오빠에게 첫눈에 반했다. 키가 크고 눈썹도 진하고 얼굴도 하얀, 뭔가 숲 속에서 길을 헤매 며칠은 굶은 듯한 병약해 보이는 백설공주 남자 버전같이 생긴 오빠였다. 그 오빠 이름은 현수였다. 아니, 현수라니! 이름마저도 너무 예쁘다.


“어머, 어머! 현수 오빠. 20세기 소년을 좋아해요? 완전! 저 나오키 완전 팬인데! 저 초딩때부터 왕왕팬이었어요!”

“아… 그래, 내가 그 만화를 정말 재밌게 봤거든. 또 뭐더라… 그 비슷한 거, 몬스터?”

“에이, 그래도 작가가 같은 걸 비슷하다고 말하면 안 되죠. 그래서요, 그럼 현수 오빠, 또 나오키거 뭐뭐 읽어 봤는데요? 플루토 읽었어요? 저는 파인애플 아미부터 읽었어요!”

“응? 파인애플 아미?”

“아! 우라사와 나오키 초창기 작품인데 몰라요? 아니 뭐, 모를라면 모를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래도 팬이면 이 정도는 알아야 되는데. 그러니까, 그게 어떤 거냐면요. CMA라고 용병회사가 있는데. CMA 기억하세요! 베트남 전… 아, 오빠, 현수 오빠! 그건 알죠? 마스터 키튼, 약간 그것의 용병 버전…!”


나는 그때, 현수 오빠에게 반해 오빠와 잔을 부딪힐 때마다 술잔을 계속 비웠다. 거기 있는 사람들 모두 포함해서 대놓고 그 오빠한테만 말을 걸고 그 오빠만 쳐다봤다. 반쯤 풀린 눈을 가지고 한창 로맨틱한 분위기가 형성될 즈음, 아니 형성된다고 생각이 들 때 즈음 찬물을 끼얹은 게 미진이었다.


“강정혜! 너는 남자 친구도 있는 애가 선 넘는다?! 미쳤냐?! 정신 차려!”

“응? 아… 정혜는 남자 친구가 있구나? 만난 지는 오래됐니?”

“네? 얼마 안 됐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야, 태미진! 너 뭐야, 지금?!”


나는 마구잡이로 풀린 내 눈은 다잡지도 못하면서 미진이가 뱉은 말을 주워 담으려 우왕좌왕했다.


“오빠, 오빠! 제 남친이 중요한 게 아니라요. 현수 오빠! 야와라! 야와라도, 해피도 말해야죠. 몰라요? 모르면 들어보세요.”


흠, 효과는 1도 없었고 현수 오빠는 빠르게 나와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점점 멀어지는 그 거리는 현수 오빠에게 아무리 술을 먹여도 좁혀지지 않았다. 여리여리 백설공주 같았던 현수 오빠는 결국 완전히 뻗었고 그건 혜정이와 술을 마시던 다른 두 명의 오빠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정신줄을 놓을락 말락 하는 그 두 오빠들을 겨우 꼬집고 달래서 현수 오빠의 집주소를 얻어내 안전하게 택시를 태워 귀가시켰다.


“5959… 5959… 5959… 5959…”


현수 오빠를 태우고 간 택시의 넘버를 기억하려 계속 중얼거렸다. 내 양 옆에는 겨우 정신줄 붙잡고 있는 미진이와 혜정이가 기우뚱거리며 서 있었다. 나는 앉아 있는 것도 아닌 서 있는 것도 아닌 무릎만 땅에 붙이고 미진이와 혜정이 둘 사이에서 번갈아가면서 머리를 기댔다. 머리를 기댈 때마다 팔들을 튕기는 건 내 기분 탓이었겠지. 왜 여기까지 걸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영업이 끝난 <동래파전> 앞에 우리 셋만 덩그러니 서… 아니 놓여 있었고 곧 익숙한 차 한 대가 우리 앞에 멈췄다. 아저씨였다, 혜정이 아버지. 우리는, 정확하게는 나와 미진이는 차를 타고 실려가는 내내 싸웠다고 했다. 그 싸움의 핵에는 현수 오빠가 있었고. 미진이는 양다리도 아니고, 다족류 동물도 아닌 것이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심플하게 사람답게 살라며 화를 냈고 나는 사람이 본디 감정의 동물이라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답게 감정을 표현하겠다는데 뭐가 잘못이냐고 화를 냈다. 혜정이는 미진이가 말하면 미진이 편이 되었고 내가 말하면 내 편이 되었다.

