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 토리노

<식은 연애> 스물세 번째 이야기

by 옥광



• 이 글은 영화 '그랜 토리노'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그랜 토리노> 소개 : 자동차 공장에서 은퇴한 채 무료한 일상을 보내는 월트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 한국전 참전의 상처로 괴로워하는 남편의 참회를 바라던 아내, 도로시 코왈스키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참회할 것이 없다며 버틴다. 어느 날, 이웃집 소년 타오가 갱단의 협박으로 월트의 72년 산 '그랜 토리노'를 훔치려 하고 뜻하지 않았던 이 만남으로 월트는 차고 속에 모셔두기만 했던 자신의 자동차 그랜 토리노처럼 전쟁 이후 닫아둔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출처 _ '네이버 영화'


또 1300점! <TARGET HUNTER>에선 1300점을 따낼 때마다 인형이 달린 열쇠고리를 준다. 수아는 분명 ‘꼬부기’인데 ‘이상해씨’처럼 생긴 뿔이 달린 알다가도 모를 포켓몬이 매달린 열쇠고리를 두 개째 챙겼다. 이제 0점 사격 없이도 1300점은 껌이다. 사격은 참 신기하다. 직접적인 타격이 아닌 날아간 총알이 때리는 건데도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과녁에 빗맞았을 때와 정확히 적중했을 때, 몸으로 느껴지는 타격감이 다르다.


<TARGET HUNTER>는 비비탄 사격 게임이다. 어떤 동네에선 경품으로 ‘가습기’도 준다던데, 이곳 ‘L시네마’ 오락실에선 이딴 열쇠고리뿐이다. 수아는 잠시 가습기를 들고 있을 자신을 상상해 봤다. 30분이 넘도록 거의 다 왔다는 말만 반복하는 남자 친구가 본다면 분명 가습기를 어떻게 들고 다닐 거냐며 거추장스럽다고 말하겠지. 열쇠고리도 그렇고.

“수아야, 너는 그 거추장스러운 걸 또 땄어? 오빠가 금방 도착한다고 했잖아.”

약속 시간에 늦은 이유로 어제의 야근을 방패 삼는 8살 연상의 남자 친구는 이제 미안하다는 말도 안 한다.

“오빠, 우리 보려던 영화 이미 시작해서 다음 거 보려면 2시간은 기다려야 돼.”

“왜? 다른 관에서 안 해? 그거 인기 많아서 관, 여러 개에서 했잖아. 지난주에 보니까 상영관 많던데?”

수아는 이 마블 영화를 개봉 전부터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본인 피셜 이제야 회사의 핵심 멤버로 급부상했다는 수아의 남자 친구는 여러 차례 주말 약속을 어겨 왔다. 지난주 영화 약속처럼.

“오빠! 그건 지난 주니까 그렇지. 지금은 거의 내릴 때 됐다고. 다음 주 되면 이것도 안 할 거야.”

“그래? 그럼 어떡하지? 그런데 배는 안 고파? 수아야 일단 밥부터 먹을까? 오빠 아직 해장도 못 했다. 내장탕, 아 네가 내장탕을 못 먹지. 갈비탕 먼저 먹으러 가자.”

“… 나는 영화 보고 먹으려고 뭐 먹고 나와서 아직 밥 생각이 없는데.”

“아유, 그럼 어떡하냐, 빨리 아무거나 하나 보자, 그럼.”

수아의 남자 친구 신종혁 씨는 급하게 영화 상영표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오! 클린트 이스트우드. 그랜 토리노! 시간이 저거 보고 밥 먹으면 딱이네.”

지난주부터 이곳 L시네마에선 ‘클린트 이스트우드 특별 상영전’을 하고 있었다.

“아니 오빠, 저건 우리가 보려던 게 아니잖아.”

“왜? 그건 나중에 디플에 풀릴 거 아니야. 그때 오빠가 집에서 빔으로 빵빵하게 보게 해 줄게.”

“아니, 그때 가면 기분이…” 수아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휴… 너무 늦잖아.”

