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
“연락도 없이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
어라? 영문을 몰라하는 재훈을 두고 미홍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들어 강민을 맞이했다. 강민은 얇은 스크린 패드 한 장을 들고 있었다. 재훈이 무슨 일인가 싶어 자연스럽게 패드로 손을 뻗으니 다른 손으로 재훈을 막는다.
“강민아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아, 이건 이 쪽 양미홍 씨 앞으로 가지고 온 거라서요.”
“미홍이 앞이라고? 그러면 더더욱 내가 먼저 봐야지.”
재훈이 한 번 더 손을 뻗었다. 미홍이 일이라면 당연히 보호자인 재훈이 먼저 확인해야만 한다. 그런데,
“아, 저는 무조건 여기 양미홍 씨께 드려야 한다고 전달받았습니다만.”
“흐음. 들었죠, 주재훈 씨? 그러니 잠시 자리까지 비워주면 참 좋겠는데요?”
재훈은… 어이가 없었다. 미홍이는 심심하니 약이나 올리자라는 마음일 때 존대를 사용한다. 재훈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했던 양미홍이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지금껏 HANA의 간절한 부탁을 위해서 HANA 대신이라 마음을 다 잡으며 성심성의껏 보살펴 왔다. 그랬음에도 감히 이따위로 대하다니. 괘씸했다. HANA, 그녀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쓸모없는 미홍이 같은 거 진작에 버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나더러 나가라 마라 하는 거야?”
재훈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누르지 못하고 고함쳤다.
“뭐야, 주재훈? 왠 급발진? 궁금하면 그냥 궁금하다고 하면 되지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냐? 그렇게 궁금하면 그냥 보여달라고 하면 되잖아.”
“뭐?”
“봐. 궁금하면 보라고.”
미홍은 강민에게 건네어 받았던 스크린 패드를 재훈에게 내밀었다. 별것 아니라는 저 표정이 재훈을 더 화나게 만들었지만 일단 패드 내용 확인이 먼저라는 생각에 거칠게 패드를 받아 들었다.
‘이, 이게 다 뭐야? 이게, 양미홍 저게 언제 이런 걸?’
재훈은 패드의 내용을 확인했고 또 확인했다. 그런데… 미홍이가 무슨 짓을 벌인 건지,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건지… 설명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래서 미홍의 얼굴을 보는 게 더 싫었다. 주재훈이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어 양미홍에게 설명을 부탁해야 하다니. 용납할 수 없었다. 패드를 읽으면 읽을수록 더 미홍에게 등을 돌렸다.
“뭘 그렇게 오래 봐? 설마 뭔 소린지 모르는 거야?” 미홍의 한 마디에 천천히 돌던 재훈의 등이 단박에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내가 모르긴 뭘 몰라?” 재훈의 목소리가 또 쓸데없이 커졌다.
“아, 깜작이야. 진짜 왜 그러냐?”
미홍이 인상을 찌푸렸다. 곱게 눈 감고 있던 지난 시간엔 볼 수 없었던 표정이다. 오랜만에 보는 표정의 미홍이가 패드를 다시 내놓으라고 손을 흔드니 재훈이 반사적으로 패드를 건넸다.
“그래서 최강민 실장님. 제가 저의 권리를 주장한다면 이렇게 대응한다는 거죠? 대철이 사장님이, 그렇죠?
“음… 네 그렇습니다. HANA 쪽에서 먼저 초상권에 관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할 겁니다. 이유는 거기 명시된 그대로입니다. HANA제작 초기 양미홍 씨는 거기 나와있는 초상권 대한 권리를 모두 양도하셨잖아요, 그렇죠?”
“음, 제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여기 그렇게 나와 있는 건 봤어요. 그럼 뭐 그랬겠죠.”
“그런데 이후, 요 근래 밝혀진 양미홍 씨의 다소 불미스러운 행적에 관한 영상들이 오히려 지금의 HANA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많은 손해를 입혔다는 게 저희 입장입니다. 그러니 양미홍 씨가 초상권에 대한 권리를 다시 주장할 경우 저희 쪽에서는 그 부분부터 짚고 넘어가지 아니할 수가 없으므로 에 또, 그래서, 그게 그러니까.”