다음 날, 미진이는 그 숙취 속에서도 가느다란 정신줄을 부여잡고 내가 어릴 때부터 만화책을 읽어왔던 그 소파에 앉아 찡얼거림과 정신줄 놓기를 반복하는 혜정이와 나를 순간순간 졸아가면서 기다렸다. 우리를 위한 해장국을 끓이느라 바쁜 아저씨는 미진이에게 더 쉬라고 여러 번 권유했지만 미진이는 극구 사양하고 우리를 쥐어패가며 결국 소파에 앉혔다. 정신이 겨우 돌아온 나는 미진이와 현수 오빠를 두고 2차전을 시작했는데 결국 아저씨로부터 한소리 듣고 말았다.


“아오, 밤새도록 그놈의 현수, 현수! 밤새 내내 현수, 현수! 네들 지금부터 현수에 현 자라도 한 번만 더 꺼내면 해장국이고 뭐고 국물도 없어! 알았어?! 현순지 현뭐시깽인지 아주 눈에 띄기만 해 봐라. 현수 금지야! 또 내 귀에 그 이름 안 들리게 해! 똑바로 해! 현수 금지!”

“…!!!”

“뭐야? 왜 대답이 없어?!”

“…네.”, “…네.”, “…네 현수 금지.”


평소에 허허실실 거리는 사람이 한 번 화내면 무섭다더니 확실히 아저씨의 버럭은 임팩트가 있었다. 우리는 그 이후로 현수 오빠 이야기를 맨 정신에는 거의 하지 않았다. 문제는 술이었다. 술이 들어가면 시시콜콜 섭섭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꼭 현수라는 이름이 봉인 해제되었다.

미진이 말대로 나에게는 중간중간 교체가 되는 남자 친구들이 끊임없이 있기도 했고… 로맨티시스트 혜정이는 결혼을 한 것도 아닌데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현수 오빠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일단 고백해보라고 나를 거들었지만 결국 둘 다 미진이의 사람답게(!) 살라는 말에 졌다. 아, 아저씨한테는 결국 다르게 크게 혼이 났다.


“네들! 이제 셋이 술 마시지 마! 아니, 셋이 같이 취하지 좀 마!”


이때는 아저씨도 좀 술을 하신 날이었다.


“야 이놈들아!! 적어도 돌아가면서 한 명은 좀 멀쩡해야지 어떻게 셋이 맨날 그렇게 사이좋게 정신줄을 놓냐, 이놈들아!!”


<정혜네 슈퍼> 사장님의 두 번째 결혼식 날이었는데 그날 나의 새아빠도 혜정이 아버지 눈치를 보느라 우리들에게 술 한잔 편하게 권하지 못한 걸로 기억한다. 아 그날, 아저씨 취한 거 조금 웃겼었는데.


[@닭강정 너 사당이라며 왜 안 와? 뭐 해? 빨리 와!]


갑자기 혜정이가 단톡방에 나타났다. 정신이… 그래도 혜정이가 톡 할 정신이 있구나. 당연히 그럴 수 있는 건데도 단톡방에 혜정이가 나타나니 덥석 안심이 됐다.


[미진이는 지금 왔어! 너도 빨리 오라고! 어디야? 빨리 좀 와!!]