“왜? 너 클린트 이스트우드 몰라서 그래? 이 영화가 너한테 너무 어려울까 봐? 아니야, 아니야. 오빠가 잘 아는데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 하나도 안 어려워. 걱정하지 말고 빨리 이거 보자. 그리고 밥 먹자.”

8살 연상의 신종혁 씨는 세상 바쁜 사람처럼 무인 발급기로 걸어갔다. 아니 뛰어갔다. 수아는 느릿느릿 터벅터벅 그 뒤를 따라가 무인 발급기 앞에서 어디를 터치해야 할지 몰라 버벅거리는 신종혁 씨를 대신해 ‘그랜 토리노’ 티켓 두 장을 발급받았다.

“너도 보면 좋아할 거라니까. 이게 마블 그런 거랑은 차원이 달라요, 차원이. 보다가 이해 안 가는 부분 있으면 오빠가 설명해 줄게.”

그렇게 이 영화를 보자고 한 신종혁 씨는 캐러멜 팝콘 통에 손을 반쯤 묻은 채 상영관 좌석에 앉아 수아의 어깨에 머리를 떨구었다. 세상에 도로시 코왈스키 부인의 장례식이 끝나기도 전이다.

그리고 사실을 말하자면 신종혁 씨 여자 친구 최수아 씨는 지난주에 이미 이 영화 ‘그랜 토리노’를 봤다.



“어? 수아, 최수아?!”

수아는 지난주 이날에도 30분째 거의 다 도착했다는 남자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락실에서 1만 원을 쓰고 1만 원을 더 환전할까 말까 고민 중일 때였다. 안 그래도 L시네마 올라오는 에스칼레이터에서 저 선배 비슷한 사람을 본 것 같다고 생각은 했는데.

“어, 선배…? 안녕하세요?”

얼마 전, 복학한 이민호 선배였다. ‘와우, 드디어 우리 과에도 해가 뜨려나 보다.’ 친구 은형이 민호 선배를 보고 한 말이다. 군 제대 후, 런던에 어학연수까지 다녀오고 나서 복학한 민호 선배는 은형이 말을 빌리자면 칙칙하고 음침한 공과대의 한 줄기 빛 같았다. 다들 자기 잘난 척하느라 바쁜 선배들의 추적거리는 소리가 이민호 선배만 나타나면 하늘이 갠 듯 맑아지고 조용해졌다. 그러니 이 한줄기 빛을 차지하려는 경쟁률도 꽤나 높았으니 이것은 기회다. 수아는 이 빛줄기를 차지할 한 사람만 남을 경쟁에서 친구 은형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를 바랐다. 은형이에게 빨리 톡을 날렸다. ‘대박 사건!!!!!! 너 어디야? L시네마로 텨와!!!! 이민호 발견 혼자 있음!!!!!!’

“수아야, 너도 영화 보러 온 거야? … 혼자?”

“네?”

“응, 혼자 영화 보러 왔냐고, 수아 너도 혼영 즐기나 보구나.”

동시에 두 개의 톡이 들어왔다. 30분째 근처에 거의 다 왔다는 남자 친구 신종혁 씨는 갑작스러운 두통을 호소하며 도저히 못 나올 것 같다는 장문의 사과문을 보냈고 친구 나은형은 ‘이민호? 그게 뭐?’라고 짧은 톡을 보냈다.

“어라? 나은형!” 수아는 예상과 달리 무관심한 은형의 답톡에 티끌만큼 하찮은 배신감을 느꼈다.

“은형이? 아, 은형이 만나기로 한 거야?”

“아! 아니요!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고, 맞아요. 혼자 영화 보러 온 거 맞아요!”

은형이의 대답을 본 수아는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을 둘러댔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제부터 혼자 영화를 보기로 하려는 거면 거짓이 아니니 거짓말을 한 게 아닌 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어?! 그래? 수아는 무슨 영화 보려고 하는데?”

