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1 할
Chapter-1 할
미하르의 얼굴이 파리했다. 먹은 것도 없는데 속에서 거북한 국물이 찔끔 넘어왔다. 불쾌한 신맛이 났다. 미하르는 최대한 큰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깊고 조용히, 어금니를 꽉 깨물고 출렁거리는 국물의 냄새가 새어 나가지 않길 바라며 길게 코로 숨을 뱉었다.
“이게 그 그루이트? 유로파의 고등동물이야?” 할이 그루이트가 담겨 있는 캡슐에 한 발짝 다가서며 물었다. 그러나 미하르는 어금니를 움켜쥐느라 바로 답하지 못했다.
“미하르? 괜찮아?” 할이 미하르의 안색을 살피며 한 번 더 말을 시켰지만 미간을 찌푸리며 콧구멍만 벌룸 거릴 뿐 미하르는 대답이 없었다.
이곳은 태양계 [블라디미르 콜로니]에서 613만 광년 거리에 위치한 행성 ‘유로파’다. ‘유로파’라는 이름은 워프 드라이브 초공간(Hyperspace) 경로, ‘블라디미르 트램’의 건설용 자재로 사용되고 없어진 목성의 위성 중 하나, ‘유로파’에서 유래되었다. 할은 ‘블라디미르 트램’을 통해 지구시간으로 202일 11시간 만에 행성 ‘유로파’에 도착할 수 있었다. 613만 광년 거리를 지구 시간 202일 11시간 만에 이동 가능하게 해주는 건 ‘블라디미르 그룹’의 ‘블라디미르 트램’뿐이다. 물론 누군가 원한다면 다른 경로를 개척할 수는 있다. 문제는 그 누군가가 다른 경로를 개척하는데 들어갈 자원의 50분의 1, 아니 블라디미르 그룹이 약간의 자비만 베푼다면 100분의 1의 자원으로도 블라디미르 트램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할이 속한 ‘지구 유니언’도 블라디미르 그룹에 적정한 자원을 지불하고 블라디미르 트램을 사용하고 있다.
할은 유로파에 오는 동안 4,452시간의 동면을 취했다. 달 궤도에서 벗어날 때 즈음 동면 캡슐 안 겔(gel) 속에 푹 잠긴 할은 멀리 작아지는 지구를 바라보며 폐와 연결된 입과 코, 호흡기관과 위와 연결된 식도로 동면 겔(gel)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게 잠들기 전 할의 마지막 기억이었고 도착 후 겔(gel) 해동 시간 포함 128시간의 온도 적응 후에야 비로소 겔(gel) 밖으로 걸어 나올 수 있었다. 그게 불과 2시간 전이다. 그런 할이 오히려 미하르의 안색을 살펴야 하다니! 할은 자신이 급하게 파견된 지구 유니언 소속 연구원이라 무시를 당하는 건가 싶었다.
“응. 꽤 고등동물이긴 하지… 영장목, 성성이과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까? 소통방식은 고래목인 돌고래에 비슷한 것이, 지금까지 발견된 우주 생명체 중에서는 가장 영리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중저음의 친절한 목소리. 할이 겔(gel) 속, 해동 중 얼굴로 인사만 나누었던 이 탐사팀의 대장 민수가 키핑룸에 들어오며 미하르 대신 대답했다. 민수는 350시간 전 포획했다던 그루이트 한 마리를 막 방생하고 돌아오는 길이다.
현재 유로파 기지에는 할을 포함 4명의 휴먼이 있다. 키 184cm 정도의 군살 없는 몸매에 머리가 작고 팔, 다리가 긴 멀리서 보면 멸종 곤충 사마귀처럼 보이는 미하르와 173cm의 할과 엇비슷해 보이는 키에 두껍고 촘촘해 보이는 몸을 가진 민수는 블라디미르 그룹 소속 연구원이고, 할이 오기 전 유일한 여성 팀원이었던, 지금 이 룸에는 없는 의사 재시가 프리랜서 팀원으로 민수의 아내다. 다시 말하면 이들이 지금 지급받는 자원과 또, 앞으로 지급받을 자원은 할의 것과는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그 급이 다르다는 걸 의미한다. 상대적으로… 할 쪽이 빈곤하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면에서 유로파의 그루이트들은 할에게 중요했다.