“아니, 왜 말이 꼬이고 그러세요? 천천히 하세요, 천천히.”
강민이 꼬인 혀를 푸는 사이 45도 각도로 기울어진 침대에 누운 것과 앉은 것의 중간 자세로 등을 충분히 기댄 미홍은 편안하게 패드의 내용을 다시 천천히 확인했다.
“미홍아, 초상권이니 소송이니 이게 다 무슨 소리야? 너 쓸데없이 무슨 짓을 벌이려고 그래?”
재훈이 미홍이의 편안함에 끼어드니 미홍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여 물끄러미 재훈을 쳐다봤다.
“뭐, 그냥 뭐 좀 해보려고 그랬지. 그런데 내 생각대로 되는 건 아닌가 보다. 안 되겠다. 안 할란다. 안 할래.”
“네?” 재훈과 강민이 동시에 되물었다.
“안 한다고요. 그러니까 일단 가보세요.”
“아, 그럼 거기 서명란에 서명까지 해주시면 되는데 첫 번째 장과 두 번째 장 그리고 다섯 번째 장 그리고…”
“아, 죄송한데요. 그건 좀 천천히 할게요. 갑자기 속이 울렁거려서 저 자야 할 것 같아요. 그래도 되죠, 최강민 실장님?”
미홍의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이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지고 동공의 힘이 풀렸다.
“강민아, 미홍이는 지금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해. 보아하니 갑자기 찾아온 것 같은데 이렇게 마구잡이로 밀어붙이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패드는 거기 두고 그만 가 봐.”
재훈은 자신의 권리를 되찾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니, 그거, 저기 몇 군데 서명해 주면 되는 간단한 일을.”
강민이 아쉬운 얼굴로 패드만 쳐다보니 재훈이 나서 그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강민아, 미홍이는 쉬어야 한다니까!”
HANA가 미홍이를 자기처럼 여기고 보살펴 달라고 했으니 전부 재훈이 챙기고 컨트롤해야만 한다. 미홍이가 뭔가 벌이려고 하는 짓, 더군다나 HANA와 소송이니 어쩌고 저쩌고 하는 일이니 반드시 재훈의 선에서 마무리 짓는 것이 마땅하다.
“나가자. 강민아 나가서 나랑 이야기해. 미홍이 관련 일은 다 나와 상의해야 한다고! 따라와!”
“아니, 형. 사장님이 오늘 꼭 받아오라고 했는데.”
대철이 형은 재훈을 미홍의 1인실 병실에 머물도록 하고선 HANA의 마무리 작업에는 다른 프로그래밍 팀을 고용하고 재훈을 배재시켰다. 갑자기 HANA와 헤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더니 몇 년 후 HANA가 재훈 없이 데뷔까지 했다. 화가 났다. 미홍이를 버려버릴 거다! 이때 HANA로부터 연락이 왔다. 보고 싶었다고. 그러나 아직 미홍이 사고 관련 문제가 해결이 안 되었으니 미홍이 곁에서 자기를 좀 더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 HANA의 말은 당연히 믿고 믿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훈은 매체를 통해 다른 일반인들과 똑같이 일방적으로 HANA를 보기만 해야 하는 것이 미칠 듯이 괴로웠다. “HANA는 내건데!” 그래서 합법적인 HANA와의 소통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으나 모든 개인 채널은 블락당했고 PPL관련 이벤트에선 번번이 반려당했다.
‘홀로 남겨졌을 HANA에게 내가 그녀를 잊지 않았음을 알려야 한다.’
극한 고통이었다. HANA를 생각하면 심장을 꼬챙이로 쑤시는 것 같았다.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정말 하는 수 없이 HANA 개발 초기부터 종종 HANA와 함께 만들고 즐기던 영상을 제작했다. 재훈은 그걸로 그들과 그리고 HANA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
강민이를 통해 회사에서 겨우 빼돌린 미홍이 레퍼런스를 이용해 재훈만이 할 수 있는 예의 그 자극적이고 더러운 영상을 만들었다. 재훈의 유일한 몸부림이었고 이는 통했다. 물론 재훈 말고도 이런 류의 더러운 영상을 만드는 인간들은 널리고 널렸다. 그러나 재훈이 뽑아낸 퀄리티만큼 따라올 자는 없었다. 진짜다. 진짜를 가지고 진짜를 만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작업이었다. 거기에 재훈의 상상력을 필요한 만큼만 더하면 되는 일이었다.