[왜 그래? 나도 거의 다 왔어. 태미진아 너는 나랑 같이 들어가기로 했잖아?!!!]

[어! 강정혜야 너 진짜 달려와라.]

[뭐야? 너까지 왜 그래? 무슨 일인데?]2


뭐지? 미진이까지 저런다는 건 진짜 뭔가 급한 일이다. 지하철역 밖으로 나올 때 에스칼레이터를 두 칸씩 뛰어올랐다. 가는 길에 톡방을 계속 확인했지만 더 이상의 정보 제공은 없었다. 도착하자마자 혜정이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렸다. 눈치 없이 눈물이 날까 봐 활짝 웃고 있는 아저씨 얼굴은 일부러 피했다. 헌화부터 해야 했는데 얼굴을 피한 다는 게 그만 절부터 해버렸다. 일어서다 혜정이와 혜정이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는데 혜정이 어머니가 퉁퉁 부은 눈으로 눈웃음과 함께 고개를 작게 끄덕여주셨다. 당황해서 2차로 눈물이 날 고비가 왔지만 꾹 참고 틀린 순서대로 아저씨께 인사를 드렸다. 아이고, 미진이한테 크게 혼나겠구나.


“너! 빨리 따라와!!”


인사를 마치고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려 하는데 나의 손을 혜정이가 덥석 잡고 끌고 갔다. 뭐지? 엄마랑 새아빠가 있었나 싶었지만 분명히 낮에 미리 다녀가신 걸 확인했었다.


“야, 야! 봐 봐!”


봤다. 식당에 미진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새우젓 몇 개를 수육에 올리고 있었고 바로 그 옆에 검은색 슈트를 입은 여전히 잘생긴 백설공주가 앉아 있는 걸.


“현… 수… 오빠.”


미진이는 나를 보더니 맡아 둔 자리를 내주는 것처럼 슬그머니 한 칸 옆자리로 옮기고 나를 현수 오빠 바로 옆에 앉혔다. 나는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미진이가 수육 위에 올린 새우젓이 몇 마리인지 집중했지만 미진이는 내가 다 세어보기 전에 홀랑 수육을 입에 넣었다.

이미 식사를 마친 현수 오빠는 거의 그대로였다. 사회생활이라는 독사과로부터 목숨은 건졌지만 해독은 완전히 안 된, 그 후유증은 남아 있는 듯 하얀 얼굴은 여전히 병약해 보였다. 그리고 여전히 반듯하고 친절한 미소를 나에게 보내주었다.


“어, 정혜구나. 나 기억해? 현수야.”

“네 그럼요… 오빠 안녕하세요.”

“응. 잘 있었지? 이야 정혜 너는 진짜 하나도 안 변했구나.”

“네? 네… 네. 오빠는, 오빠도 그대로예요.”

“아유 왜 그래? 나는 변했지. 너야말로 진짜 그대로야. 너 아직도 만화책 많이 보고 그래?”

“네? 만화책이요? 아 그럼요. 그런 편이죠, 네.” 나를 기억해주는 현수 오빠의 기억력에 광대가 눈까지 올라갔다. 아, 이러면 못생겨 보일 텐데.

“그렇구나. 그러면 있다가 요새는 무슨 책이 재밌는지 물어봐야겠다.”

“엥, 왜요? 책이요? 책?! 요새는 핸드폰으로 보죠. 누가 만화책을 책으로 봐요?”

“아, 그래? 나는 그… 저기 여행 갈 때 가져가려고.” 현수 오빠의 미소가 살짝 어색하게 짙어졌다.

“아, 여행! 아니 뭐 그래도 이게 책으로 봐야 나는 맛이 있죠, 책 맛.” 나는 살짝 아차 싶었다.