“이 캡슐 속 그루이트는 정말 죽은 게 맞아? 눈꺼풀 기능을 하는 얇은 막이 투명해서 그런지 마치 눈을 뜨고 살아 있는 것 같아. 그리고…”
할이 말 끝을 흐리자 옅은 미소의 민수가 그루이트를 향해 바짝 다가서며 할에게 되물었다.
“그리고 뭐?”
“그리고… 정말 우리 휴먼이랑 비슷하게 생겼어.”
동면 캡슐과 비슷한 키핑 캡슐 속, 유동 겔(gel) 안에는 그루이트 한 마리가 보관되어 있다. 길이는 151.3cm, 체량은 43kg으로 피부색은 지구의 광물 ‘오팔’과 비슷하다. 전체적으로 옅은 핑크색을 띠는 우윳빛이었는데 보는 방향에 따라 다채로운 은은한 색을 띄운다. 색들은 겉 표면이 아니라 반투명해 보이는 가장 바깥쪽 표피의 한 단계 안쪽에서 빛나는 듯 보였다. 털도 비늘도 없는 피부는 유리처럼 매끈하다. 지구의 휴먼처럼 한 개의 몸통에서 뻗어진 두 개의 팔과 다리, 한 개의 머리와 한 개의 성기를 가진 생김새로 전체적인 구조와 비율도 휴먼과 매우 흡사해 멀리서 보면 진짜 휴먼이라고 착각할 수 있을 정도였다.
스캇의 보고서에도 외형적으로 지구의 포유류, 특히 인간과 가까운 생물이라고 나와 있었다. 어디까지나 신체 구조적인 면으로 봤을 때 비슷하다는 이야기다.
“처음엔 우리 같은 지적 생명체를 발견한 줄 알았다니까.” 민수가 캡슐 속 그루이트를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이 별을 탐사하다 보면 저렇게 상처 하나 없이 죽어 있는 그루이트 사체를 종종 발견하곤 해.”
“그런데 부패가 빠르다는 거지?”
“음… 정확하게 말하면 부패라는 말보다 사후 형태 유지가 어렵다고 하는 게 맞을 텐데. 스캇의 보고서에 그렇게 나와있지 않아? 아직 다 숙지를 못 한 건가? 시간은 충분했을 텐데.”
스캇은 얼마 전까지 이 팀에 합류해 있던 블라디미르 소속 생물 연구원이다. 오랜 타행성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인지 원인을 알 수 없는 컨디션 난조로 갑작스러운 지구 귀환을 요청했고 대신 파견된 것이 지구유니언 소속 연구원 할이었다. 트램의 포털 이동을 위한 동면 겔(gel) 흡입술은 머리만 좋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강한 체력과 정신력이 필요한, 큰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으로 할은 이런 날을 기다리며 장기간 훈련해 왔다.
“아, 물론 그 부분 당연히 읽었지. 맞아, 그렇게 나와있어. 내가 뭔가 혼동했나 봐.” 할은 민수의 지적에 당황했지만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스캇이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그루이트를 잡아 키핑 캡슐에 넣은 거야. 판타스틱한 골든 타임이었지.”
“그래, 스캇이 뭐, 조금 대단한 일을 해낸 거구나.” 할은 스캇 이상의 것을 발견하고 싶다는 조바심이 났다.
“할! 조금이라니?!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어!”
“… 그, 그래. 스캇의 보고서에 따르면 내부적인 구조는 아직 연구해봐야 할 게 많다고 했어.”