“네? 아 그게…”

수아는 영화 상영표를 빠르게 둘러봤다. 오늘 보기로 한 마블은 오빠가 장문톡을 통해 다음 주에는 정말, 반드시, 꼭! 보자고 했으니 패스하고 그렇다면 별로 유명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이 많이 안 볼 것 같은 영화를 골라내야 한다. 대충 수습하고 영화를 안 보면 다시 거짓말을 하게 되는 건가? 적당히 둘러대고 새로 생긴 도넛 가게에나 갈 걸 그랬나? 머릿속이 복잡해진 수아의 눈에 제법 긴 이름의 배우를 기리는 상영회가 눈에 띄었다.

“저는… 저거요. 클린트, 이스트, 우드 상영회?”

“클린트 이스트우드?”

“네! 저거요, 저거!” 그리고 가장 가까운 시간대의 영화를 골랐다. “‘그랜 토리노’.”

“어? 수아야 너도 클린트 이스트우드 좋아해? 나도 많이 좋아하는 배우야!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그래서 나도 ‘그랜 토리노’ 보러 온 거잖아. 와 이런 우연이 우리 같이 보면 되겠다.”

“에?”

“예매는 했어? 나는 하긴 했는데.”

“에에?”

“괜찮아. 걱정할 필요 없어.”


‘걱정? 무슨 걱정을 왜?‘ 정신을 차려보니 수아는 민호 선배와 나란히 상영관 좌석 D열 11, 12에 앉아 있었다. 선배의 자리는 E열 15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대로 수아 옆으로 온 거다. 중간과정이 순삭 된 느낌이다. 민호 선배가 대충 아무 좌석을 구매해도 나란히 앉을 수 있을 테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던 게 이 말이구나.

“내 말이 맞지? 사람 별로 없다니까.” 민호 선배가 수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수아는 갑자기 속삭이는 선배 때문에 어색해진 거리를 고쳐보고자 “아… 정말 그렇네요…”라고 대답하며 상영관 안을 둘러보았다. 진짜 텅텅 비어 있었다. D열엔 수아와 민호 둘 뿐이었다. A열부터 C열까진 아무도 안 보였고 D열 뒤로는 서너 명쯤 있으려나. 저절로 ‘꿀꺽’ 마른침이 삼켜졌다. 그저 마른침 한 번 삼켰을 뿐인데 그 소리가 크게 들려 수아는 흠칫 놀랐다. 멀찍이 앉아 있는 서너 명들도 꿀꺽 소리를 들었을 것만 같다.

“시작한다.” 민호 선배가 또 수아의 귓가로 다가와 거리를 좁혔다. 또 마른침을 삼키고 싶어진 수아는 손에 잡히는 콜라컵의 빨대를 입에 물고 꿀꺽꿀꺽 들이켰다. 어차피 나야 할 꿀꺽 소리라면 이 쪽이 더 설득력 있겠지.

“어… 그거 내 컵인데…?”

‘으아…’, 수아는 자기 것은 입을 안 댄 컵이니 선배가 이걸 마시라며 들이밀고 급하게 사과했다. 민호 선배는 괜찮다며 수아의 어깨를 토닥였는데 수아는 반사적으로 토닥이는 선배의 손으로부터 어깨가 멀어지도록 빈 옆자리를 향해 누울 기세로 옆구리를 늘려 기울였다. 민호 선배는 그런 수아가 귀엽다는 듯 키득거리며 웃더니 멀어진 수아의 어깨를 당겨 자세를 바로잡아주었다. 수아는 모든 게 참을만하면서도 동시에 불편했다.

“집중해야지.” 영화에 집중하라고 말하는 선배의 말을 듣고 수아는 진짜 집중했다. 선배와의 거리 유지에. 의도적인지 의도적이지 않은 지는 모르겠으나 큰 사이즈로 하나만 사서 둘 사이에 놓인 팝콘 통에 그는 손을 뻗을 때마다 유난히 수아에게 몸을 기대는 것 같았다. 수아는 그럴 때마다 아슬아슬하게 속도를 맞추고 몸을 같은 각도로 기울여 거리를 유지했다. 신기하게도 이토록 예민하게 있으니 오히려 관심도 없던 영화에 더 눈길이 갔다.