얼마 전 남자 친구와 헤어진 나는 살짝 미진이 눈치를 봤다. 미진이는 조용히 본인에게 주어진 수육과 육개장을 클리어하고 천천히 꿀떡을 씹고 있었다. 나를 식당으로 끌고 오다가 잠시 아저씨 친구분들께 붙들렸던 혜정이가 싱글벙글 웃으며 내 맞은편에 앉았다. 로맨티시스트 혜정이 계집애는 이 와중에 내가 현수 오빠와 엇갈릴까 봐 전전긍긍했던 것이다. 사실 미진이 몰래 혜정이에게는 종종 현수 오빠 이야기를 몇 번 했었다. 특히 사귀었던 남친들과 헤어져 청승을 떨 때마다 현수 오빠를 찾았다. 그걸 야무지게 집어낸 혜정이는 홀로 조문을 와서 식사를 다 한 현수 오빠가 나를 못 보고 그냥 갈까 봐 붙잡으려고 계속 안절부절 해대며 현수 오빠 주변을 맴돌았고 미진이가 도착한 후엔 그 임무를 미진이에게 넘겼다고 한다. 미진이는 “곧 정혜 올 건데 별일 없으면 정혜 얼굴도 보고 가죠?” 간단하게 정리하고 여유 있게 식사를 즐겼다고 했다.


“아무튼 그래서요, 현수 오빠? 여행은 어디로 가는데요? 동남아? 유럽? 멕시코? 아프리카? 우와 여행 너무 좋겠다.”

“아… 저기 유럽.”

“유우러어업이요!!! 너무 좋겠다. 얼마나 가는데요? 휴가 써요?”

“아, 2주? 응, 휴가 써서 가게 됐어.”

“우와! 오빠 여행 자주 좋아하나 봐요. 유럽 처음 가는 건 아니죠? 어디 어디 가요? 파리? 베를린? 아일랜드? 어디 어디 가는데요?”

“아? 아 그게 일단 파리? 일정은 내가 확인을 해 봐야 해서…”

“오!! 루브루!!!! 쥬뗌무 파리! 로맨틱 에펠탑!! 패키지? 배낭여행?”

“아… 굳이 말하자면 패키지…”


주책맞게 텐션이 쭉쭉 올라갔다. 이럴 때 나타나는 건? 태미진이다. 미진이가 조용히 씹던 마지막 꿀떡을 목구멍으로 넘기고 입을 뗐다.


“현수 오빠, 신혼여행 가는 거래.”

“오! 신혼여행, 아 요새는 신혼여행을 유럽으로 많이 가나 봐요? 우와 그럼 누구랑 가요?”

“이 닭! 강정혜야! 신혼여행이라고.”


미진이가 얼굴을 내 코앞에 들이밀고 정신 못 차리는 내 눈에 한 글자 한 글자 쑤셔 박듯 또박또박 한 번 더 말했다.


“신! 혼! 여! 행!”

“아… 아, 그래 신혼여행. 오빠가 방금 패키지로 간다고…”

“아, 응 패키지는 맞아.”

“아… 패키지… 신혼여행… 현수 오빠 그러면 결혼을 하는 거겠군요?”

“어머? 오빠 결혼해?”


혜정이도 처음 들은 듯 눈이 동그래져 엉거주춤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현수 오빠에게 물어봤다.


“응… 아이고 이거, 제대로 청첩장이라도 나오면 연락 돌리려고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됐네. 미안하다. 미안하다 혜정아.”

“어머, 아니야 아니야, 오빠. 뭐가 미안해? 오빠 결혼 축하해. 그러면 오빠들 중에 오빠가 제일 빨리 하는 거네? 언니는? 아니 언니가 아니구나 그 우리 학교 다닐 때 씨씨였던 그 친구?”

“아… 응.”


현수 오빠는 혜정이의 한 학번 아래 후배와 곧 결혼을 한다고 했다. 세상에 그 이야기를 하는데 저 병약한 얼굴에 핏기가 돌아 뭔가 어색해 보였다. 독사과의 독한 독도 결국 진정한 사랑을 만나면 해독이 되는 것인가! 말없이 미진이가 맥주가 꽉 담긴 종이컵 한 잔을 건네주었다. 미진이 얼굴에는 ‘소주까지 말아주면 좋았겠지만 여기서 거기까지 바라면 안 되겠지?’라고 쓰여 있었다. 조용히 한 잔 마시고 속 차리라는 뜻이다.