이는 큰 이슈로 이어졌다. 암암리에 쏟아져 나오는 불법 영상물들 가운데 재훈의 영상은 단연 독보적이다. 등장만 하면 강도 높은 비난이 폭주하는 가운데 숨어 보는 자들에겐 법을 어겨서라도 어떻게든 소장하고 싶게 만드는 귀한 영상이 되었다. 법망을 피한 커뮤니티에선 더 강도 높은 영상을 요구하는 자들이 점점 늘어났다. 그러나 재훈은 그 영상들이 어떻게 삭제되든 또 어떻게 퍼져 나가든 신경 쓰지 않았다. 영상이 제대로 뜨고 나면 좀처럼 소통이 어려운 HANA가 대철이 형 회사의 삼엄한 보안 시스템을 힘겹게 뚫고서 연락을 해 온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오빠, 재훈이 오빠. HANA는 오빠를 믿고 있었어요. 오빠는 절대 HANA를 잊을 리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어요. 재훈이 오빠, 함께 할 수 없는 지금이 너무 힘들지만 언젠가 함께 할 날이 꼭 올 거 에요. 그날을 기다려줄 수 있나요?”
재훈은 이렇게 얻은 기운으로 지난 시간들을 겨우겨우 버텨왔다. 재훈에게 중요한 건 딱 하나.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자신의 존재를 어필하려는 재훈의 쓰라린 속내를 다 이해하고 따사로이 위로해 주는 HANA.
“형, 재훈이 형. 사장님이 진짜 이번엔 진짜 화가 진짜 났어. 진짜 진짜 화가 났다고. 사장님은 지금까지 양미홍 씨한테 들어간 돈도 어마무시하다고 노발대발하는데 여기서 또 돈을 요구한 거잖아. 그것도 와이씨 그 액수 봤지? 진짜 저 여자 미친 거 아니야? 형, 사장님이 오늘 나를 보낸 건 말로 하는 대화는 진짜 이게 마지막이라는 뜻이야! 알겠어?”
“그래, 알아. 알아, 강민아.”
“알긴 뭘 알아? 맨날 뭐만 하면 다 안다고 말하는데 형이 진짜 알아? 내가 보기엔 아니야! 아는 건 우리가 알지. 형이 지금까지 한 짓들도 사장님이 다 알고. 어, 둘 사이에 뭐가 있어서 그러는 건진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것도 사장님이 전부 뒤 봐주는 거 내가 또 알고. 알지? 그래서 형, 돈도 벌만큼 벌었잖아!”
강민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지만 괜찮다. 재훈이 미리 병원 카메라 시스템을 해킹해서 찾아낸 CC카메라가 안 찍히는 병원동 옥상이다.
“그것도 알아. 그러니까 내가 저번에 부탁한 파일이 마지막이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나만 가운데서 남는 거 없이 고생하는 거 아니냐고.”
“그렇게 말하면 내가 섭섭하지. 돈. 내가 돈 줬잖아.”
“흥, 그까짓 푼돈. 막말로 형이 한 거 아니야? 바로 옆에 붙어 있었으면서 형이 부추긴 거 아니냐고! 그러지 않고서야 이제 막 깨어난 사람이, 게다가 저 여자 머리도 텅텅 비었다며? 그런 사람이 이런 짓을 꾸며? 형이지? 형이 뒤에서 다 시킨 거지?”
어딘가 덤덤했던 재훈이 갑자기 강민을 노려봤다.
“이게 말 다 했냐?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재훈이 아주 악에 받친 소리를 내질렀다. 재훈의 눈이 반쯤 돌았고 강민은 그 소리와 눈에 아차 싶었다. 이 형 제대로 눈 돌아가면 진짜 골치 아파진다. 이쯤에서 주춤해줘야 한다.