시작하자마자 엄청나게 성질 고약한 할아버지의 아내가 죽었고 그녀의 장례식 장면이 나왔다. 다행히 할머니는 할아버지와는 달리 성질이 고약하진 않았는지 어떤 어린(어려 보이는, 새파란) 교회(성당?) 신부가 나타나 할머니 부탁을 받았다며 할아버지를 쫓아다녔다. 할머니가 남긴 말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걸 보니 죽은 할머니의 유언으로 동네 이웃들이 성질 고약한 할아버지를 따뜻한 이웃의 정으로 갱생시키는 내용이겠구나…라고 짐작했지만 아니었다.


이 할아버지 6.25 참전용사란다. 아주 약간의 내적 친밀감이 생겼다. 그러다 이웃 옆집 중국계 소수민족 가족들이랑 어쩌다 어울리더니 성질 더러운 그 할아버지는 그 집 애들이랑 친해졌다. 남자애는 찐따 같았고 여자애는 성격은 맘에 들었는데 어딘가 무진장 촌스러웠다. 뭐 그러다 동네 깡패들 나오고… 그러더니 결말이! 아니 왜!! 수아는 이해가 안 갔다. 아니, 저 할아버지 왜 저래? 미친 거 아니야? 수아는 점점 후회가 밀려왔다. 민호 선배가 팝콘을 기대 먹던 엎드려 먹던 신경 끄고 영화에나 더 집중할 것을 중간중간 놓친 게 있었는지 아차 싶었다. 수아는 할아버지가 마지막에 남긴 유언에도 불만이 많았다.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선택이 정말이지 너무 마음에 안 들었다.

“아, 그건 월트한테 병이 있었잖아. 그러니까 어차피 죽을 거 가치 있는 선택을 한 거지.”

“에?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그 할아버지 어디 아팠어요?”

“응, 그 씬 기억 안 나?”

상영관을 나서며 할아버지의 선택에 경악하는 수아에게 민호 선배는 그의 병에 관한 대략적인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나 수아는 설명을 아무리 들어도 그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무리 열이 받아도 아무리 돕고 싶어도 그렇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수아에게 민호 선배는 배우이자 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사람의 영화에 관해 주욱 설명해 주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부터 ‘용서받지 못한 자’, ‘아버지의 깃발’, ‘미스틱 리버’,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스페이스 카우보이’등등… 민호 선배는 참 아는 게 많은 사람이었다. 또 그가 말하는 영화들은 대부분 이번 상영회를 통해 상영 중이다.

“음… 그런데 뭐야. 점점 나이 먹으면서 다 자기가 찍고 자기가 주인공이네요. 혼자 다 해 먹네.” 수아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홍콩의 성룡 아니냐며 투덜거렸다.

“하하하, 재밌다. 그런데 성룡이랑은 장르도 다르고 결이 다르지. 감독만 한 영화도 있어. ‘미스틱 리버’, ‘아메리칸 스나이퍼’나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에서는 감독만 했어.”

“어! 뭐야?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 그거! 누구지? 그 사람! 그 와쇼스키 형제, 아니 자매 그 사람들 영화에 나온 그… 배두나 나오고… 그 SF영화에 나오는… 그 남자?”

“’클라우드 아틀라스’? 톰 행크스?”

“아! 네! 톰 행크스! 톰 행크스가 머리 하얗게 하고 비행기 몰다가 새떼 만나서 추락하던 거 강으로 가서 다 살리는 거, 그게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 맞죠?”

“와, 수아야 의외로 영화를 많이 아네. 다시 봤어.”

“에이 무슨… 그냥 뭐 이것저것 보는 거죠. 암튼 저 괴팍한 할아버지가 설리를 만들었구나. 설리랑 비슷한 거 또 있는데, 덴젤 워싱턴이 비행기 뒤집어서 착륙시키는 거…”

“플라이트?”