그루이트는 해부를 위해 표피를 절개하면 젤의 막이 터지듯 절개한 부분 사이로 표면장력이 사라져 터져 버린 물풍선처럼 표피 내부 알맹이들이 흘러내린다고 했다. 이것은 이 유로파 행성 생명체 유기물의 대표적 특징이다.
“내부는 달라도 외적으로는 비슷하다고. 그래서 기능적인 면으로 저들도 성교를 한다고 한 거겠지?”
이때, 가까스로 속을 진정시킨 미하르가 어금니의 긴장을 풀고 괜한 미소를 지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음… 글쎄. 할, 너는 어떨 거 같아?”
할은 미하르의 미소를 못 본 척 그루이트의 사체만 바라보았다. 캡슐 속, 그루이트의 다리 사이에는 성기 기능을 하는 길고 땅땅한, 채도 높은 분홍 돌기가 솟아 있었다. 젤 속에 있는 탓인지 휴먼의 것처럼 발기된 듯 보였고 주변에는 음낭의 역할로 보이는 마젠타와 옐로 컬러의 여러 막들이 팔랑이고 있었다. 그것이 화려한 ‘카틀레야’ 꽃잎 같았다.
“할도 어서 그루이트 무리의 대장들을 봐야 하는데.”
“대장? 그 챕터는 인상적이었어. 대장 한 마리에 여러 마리의 ‘노예’들이 무리 지어 생활한다고 했지. 그런데 스캇은 왜 ‘노예’라는 단어를 사용한 거야?”
“아, 그거야 그것들은 명령에 복종을 하니까.”
“복종? 그렇다면 명령은 누가 내리는데?”
“오, 명령과 복종의 변증법.” 미하르는 괜한 미소의 입꼬리를 더 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당연히 대장 그루이트지. 철저한 상명하복, 대장이 곧 주인이야. 그렇지만 명심해, 할! 그루이트는 그래 봤자 엄연히 하등동물이야.”
“하하, 그러게… 지적 생명체가 아닌데도 흥미로운 점이 많아.” 할도 예의상 같이 웃어주며 대답했다.
민수가 대화에 들어왔다.
“자, 나머지 이야기는 식사하면서 마저 나눌까? 재시가 지금 오면 된다는데.”
재시는 이 식사 준비를 위해 몇 시간 전부터, 아니 거의 6시간을 다이닝룸에만 있었다. 할이 지구에서부터 챙겨 온 식재료를 해동하고 다듬느라 실질적인 준비는 할이 유로파에 도착했을 때부터 시작된 거라고 한다.
“할 덕에 진짜 오랜만에 제대로 된 요리를 할 수 있었어. 정말 고마워, 할”
재시가 다이닝룸으로 들어온 할을 두 팔로 힘껏 잡아당겨 꼭 안아주려고 했지만 할이 안기지 않으려 뒤로 뺐다. 재시의 앞치마에 묻어 있는 식재료의 잔해들 때문이었다. 할은 먹을 것을 지급받거나 혹은 구입하는 게 아니라 직접 만든다는 것 자체가 어색했다.
“아니, 나는 뭘 한 게 없어. 그냥 같은 같은 트램으로 온 것뿐인데, 굳이 고맙다고 한다면 운반료만큼의 자원을 지불한 지구유니언 측에 하는 게 맞지 않을까?”
공식적으로 일개 기업인 블라디미르 그룹과 지구유니언은 동등한 관계이지만 지구유니언은 동등함을 넘어선 보다 더 친밀한 사이이길 원했다.