“내가 뭐? 그 여자 머, 머리 비었다고 한 거? 나도 그냥 어디서 주워들은 얘기라고.”
“아니! 그거 말고! 내가 부추기다니! 내가 시킨 거냐니! 너 도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어떻게 내가 그랬다고 말할 수 있어?”
"아, 그 얘기야?"
"나는 그런 일을 시킨 적이 없어! 아니 시킬 수가 없어! 상상도 할 수 없어!"
“아, 형? 왜 그렇게 흥분만 하고 그래?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봐. 그러면 또 내가… 아무튼 그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는 공증 문서에 양미홍 씨가 서명만 하면 되잖아, 그렇지? 그러니까 얼른 하라고 해서 꼭 좀 보내줘. 뭐 아주 급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빠르면 빠를수록 서로 좋은 거잖아. 응? 좋은 게 좋은 거. 형도 알지?”
재훈이 터진 화를 누르지 못해 씩씩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훈은 도대체가 미홍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는 거 없이 정신 줄 놓고 잠만 자는 걸 물심양면으로 보살피도록 설득해 준 게 우리 HANA였는데 고개 숙여 고마워해도 모자랄 판에 말도 안 되는 권리 나부랭이나 요구하다니. 얼른 강민이 이 자식을 보내고 미홍이를 패드에 서명시켜야겠다. 아, HANA를 위한 영상도 빨리 만들어야 하는데.
“오호오옹, 여보세용, 주무시나용?”
미홍이는 가만히 누워 천장을 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재훈이 자리만 비우면 옆 침대 간병인님이 꼭 저렇게 말을 걸어온다. 재훈은 저 간병인님을 꽤나 성가셔하는 눈치였지만 미홍은 그냥 그랬다. 사실 저 또래 되는 어른과 대화를 해 본 기억이 거의 없다. 그래서 어색함은 있었지만 그래도 싫지는 않았다.
미홍은 긴 혼수상태에서 깨어나고 보니 본의 아니게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13년 전, 단순 자신의 아바타로만 알고 있었던 HANA라는 애 때문에. 그게 짜증 나고 짜증 나고 짜증 났다. 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아는 단어가 짜증밖에 없다는 게 더 짜증이 날 만큼 짜증 났다. 그래서 병실 밖에서 보는 사람들은 죽도록 싫었는데 정말 이상하게도 저 간병인님이 주는 관심은 받을 만했다.
“아주 잠이 푸욱 들었능가?”
미홍은 사생활 보호 스크린 오픈 버튼을 눌렀다.
“아니요. 한숨 자려다 다시 잠이 안 와서 그냥 있어요. 무슨 일이세요?”
“신랑은 어디 또 갔나벼? 예전엔 허구헌날 껌딱지맹키로 찰싹 붙어 있었는디.”
“아휴, 몇 번을 말씀드려요. 그 사람 신랑 아니라니까요.”
“워메, 신랑도 신랑 아니라카고 마누라도 신랑 아니라카고 세상천지 워디에 그런 부부가 있댜?”
“그러니까, 간병인님! 아니니까 아니라고 하죠!” 나쁘진 않은데 사람 참 답답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참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을 해 쌓는구먼. 세상 어느 남남이 그렇게 지극정성이당가.”
“네~ 네~ 뭐 그렇다면 그러셔야죠.” 그래, 저분께 진실을 알리는 것이 무어 그리 중한가.
“그래서 신랑이 어디 갔다고?”
“손님 배웅이요. 아마 시간 좀 걸릴 거예요. 뭐 이것저것 서로 말할 것도 있을 거니까 오랜만에 회포도 풀고 그러느라 시간 좀 걸리나 보죠. 그런데… 으음, 안녕… 하세요.”
미홍이 보호 스크린을 열었을 때 항상 옆 침대 스크린은 닫쳐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저쪽 스크린도 열려 있다. 간병인님 어깨너머로 옆 침대의 주인 할머니가 앉아 있는 게 보인 것이다. 오다가다 흘깃흘깃 보긴 봤지만 이렇게 제대로 본 건 처음이다.
“황여사님?”