“아! 맞아요, 맞아요. 그거 플라이트!”

“그럼, 이 두 사람, 톰 행크스와 덴젤 워싱턴이 같이 나온 영화도 알아?”

“필라델피아?”

“Wow!”

말 그대로 와우였다. 민호 선배와 영화 이야기를 하는데 척하면 척 너무 잘 통했다. 민호 선배는 수아가 예전에 스치 듯 본 영화들까지 모두 줄줄이 꿰고 있었다. 뭐든 감독과 배우의 이름만 말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바로 관련된 다른 영화 이야기를 이어 말했다.

“아, 수아야. 시간 괜찮으면 우리 커피 한 잔 할까?”

“네, 커피?”

“응. 이 앞에 ‘헌티드 도넛’ 새로 생겼잖아. 거기 어때? 거기 우유 크림 도넛에 커피, 진짜 맛있거든.”

“아니, 선배…”

유럽 여행을 가서도 한국 집밥 생각이 한 번도 안 날 만큼 수아는 빵을 사랑했다. 헌티드의 우유 크림 도넛이 먹고 싶다고 남자 친구인 신종혁 씨에게 한 달 전부터 노래를 불렀었는데 신종혁 씨는 뚝심 있게 느끼해서 싫다며 한사코 거절했었다. 그래서 매번 외롭게 혼자 먹던 걸 지금 누군가와 함께 먹을 수 있다니! 수아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그렇고.


“그래도 전 이해가 안 가요. 꼭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을까요? 그래도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야죠.”

“그건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배우이자 감독, 한 사람을 이해하면 더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클린트 이스트 우드가 어떤 사람이냐면 원래 웨스턴무비 배우로 출발했잖아…”

이제껏 말을 많이 아낀다고 생각했던 민호 선배는 성심성의껏 자신이 아는 것들을 수아에게 설명해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아는 도넛 먹는 내내 여전히 월트 코왈스키 씨를 이해할 수 없다고 읍소했다. 우유 크림 도넛은 혼자 먹을 땐 도넛에서 삐져나온 크림이 손가락 사이사이에 끼든 지 말든지, 또 테이블에 흘리든지 말든지 크게 개의치 않고 먹었는데 누군가와 함께 먹으려니 세상 신경 쓰인다는 것도 새삼 깨달으면서.




“아오~~~~~ 아오 아오.”

영화의 자막이 올라갈 때 숙면을 취했던 신종혁 씨가 기지개를 켰다. 어차피 지난주처럼 ‘그랜 토리노’ 상영관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므로 기지개를 켜는 남자 친구가 별로 부끄럽지 않았다. 쪽팔려도 자기가 쪽팔려야지 내가 쪽팔릴 일은 아니다.


“뭐야? 최수아? 왜 그래? 울어?”

잠에서 쉬이 깨어나지 못했던 신종혁 씨는 연신 어깨를 좌우 들썩이며 고개를 돌리다 아랫입술을 부들부들 깨물고 눈물을 꾹꾹 쏟아내는 수아를 드디어 발견했다. 수아는 두 번째 본 ‘그랜 토리노’의 월트 코왈스키 씨의 선택이 여전히 싫었고 두 번 본 만큼 그의 선택이 사무치게 안타까웠다. 월트 코왈스키 씨는 자신만의 신념으로 스스로의 목숨줄을 붙잡고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그 신념 자체에 동의할 순 없었지만 신념이 남에게 보이주기 위한 것이 아님에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었다. 그는 가치 있는 죽음을 선택한 게 아니었다. 가치 있는 삶을 선택한 것이었다. 힝… 그래도 그렇지!


“야, 너 왜 울어? 어색하게.”

신종혁 씨는 적잖이 당황했다. 애초에 신종혁 씨의 상식 선에선 ‘그랜 토리노’는 수아가 좋아할 만한 영화가 결코 아니었고 본인 기준 눈물 흘릴 영화도 아니다.