“그래. 고맙지, 고맙지.” 재시는 들뜬 걸음으로 모두를 다이닝 테이블로 안내했다. 할이 읽은 재시의 기록에는 재시가 세 번의 출산을 했다고 적혀 있었다. 이는 재시가 체내 임신을 세 번이나 경험했다는 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시의 뒷모습은 그냥 20대가 아닌, 훨씬 열심히 관리하는 20대인 할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키도 할보다, 아니 남편 민수보다도 8cm가량 더 커 보이는 것이 멀리서 보면 할보다 더 근사해 보일 수 있겠다 싶었다. 할은 웃엉덩이를 하나로 바짝 모으고 배꼽을 등 쪽으로 힘껏 쥐어 잡고서 재시의 뒤를 따랐다. 가슴은… 가슴은 이번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면 스스로 선물해줄 것이다.
테이블에는 연기가 나는 죽은 생명체들이 접시 또는 그릇 위에 놓여 있었다. 어떤 것들은 윤이 반질반질했고 어떤 것들은 액체 속에 잠겨 있었다. 주로 식물이 많았고 곳곳에 토막 난 동물 조각도 있었다. 그리고 냄새가, “자극적이야!” 할은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로 말을 뱉었다. 순간 재시의 눈치를 살폈다. 기분 나빠하지 않아야 할 텐데.
“하하하, 당연하지. 할은 그렇게 느낄 수 있어. 유니언에서는 지급받는 큐브만 먹고 살아왔을 거 아냐.”
재시는 할 앞에 어떤 동물의 살덩어리를 놓아주며 큰소리로 웃었다.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재미있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 여러분 제일 연한 부위는 오늘 이 자리를 있게 해 준 할에게 양보합시다. 고기는 처음 씹어보는 것일 테니.”
미하르는 언제 속이 안 좋았냐는 듯 재시의 요리를 허겁지겁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스캇 녀석이 아팠던 건 다 이것 때문이야. 제대로 된 음식을 못 먹어서 그런 거라고. 이제야 정말 살 것 같다! 재시, 재시가 요리를 꽤 하는구나!”
“미하르, 제발 천천히 먹어.” 그런 미하르를 챙기며 흐뭇하게 자리에 앉으려는 재시를 민수가 불렀다.
“재시, 나 물 한잔만 가져다줄 수 있을까?”
재시는 바로 물컵을 가지러 갔다. 할은 이 광경이 몹시 생경했다.
“할도 이번 기회에 요리하는 법을 배워보는 건 어때? 혹시 알아? 나중에 또 우리와 함께 일하게 될지?”
씹는 것에 열중하느라 할이 대답을 하지 못 했다. 정확히는 자신의 입속에서 나는 무언가가 씹히는 요란한 소리 때문에 민수의 말을 듣지 못했다.
“할? 할? 민수가 물어보잖아.” 물 잔을 채우며 재시가 할을 도왔다.
“응? 민수? 뭐라고 했어?”
“하하, 할도 요리를 배워 보는 게 좋겠다고.”
“아… 음… 그래, 민수 왜? 혹시 블라디미르 그룹 소속 팀원들은 요리기술이 필수야?”
“하하하, 할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요리 같은 거 안 해. 나뿐만이 아니라 미하르도 그런 건 배울 필요가 없다고.”
민수가 할이 귀엽다며 웃었다. 미하르도 입꼬리가 올라간 채 열심히 고기와 채소를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은 입은 계속 움직이며 고개를 숙이고 자신이 무슨 말실수라도 한 건가 싶어 머리를 굴렸다.
민수에게 물이 가득 찬 컵을 건네는 재시가 또 친절하게 거들었다.
“민수, 할을 당황시키지 마. 할, 나는 의사잖아. 이건 모두의 컨디션을 위해서 하는 일이야. 의사로서 팀원들 컨디션 유지는 아주 중요한 일이니까 말이야.”
“아… 그래? 나는 또 내가 모르는 무슨 말실수라도 한 줄 알았네.”
뭔가 납득이 안 가는 할은 다른 이야기로 주제를 바꾸고 싶었지만 마땅한 주제가 쉽사리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제일 만만한 그루이트 이야기라도 꺼내야 하나 싶어 미하르에게 시선을 돌렸는데 미하르가 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입에 있던 음식물을 바닥에 뱉고 “어! 이거 왜 이래?!” 하고 소리쳤다.