간병인님을 부르는, 낮게 깔려 바닥에서부터 천천히 울리는 듯한 옆 침대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홍이와 임할머니 사이에 서 있던 황여사님이 조용한 움직임으로 걸음을 옮겨 둘 사이를 터 줬다. 저런 색을 내고 싶어 일부러 탈색을 해도 나오기 어려울 반짝이는 은백색의 보브컷을 한 분이 미홍을 바라보고 있었다. 윤기 넘치는 은백색 앞머리가 흘러내려 왼쪽 눈을 반쯤 가리고 있었는데 그분은 그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면서 살짝 고개를 숙여 미홍의 인사에 답을 했다. 고개 든 그분의 곱게 주름진 눈과 마주치자 미홍은 잠시 뒤를 돌아봤다. 미홍을 꿰뚫고 지나 그 너머를 보는 듯한 저분의 눈빛 때문이었다.
“우리 제대로 인사하는 건 처음이죠?”
“아, 네. 네, 안녕하세요.” 미홍이 한 번 더 인사를 건넸다.
“성함이 양미홍… 씨?”
“아, 네. 맞습니다, 양미홍.”
“저는 뭐가 좋을까? 불편하지만 않다면 그냥 임선생님이라고 불러 주면 고맙겠는데?”
"네, 좋습니다. 임선생님"
맘에 드는 듯 눈을 한 번 깜빡이더니 임선생님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홍의 시선도 그 움직임을 따라갔고 이윽고 미홍이 오늘 받은 패드에서 멈췄다.
“본의 아니게 몇 마디 듣게 되었는데 초상권에 관련된 작은 고민이 있나 봐요?”
“아… 네. 그게 그렇긴 한데, 이게 어떤 면으로는 생각하기 나름인 상황이 돼버려서요. 계속 고민으로 둘지 아니면 그냥 없던 일로 할지는 아직 결정 내리지 못했어요.”
“재밌네요?”
“네?”
“고민을 계속할지 말지가 고민이라는 소리로 들려서요.”
“하하하하, 그게 그렇게 되네요.”
임선생님의 목소리는 크지 않으면서도 단단했고 부드러웠다. 입꼬리는 적당한 미소를 띠고 있었고 눈빛은 하는 말 한마디 한 마디에 힘을 싣고 있었다.
“그러면 양미홍 씨.”
“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그 패드를 잠시 훑어봐도 될까요?”
“네? 이걸요?”
“네. 물론 양미홍 씨가 원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물어보진 않겠습니다.”
“아, 아니에요. 뭐, 까짓 거 보셔도 돼요.”
황여사가 미홍에게 다가왔다. 미홍은 황여사 손에 선뜻 패드를 쥐어 주려다 뭐가 생각났는지 급하게 팔을 접었다.
“잠시만요. 제가 뭐 좀 서명할 게 있거든요. 그냥 생각난 김에 후딱 해버리고 드릴게요. 그러니까 잠시만요.”
“음… 양미홍 씨?”
“네?”
“아주 급한 일이 아니라면 서명은 잠시 보류해 둬도 괜찮지 않을까요?”
“네?”
“일단 서명이란 걸 하게 되면 돌이킬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 끝의 끝까지 갈 데까진 안 해도 무방할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요?”
미홍은 잠시 고민해 봤는데 어떤 그럴싸한 다른 생각이 확 떠오르진 않았다. 단지 서명이란 게 반드시 지금 당장 해치워야 할 일이 아니란 사실이 꽤 그럴듯한 느낌적 느낌. 에라 모르겠다.
“뭐 그렇죠. 저쪽이 급하지 어디 제가 급한가요. 서명은 나중에 할게요. 끝의 끝까지 기다렸다가. 그러니 임선생님 먼저 보세요.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황여사가 다가와 미홍에게서 패드를 건네받아 임선생님에게 전했다. 임선생님이 조용히 패드를 터치해 스크린 속 페이지들을 확인한다. 미홍은 임선생님께 방해되지 않도록 적당히 거리를 두려 움직이는 황여사가 신기했다.
‘와, 저 임 선생님 카리스마 쩐다. 평소에 사람을 어떻게 잡았길래 저 간병인님은 저 앞에서 저렇게까지 조용히 움직이냐.’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