“여기 잘 생긴 사람 한 명도 안 나왔잖아. 그 옆집 사는 애도 찌질하니 못생겼고. 깡패들도 다 찌질하고. 뭐 하나 볼만한 비주얼이 나와야 네가 좋아하지. 근데 왜 울어? 진짜 그만 울어.”

신종혁 씨가 중간중간 잠에서 깨 영화를 보긴 봤나 보다. 아니면 어쩌다 집에서 봤던가. 수아는 잠시 신종혁 씨를 흘겨보았다.


“아니야? 그럼, 뭐야? 마지막에 주인공이 자살 좀 했다고 계속 이러기야?

허, '자살 좀'이라니! 수아는 눈물이 좀 진정되면 일어나려 했지만 순간 신종혁 씨가 꼴 보기 싫어져 눈물을 정리시키지 못한 채 상영관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야, 최수아! 같이 가, 갈비탕 먹으러 가야지!”

수아는 이날, 갈비탕을 못 먹었다. 아니 안 먹었다.

갈비탕집에 가긴 갔다. 신종혁 씨는 ‘왕갈비탕’ 두 개를 주문한 후 기다리며 수아를 보고 계속 웃었다.


“야, 진짜 최수아 왜 이렇게 귀엽냐? 할아버지 죽은 게 그렇게 슬펐어?”

“그게, 아니라… 오빠 그거 알아?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완전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하는 우파래. 그리고 그게 잘 드러난 영화가 ‘그랜 토리노’래.”

수아는 지난주 민호 선배에게 들은 이야기를 남자 친구 신종혁 씨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뭐야? 클린트 이스트우드 보수주의자인 건 유명하지.” 왜 별것도 아닌 걸로 호들갑이냐며 신종혁 씨가 대답했다.

“오빠 그냥 보통 보수주의자가 아니야. 보수주의자지만 동성결혼도 지지하고 낙태 합법화도 지지한다고. 근데 또 총기 소지는 극 찬성하는 사람이다. ‘그랜 토리노’ 보면 딱 그렇더라. 어떤 연설에서는 *마이클 무어 죽여버린다고 했었데.”

“이야 최수아… 그새 클린트 할아버지 인터넷으로 검색해 본 거야?”

수아는 왠지 분했다. 어느 정도 신종혁 씨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방금 건 지난주 내내 인터넷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대해 검색해 보고 비로소 알아낸 것들이었다.


“하긴… 생각해 보니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젊었을 땐 잘생기긴 했지. 최수아, 네가 그래서 좋다고 하는 거구만. 네가 얼굴 말고 어딜 보겠냐. 진짜 클린트 이스트우드 옹이 그 나이에 대단하네! 이렇게 어린 여자가 잘 생겼다고 좋아해 주고. 할아버지여도 잘생기면 다 오케이다? 크크.”

분하지만… 신종혁 씨 말이 다 거짓은 아니었다. 진짜 젊은 시절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대단히 잘생기긴 했다. 그래도,


“아니, 오빠는 아까부터 내가 무슨 얼굴만 본다고 그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미투 운동도 지지하고 또 극 반전주의자에.”

“오구오구, 구래요? 잘생긴 할아버지가 미투도 지지해서 그렇게 멋있었어?”

“말을 왜 그렇게 해? 그게 다가 아니라고! ‘용서받지 못한 자’라는 영화를 보면,”

“수아야, 비켜! 갈비탕 나왔다.”

신종혁 씨는 갈비탕이 나오자마자 코끼리 아저씨가 코로 과자를 받아먹듯 갈비탕에 코를 박고 먹기 시작했다. 후루룩후루룩, 쩝쩝, 와그작와그작, 쭙쭙. 참 게걸스럽게도 잘도 먹어댔다.


“수아야, 너 그거 다 먹을 수 있어?”

“뭐?”