“저기, 그럼 나 먼저 일어날게. 정혜 얼굴도 봤고, 미진이 미진이 맞지? 네들 혜정이 친구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어. 혜정이랑 이야기 많이 하고 천천히 가.”

“아, 그래 오빠. 오늘 와줘서 정말 고마워. 내가 다음에 정리되면 연락할게. 청첩장 꼭 줘야 돼! 다른 동기들이랑 다 같이 보자.”


혜정이가 뭔가 아쉽다는 듯 현수 오빠를 배웅하려 일어섰다. 나는 그런 혜정이를 따라 일어났다. 미진이는 그냥 앉아 있으려다가 왠지 내가 켕기는 듯 결국 나를 따라 일어났다. 우리는 일어난 순서대로 일렬로 서서 걸어 나갔다. 그리고 장례식장 밖에서 주차장을 찾아 헤매는 현수 오빠의 뒷모습을 혜정이 뒤에 숨어서 바라보았다.


“현수 오빠가 결혼 적령기였던 것이었어.”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중얼거렸지만 미진이가 아랑곳하지 않고 대답했다.


“아휴… 결혼 적령기는 우리도 마찬가지야.”

“아, 맞다. 우리도 결혼해도 되지? 우리도 적절한 나이로구나.”

“하… 그래! 이 닭강정혜야. 너와의 결혼을 납득하는 남자만 있다면 해도 된단다.”


미진이가 한숨을 섞어가며 조금씩 조금씩 언성을 높여갔다. 여기에 혜정이가 끼어들었다.


“혹시… ‘내 남자 친구의 결혼식’ 영화 기억나지? 우릴 어릴 때 봤던 거. 현수 오빠 결혼식은 아직 안 한 거니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지금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뭐, 까짓 거 차일 때 차이더라도 말이야!”

“오… 공혜정 일리 있어…”

“오?!!!! 일리?!!!!”


결국 미진이의 언성이 정점을 찍었다.


“네들은 그냥 영화를 보지 마. 드라마도 보지 마! 만화도 보지 말고 다큐만 봐! 아니야, 다큐도 보지 마! 그래! 그냥 네들은 아무것도 보지 마! 그냥 좀 정신을 차려!”

“에엥? 왜 그래, 미진. 또 왜 그래?”

“막말로 닭강정! 너 진짜 현수 저 사람이 막 좋은 것도 아니잖아. 아주 냥 둘이서 금사빠 놀이에 상상의 날개만 펼치고! 그러니까 연애를 무슨 비 오는 날 물 튀기듯이, 이리 튀기고 저리 튀기고 그딴 연애만 하지. 물이 튀기면 튀겼나 보다, 마르면 말랐나 보다. 공혜정, 너도 그래! 눈만 우주 끝까지 높아가 주고 진짜 사람은 안 만나고 고백받으면 다 거절하고 허구한 날 상상연애만 하고. 진짜 네들은 어떡할라고 그러니!”

“어! 우리 미진이 방언 터졌다.”

“방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정신 차려!”

“미진이 방언 말릴 수 있는 건 아저씨뿐인데…”

“진짜 미진이 진정시키는 데는 우리 아빠가 딱인데…”

“…”

“맞아, 맞아.”


나와 혜정이가 실없는 소리로 시시덕거리면 그 꼴을 참다 참다 결국 못 참고 폭발하는 미진이를 진정시켜주는 건 아저씨였다. 아저씨는 미진이에게 네가 고생이 많다면서 대충 사는 쟤들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받진 말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마무리로는 '꼭 미진이 너도 아주 조금은 쟤들처럼 대충 살아도 되지 않겠니?'라고 했다가 정말 대충 널브러져 있는 우리를 보며 다시 말 끝에 확신을 두지 못하고 흐렸다고 했다.