만족스러움이 충만했던 그의 얼굴은 뱉음과 동시에 역함으로 꽉 찼다.
“미하르 왜 그래?” 재시가 드디어 의사다운 일을 하려는지 미하르에게 다가갔다. 미하르의 안색을 살필 줄 알았는데 미하르가 먹던 음식의 냄새를 ‘습습’ 맡았다.
“왜 괜찮은데, 미하르. 설마, 또 속이 안 좋니? 좀 참아봐.” 무언가 재시의 말에 귀찮음이 묻어났다.
“그, 그래. 너무 급하게 먹어서 그런 가 봐. 좀 쉬었다 천천히 먹어 볼게.”
미하르는 그대로 들고 있던 도구를 내려놓은 채 눈을 감고 깊은 호흡만 하기 시작했다. 얼굴에 약간의 식은땀도 비쳤다. 냄새를 피하려는지 입을 한껏 벌리고 목으로만 숨을 쉬는데 그것만으로도 몹시 불편해 보였지만 재시는 미하르가 그렇게 숨 쉬게 내버려 두었다. 미하르는 진짜 재시의 요리가 불편하다면 그냥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도 될 텐데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었다. 재시가 상관인 대장 민수의 아내라서 눈치가 보이나 보다. 보유 자원 규모만 다를 뿐 지구유니언이나 블라디미르 그룹이나 조직사회는 다 똑같구나.
“할은 어때? 먹을 만해?”
재시의 질문에 할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이 자극을 말로만 표현하는 건 몹시 어려웠다. 춤을 춰야만 했다. 소리도 질러야 했다. 큐브만 알고 있던 할의 인생에서 이런 구강 자극은 처음이었다. 이 자극 때문에, 오로지 이 자극 때문에 재시를 사랑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 모든 걸 있는 그대로, 침착하고 지적이지 못 한 방법으로 표현한다면 이들은 나를 업신여길지도 모른다. 이 쾌감을 솔직하게 방출하지 못하다니, 아 괴롭다! 할은 말없이 미소 지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아, 입은 계속 움직였다.
“재시, 이 스테이크…”
이때, 여유롭게 음식을 음미하던 민수가 손날로 콧구멍을 막았다. 스테이크를 쏘아보는 그의 얼굴에 메스꺼움이 번졌다. 낯빛이 흙색이 된 민수는 헛구역질이 올라는 듯 애꿎은 침만 꿀꺽꿀꺽 삼켰다.
“민수!” 재시가 이번엔 스테이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바로 민수를 살폈다. “민수, 당신이 왜 이러는 거지? 당신은 이럴 이유가 없잖아.”
말이 좀 이상했다. 그럼 미하르는 아플 이유가 있어서 아프다는 건가. 민수의 헛구역질 때문인지 목구멍으로만 숨 쉬며 버티던 미하르도 결국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처음 몇 번은 어떻게 위기를 모면하나 싶었는데 결국 뱃속의 음식물이 넘어왔는지 입을 틀어막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재시는 그런 미하르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재시의 눈은 민수만 쫓았다.
“민수, 왜 이러는 거야? 도대체 당신이 왜 아픈 거야?”
“재시 제발 진정해.” 민수가 구역질과 토사물 사이에서 가까스로 대답했다.
“지금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당신이 왜 이렇게 아픈 거냐고?!”