숟가락도 들지 않아 건드리지도 않은 수아의 갈비탕에서 신종혁 씨가 갈빗대를 마구 건져갔다. 수아의 옷에 국물이 튀었지만 신종혁 씨는 자기 배를 채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진짜 엄청 굶주렸었나 보다. 수아는 끼익 의자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신종혁 씨의 코는 갈비탕에 박혀 있었다.


“뭐야? 가?”


신종혁 씨는 갈비탕 국물을 흠뻑 머금은 쌀밥 한 수저를 입안 가득 메워 넣고는 가방을 챙기는 수아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주린 배를 채우느라 의자에서 엉덩이를 뗄 의지는 없어 보인다. 수아는 서둘러 나갈 필요도 없었다. 쫓아오는 이가 없으므로 평소 걷던 자연스러운 걸음걸이로 갈비탕집에서 유유히 걸어 나왔다.


그 주 내내 신종혁 씨는 수아에게 연락을 해댔다. 도대체 수아가 왜 삐졌는지 궁금하다는 톡이 주를 이루었다. 수아는 한 주 내내 그런 신종혁 씨의 연락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냥 씹었다. 그렇게 한 주를 보낸 수아는 용기를 내서 L시네마로 향했다.


“수아야…?”

이런 우연이… 민호 선배를 또 만났다.


“진짜 우리 신기하다. 이렇게 또 보고.”

“… 그런 가요?”

“오늘도 혼자 영화 보러 온 거야?”

“음… 네.”

“할머니 축하는 잘해드렸어? 좋아하셨겠다.”

수아는 2주 전, 민호 선배와 ‘그랜 토리노’를 같이 본 이후로 종종 톡을 주고받곤 했었다. 은형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했더니 은형이는 ‘거 봐. 맨질맨질하게 생긴 게 나는 그 오빠 고따구로 뒷구녕으로 호박씨를 까댈 줄 알았어!’라며 자신의 사람 보는 눈이 틀리지 않았다고 가정하며 기뻐했다. 알고 보니 은형이는 민호 선배에게 전혀 마음이 없었다.


민호 선배는 지난주에도 같이 영화 볼 것을 제안했지만 수아는 갈 수 없어 미안하다고 거절했다. 신종혁 씨와의 선약을 밝히지 않았음은 물론이거니와 남자친구가 있는 티를 아예 안 냈고 대신 지지난 달 생신이었던 할머니 생신 파티에 간다고 둘러댔다. 친구 은형이가 확실히 관심 없다고 하니 단순 어장 관리 정도는 별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기엔 헤어질 타이밍을 고민하게 만드는 신종혁 씨도 크게 이바지했었다.


“네, 많이 좋아하셨어요.”

“하하하, 선물 뭐 드렸는데? 설마 그랜 토리노에 나왔던 노인용 전화기?”

읍! 설마 웃으라고 하는 말인가. 수아는 이게 뭔가 싶은 실망감을 느꼈다.


“수아야, 오늘은 무슨 영화 보러 왔어?”

“저요? 저는…”

“아직 정하지 않았으면 나랑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보지 않을래?”

“에?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요? 저는….”

“그거 알아?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메디슨 카운티는 다리 이름이 아니다.”

“아, 저도 며칠 전에 알았어요. 메디슨 카운티는 지역 이름이고 다리 이름은 로즈먼.”

“오, 로즈먼 맞아. ’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내가 몇 안되게 좋아하는 러브 스토리야. 같이 보면 좋을 거 같은데.”

러브 스토리? 불륜 스토리 아닌가? 물론 좋은 영화임에는 수아도 동의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지대한 관심이 생겨난 수아는 며칠 전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집에서 혼자 보았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충분히 흔들릴 수 있음을 이해했고 사랑 때문에 생활을 저버리지 않는 게 꽤나 현명해 보였다. 또 더 어릴 때라면 사랑보다 생활을 택한 선택이 구질구질하고 용기 없다고 했을 자신을 돌아보았다. 몇 년 전, 평생 가족들 그늘 속에 계시다 발견한 자궁암을 꿋꿋하게 이겨낸 후 산으로 들로 여행을 다니시는 웃는 얼굴의 엄마 생각도 났다. 지금의 수아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매우 합리적인 불륜 스토리라고 생각한다. 영화 속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메릴 스트립의 선택을 존중했다. 굳이 자식들에게 자신의 비밀을 편지로 남기는 것이 드니 빌뇌브의 ‘그을린 사랑’을 떠올리게 만들었는데 민호 선배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저기 민호 선배, 저는 그랜 토리노 보러 왔어요.” ‘그을린 사랑’에 관한 반응이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그랜 토리노를 또?”