“진짜 아저씨가 어떻게 보면 우리 피라미드 꼭대기 탑에 있었던 거야. 우리 위에 미진이, 미진이 위에 아저씨. 어? 이제 피라미드 꼭대기는 미진이네.”

“야 닭강정. 왜 내가 너랑 나란히 있어? 네가 내 아래 아니야?”

“뭐? 무슨 소리야? 엄밀히 따지고 들면 네가 내 아래야.”

“왜? 왜 그게 그렇게 되는데?”

“… 들어가자.”


역시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는 자로서 우리가 갈 길을 알려주는 건 미진이 밖에 없구나. 훌륭하다.


“… 그런데 아버지가 현수 오빠 얼굴은 본 적이 있었나?”

“아니. 우리 아빠가 현수 오빠 얼굴을 볼 일이 뭐가 있었겠어? 없지. 아… 졸업식… 때도 아니야. 내가 먼저 졸업했는데 그때 그 오빠 군대에 있었어. 못 봤어. 못 봤어.”

“그러게… 아저씨가 현수 오빠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네, 그럼 오늘 처음 보신 거가 되네.”

“어? 그렇네! 굳이 따지자면 우리 아빠가 오늘 저 오빠를 오늘 처음 본 거네. 아까 엄마가 현수 오빠 보더니 사람 좋아 보인다고 칭찬은 하더라. 크크 잘생겼다고.”

“뭐, 얼굴도 그 정도면 괜찮고 인간성도 괜찮았어.”

“그래도 진짜 우리 아빠 현수란 이름 싫어했잖아. 크크크. 아니 뭐 그래도 아빠가 현수 오빠가 좋은 사람이란 걸 모르고 가신 건 아닐 테니까. 하도 우리가 그 이름으로 지랄을 떨어서 그렇지, 크크크.”

“뭐, 아버지가 당신 딸들이 그 이름으로 그렇게 복작복작해대는데 진짜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셨으면 가만 계셨겠냐? 진작에 얼굴 보고 그 얼굴을 변형시켜 놨을 걸.”

“안 돼. 잘생긴 현수 오빠 얼굴.”

“아 크크크, 맞아 맞아. 우리 아빠가 화나면 진짜 무섭잖아.

“그래, 그때, 왜 우리 홍대 앞에서 시비 붙었을 때 아저씨가 우리 데리러 왔다가 걔네까지 다 손 봐줬잖아. 아저씨 알고 보면 완전 쌈짱이야. 그런 아저씨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거야.”

“맞아. 현수 오빠는 자기 자신이 좋은 놈으로 태어난 걸 감사하게 여겨야 돼. 아니면 그냥 골로 갔어.”

“어 맞아, 아저씨가 절대 그냥 가셨을 분이 아니야. 완전 뼈도 못 추렸어.”

“어 맞아… 절대 그냥 가시지 않았을 거야, 아버지라면.”

“어… 맞아… 우리 아빠 절대 그냥 가지 않아…”

“그럼 그럼, 절대 그냥 안 가지. 그냥 안 가.”

“…”

“… 그런데…”

“… 가셨어.”

“갔어.”


오늘 저녁 가장 침착했던 미진이가 옷소매에 콧물을 닦기 시작했다. 그런 미진이를 오늘 저녁 가장 씩씩했던 혜정이가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 오늘 저녁 가장 주책맞았던 내가 그런 혜정이에게 왜 네가 미진이를 위로하냐며 따져 물었다. 우리 셋은 더 이상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장례식장 로비에 쪼그려 주저 앉았다. 우리는 아저씨를 처음 만났던 어린애들로 돌아가 어깨를 들썩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이미 터져버린 건 어쩔 수 없었다.










현수 오빠. by 옥광

keyword
이전 09화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