왜인지 재시의 목소리엔 걱정과 원망이 섞여 있었다. 민수가 아픈 건 처음이라지만 재시는 어떻게 치료하면 좋을지 이미 여러 번 경험해 본 듯 격앙된 목소리와는 달리 능숙하게 민수에게 약물을 투여했다. 다행히 미하르와 민수의 증상은 더러운 것에 비해 크게 위험해 보이진 않았다. 할은 지금 자신이 뭘 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하며 튀지 않게, 조용히 자신 몫의 요리를 한점 한점 입에 넣었다. 미하르와 민수 때문에 입맛이 떨어질 법도 한데 한 번 알게 된 이 구강 자극을 멈추는 건 쉽지 않았다. 뭐, 저 둘은 재시가 알아서 하겠지. 이때, 테이블 중앙에 한 줄기 빛이 올라왔다. 이 빛은 곧 천장까지 닿더니 동그란 구체로 변해 이곳, 유로파 행성을 보여주는 홀로그램 지도로 바뀌었다. 아, 정말 아름다운 핑크색이다.
“그루… 이… 트.” 몇 가지 약물에 진정제까지 투여받던 민수가 눈을 가물거리며 중얼거렸다. 아름다운 핑크 구 한쪽에 초록색 빛이 반짝였다. 민수가 몇 시간 전 방생한 그루이트 속에 심어둔 나노칩이 반응을 보내는 것으로 보통 그루이트들은 젤 속 깊숙한 곳에서 생활하는데 그 그루이트가 젤 표면 근처로 올라온 것이다. “그래, 그 그루이트네.” 재시는 차갑게 대답하며 투여 중이던 진정제를 끝까지 주사했다. 민수는 반짝이는 초록빛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취한 듯 넋 놓고 바라보다 스르륵 잠이 들었다. 민수의 입에서 토사물과 섞인 침 한 줄기가 바닥으로 늘어졌다. 재시에게는 그런 민수를 깨울 희석제를 투여해 줄 마음은 없어 보였다. 할은 미하르에게 연결해 보았고 변기를 붙잡고 있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할은 드디어 구강 자극을 멈출 기회를 잡았다.
“재시, 내가 가볼까?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어. 그냥 관찰만 하고 오는 거잖아. 저 동물들은 위험하지도 않고.” 재시가 잠든 민수를 무빙 체어로 옮기느라 할의 말에 대꾸를 하지 않았다.
“재시, 나 혼자 다녀오겠다고. 재시!” 재시를 부르는 할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그런 할을 돌아보는 재시의 얼굴엔 아까의 친절함은 없었다.
“그놈의 그루이트… 할 네 마음대로 해. 나는 내 일을 해야 돼.”
“그래, 그럼 재시, 민수가 일어나면 말 좀 잘해줘! 다녀올게.”
재시는 대답 없이 무빙 체어만 움직였다.
“재시? 재시? 재시? 말 잘해 줘, 알았지? 잘 말해 줄 거지, 재시?”
재시가 잠시 멈춰 서서 한 숨을 짧게 쉬고 대답했다. “그래.”
할은 신났다. ‘하필 이럴 때 민수까지 아파 주다니! 그렇다면 지금 내가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건 전부 내게 되는 거야! 100% 나의 실적!’ 할은 유로파 탐사 유닛을 챙겼다. 그리고 오롯이 혼자서 능숙하게 유닛을 챙겨 입었다. 지구에서 입어봤던 훈련용 유닛보다 그 부피는 컸지만 무계는 훨씬 가벼웠다. 스캇의 포획유닛까지 챙겨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첫 직접 탐사이고 혼자 나가는 것이니 욕심은 부리지 않기로 했다.
유로파 대기에는 지구와 달리 암모니아, 메탄, 황화수소의 비율이 높고 그중 황화수소의 비율이 유난히 높은데 이 가스들을 걸러주는 필터 때문에 블라디미르의 유닛의 부피가 더 큰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가볍다니! 블라디미르의 기술력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물론 처음엔 미세하게 썩은 달걀 냄새가 났지만 이 정도는 기지에서 미하르와 민수의 토사물 향기를 이미 경험해서인지 충분히 참을 만했다. 유닛을 입은 할은 거대한 풍선 속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었다. 손가락 끝 한 마디씩만 랩에 씌워진 듯 유닛 표면에 밀착되어 밖으로 꼬물꼬물 튀어나와 있었다. 손바닥의 공기압을 느끼며 검지 손가락과 엄지손가락을 한 번 튕기니 그 작은 사이로 핑크색 홀로그램 지도가 생성됐다. 아름다운 초록색 반짝임이 보인다.