“네, 또!”

“음… 그게 두 번이나 볼 영화는 아닌데. 여러 번 보기엔 영화가 꽤 심플하잖아. 차라리 조금 기다렸다가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나 아니면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어때?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봤니?”

두 번째 아닌데, 지금 보면 그랜 토리노는 세 번째인데. 수아는 조용히 마음속 어장 수문을 열었다.


“아니요. 저는 그래도 그랜 토리노가 너무 보고 싶어요. 월트 코왈스키 씨 똥고집이 이상하게 좋더라고요.”

“그래? 그게 어떻게 보면 미국 일베 아저씨라고 볼 수 있잖아.”

“허허. 일베라니요.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왠지 민호 선배에게서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 나오는 프란체스카 아들의 가식 버전을 본 것만 같았다. 코왈스키 씨를 일베로 치부하다니…. 아 진짜 너무하네. 민호 선배를 어장 밖으로 내보냈다.


“선배, 저는 영화 시간 다 돼서 들어가 볼게요.”

“아, 그래? 그럼 나도 빨리 표 살게.”

“아니, 왜요? 선배는 선배 보고 싶은 거 보셔야죠. 괜히 저 때문에 돈 쓰지 마시고.”

“아니야, 수아야 괜찮은데?”

“아니에요. 제가 미안해서 안 괜찮아요. 저 가요. 선배도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재밌게 보세요.”

처음 보고, 두 번째 보고 세 번째 보니 큰아들이 도요타에서 일한다고 욕하는 월트 코왈스키가 어찌나 웃기던지. 또다시 보니 코왈스키 씨의 몽족 이웃들뿐만 아니라 코왈스키 씨도 이발소 친구도 건설업자 친구도 다 이민 온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서로 욕하는 거다. 월트 코왈스키 씨가 손가락 총을 처음 꺼내는 장면에서부터 수아의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그러다 마지막 코왈스키 씨가 유언장을 통해 각종 인종차별 발언을 대 놓고 하며 친구 타오에게 차의 튜닝은 절대 하지 말라는 장면에서는 눈물과 웃음이 같이 터졌다. 부디 자신의 가치를 지켜달라는 어느 노인의 부탁.

수아는 자신은 결코 하기 힘들 코왈스키 씨의 선택(그는 그의 다정한 이웃인 소년 소녀를 위해 대신 싸워주는 대신 그 갱들에게 살해 당하는 방법으로 갱들을 사회로부터 확실히 격리시키는 방법을 선택한다.)을 여전히 찬성할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은 못 하는 다른 이의 선택을 존중할 수 있다는 잠정적 결론을 내렸다. 존중하고 싶은 타인이 생기니 비로소 자신도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신념에 작은 자신감이 생겼다.


‘그랜 토리노’. 수아가 처음으로 극장에서 세 번 찾아본 영화이고 처음으로 혼자 본 영화다. 다른 활동 없이 오로지 영화만 보려고 극장에 가게 만든 첫 번째 영화다.


수아는 월트 코왈스키 씨와는 달리 총기 소지에는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TARGET HUNTER>에서의 의미 없는 총질도 더 이상 안 하기로 했다.


*마이클 무어 - **<볼링 포 콜럼바인>(2002)를 제작한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볼링 포 콜럼바인 - 1999년에 일어난 콜럼바인 고교 총기난사 사건을 그린 다큐멘터리로 총기 소유에 대한 집착, 폭력적 문화에 대해서 비판했다.











그랜 토리노. by 옥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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