유로파는 행성 전체가 거대한 젤로 덮여 있다. 표면장력을 형성해주는 탐사복을 갖춰 입지 않으면 늪에 빠지듯 끊임없이 가라앉을 수 있다. 물론 가라앉는 도중 딱딱한 바닥을 만나 튕겨 오른다면 다시 젤 밖으로 나올 수 있겠지만 뎊스게이지가 알려주는 재탄력 가시거리는 사방 수미터 이내에서 재도약은 불가능하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또한 젤 속에서의 산소 부족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유닛 안에 비축된 공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비상시 사용할 수 있는 공기압 추진기가 있지만 이것도 공기를 사용하므로 횟수 제한이 있다. 즉, 넘어지지 않아야 하고 넘어지지만 않으면 된다. 스캇은 이 유닛 사용에 특히 능숙했다고 한다.
‘처음이지만 알고 보면 처음이 아닌 거야, 이미 여러 번 시뮬레이션해봤잖아. 나도 스캇만큼 할 수 있어!’
할은 훈련받은 대로만 움직였다. 최대한 침착하고 능숙하게. 급하게 움직이지 않아야 속도가 붙는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다리가 푹 푹 꺼지고 바닥이 출렁거렸지만 젤의 표면장력을 흐트러트리진 않았다. 최대한 몸에 힘을 빼고 출렁이는 흐름에 몸을 맡겼다. 할은 할 스스로 이 직접적인 첫 경험이 처음인 걸 티 내고 싶지 않았다.
할은 초록색 반짝임으로 향했다. 그곳에 민수가 방생한 그루이트가 있다. 그리고 곧 할은 넘어졌다.
[끼이이이이이이이이야악!!!]
돌고래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할의 발 밑에서 잔잔하게 출렁이던 젤이 갑자기 푹 꺼졌다. 순간적으로 할은 잠시 공중에 떠 있다 바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디딛고 있던 게 사라졌기 때문에 떨어졌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일 수도 있겠다. 문제는 떨어지고 난 후다. 할은 여기가 지구였다면 풍선 같은 유닛의 탄성으로 지금쯤 바닥에 부딪혀 공처럼 튀어 올랐을 거라고 상상하며 젤 속에 꾸루룩 가라앉고 있었다. 얼핏 둘러봐도 빛이 닿지 않는 젤 아래쪽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뿐이었다. 기압 추진기를 써야만 한다. 그리고 추진기를 사용하려면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데 아까부터 할의 발목을 잡고 마구 몸부림 치고 있는, 활짝 핀 카틀레야 꽃처럼 생긴 성기를 달고 있는 이 그루이트를 해결해야만 한다. 할이 젤 속에 빠진 것도 이 그루이트가 갑자기 젤 속에서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뭐지? 이건! 나를 공격했어?! 왜? 이런 사례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는데!’
할은 더 이상 침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 그루이트를 떼 내지 못 한다면 추진기 출력을 최대로 쓴다고 해도 젤 밖으로 나갈 수 없다. 할도 있는 힘껏 그루이트를 떼 내려 몸부림쳤다. 젤 속에서의 몸부림은, 더군다나 유닛을 입은 채로 움직이는 건 할한테 매달려 있는 저 그루이트에 비하면 0.5배속 슬로우모션으로 보일 테지만 말이다. 이렇게 저렇게 열심히 해 봐도 별 수가 안나는 침착하지 않은 할은 추진기를 그루이트를 향해 쐈다. 할은 총알처럼 나가는 날카로운 공기 줄기를 기대했는데 농도가 짙은 젤 구간이었나 보다. 뻗어 나가는 듯 보이던 공기는 젤 속에서 작은 공 모양으로 뭉쳤고 할의 발목을 붙잡은 그루이트는 그 공기공을 가볍게 피했다. 그리고 다른 그루이트가 나타났다. 발목의 그루이트와 달리 엄청 컸다. 할은 이제 완전히 당황했고 또 다른 그루이트에게 추진기를 마구 쏴댔다.
‘제발! 하나라도 얻어걸려라! 하나라도 맞아라!’
그러나 또 다른 그루이트는 할이 쏴대는 공기공을 가볍게 피하며 할에게는 일말의 관심을 두지 않고 할에게 붙어 몸부림만 쳐대는 작은 그루이트의 카틀레야 성기를 거칠게 잡아끌었다. 성기를 붙잡힌 그루이트는 더한 고통에 몸부림치며 할의 발목을 놨다. 성기를 붙잡힌 만큼 저항을 하려는 노력은 충분히 보였지만 효과는 보지 못했고 그대로 끌려갔다. 할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자신도 끌고 가주기를 바랐다. 방금 무분별하게 공기를 써버린 탓에 추진기를 쓸 수도, 더 이상 호흡할 공기도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흡곤란이 왔다. 정신이 아득해져 가는 할은 멀어지는 카틀레야 꽃잎을 생각하며 눈을 가물거렸다. 그러고 보니 저 빛은 뭘까? 저것들 성기에 생물발광화학물질이 있다고 했었던가? 오렌지빛이 어슬어슬 점점 사라져 가는 게 보인다. 그 빛을 보며 정신줄을 붙잡았다. 분명히 기지에서 내 유닛에서 보낸 위험신호를 감지했을 것이다. 몇 분만 더 버티면 되지 않을까?
‘젤을 먹자!’
지구 유니언이 블라디미르 그룹과 더 돈독해지려는 데는 여기 유로파행성 젤의 영향이 크다. 항성 간 이동 트램에 이용되는 동면 캡슐용 겔(gel)의 원료로 유로파의 젤이 매우 유용할 전망이기 때문이다. 유로파를 처음 발견한 블라디미르가 갖게 될 독점권에서 떨어질 콩고물만 받아먹을 수 있어도 지구유니언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이익이다. 여러 가지 가공과정을 거치지 않은 순수 원 젤이지만 급한 대로 겔(gel)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폐에 흡입된 젤은 무호흡의 가사상태일 때도 잠시 동안 혈관과 뇌에 산소를 공급한다. 결국 정신은 잃겠지만 그 이후의 일은 나를 발견할 누군가에게 맡겨 보자! 할은 조심스럽게 입에 밀착되어 있는 유닛의 연결부를 열었다. 썩은 달걀 냄새가 코를 쑤셨다.
‘치사량은 아니야. 삼키자!’
분명 젤 속의 황화수소 비율은 치사량이 아니야… 수치를 공부했어! 아니라고… 아닌데… 그래도 이건 너무 지독하다. 이러다 설마 죽는 건 아니겠지? 식도 구멍으로 젤을 밀어 넣으며 할은 눈을 질끈 감았다. 동면에 들어간다고 생각하자. 제발… 잠깐만 정신을 잃자. 역류하려는 젤 때문 에라도 괴로워 정신을 잃고 싶은 할에게 갑자기 그루이트들 소리가 들렸다.
[끼끼끼, 끼이이이이, 키잌 키이끼]
간절하게 정신줄을 놓치고 싶은 할을 방해하는 소란스러운 소리다. 순간 감은 눈을 뚫을 기세로 강한 초록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그 초록빛이 할을 젤 밖으로 밀어냈다. 할은 옛날 고전에서 읽은 ‘주마등’을 떠올렸다. 휴먼이 죽을 때가 되면 살아온 인생이 주마등처럼 눈앞에 스치듯 지나간다고 했는데, 저 초록빛이 너무 밝아 주마등이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구나. 그제서야 할은 정신을 잃었다.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