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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과 르네상스가 만났을 때

음악도 개혁됩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큰 사건은 1517년 마틴 루터(1483-1546)의 종교개혁이었지요. 

당시 무리한 교회 건축을 하며 면죄부를 팔던 교회에 대해 반발한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은 기성 교회에 대한 반감을 가진 몇몇 왕들이 루터를 지지하면서 가톨릭을 믿는 구교의 나라들과 새로운 종교개혁을 받아들이는 신교의 나라들로 갈리게 되지요. 

사실 루터 목사님이 원하던 것은 개혁이었지 편 가르기는 아니었지만, 가톨릭교를 수호하는 신성로마제국을 경계하는 나라들이 옳다구나 하고 전쟁을 시작했지요. 게다가, 이 틈을 타서 여러 가지 박해를 받아 스위스로 이주를 했던 이주민들이 츠빙글러(1484-1531)와 칼뱅(1509-1564)의 지도하에 가톨릭으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했고, 영국은 헨리 8세(1491-1547)가 자신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교황에 맞서 성공회를 탄생시켰지요. 


헨리 8세와 6명의 왕비들


이 시점부터 우리가 아는 교회와 성당이 갈라집니다. 그러니까, 1517년 이전에는 교회는 없고 모두가 다 가톨릭 교인이었고, 성모 마리아께 기도 하고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했단 말이지요(교회에서는 하나님 말고 다른 신-성모 마리아도 다른 신이래요-을 숭배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럼 1517년 이전 사람들은 성모 마리아 동상에 기도하고 그래서 천국 아무도 못 간 것인지, 전 언제나 이 부분 공부할 때면 그게 제일 궁금해요). 성경이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자국어)로 번역이 허락된 게 이때가 처음이니까, 1443년에 한글을 창제한 우리나라에 만약 천주교가 들어왔다면, 우리는 한글도, 중국어도 아닌, 라틴어로 성경을 읽고 쓰고 했었어야 한다는 코미디 같은 상황이 생겼겠지요.


     

성모 마리아상


새로 생긴 교회의 교인들(이제부터 신교도들이라고 불러요)도 자신들만의 음악이 필요했겠지요? 급히 가톨릭과는 결이 다른 종교 음악을 만들기 위해, 다음의 세 가지 방법으로 코랄이라 불리는 신교도들만의 음악을 만들어 냈어요. 


1. 새로운 가락 작곡(루터 포함)

2. 가톨릭 미사에서 빌림 

3. 종교적-세속적 민요, 멜로디와 가사의 편집


이와 같이 하여 새로운 목적에 맞도록 개편되고, 작곡된 코랄의 가락은 단순하고 명쾌하여 힘찬 리듬을 지니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단순 가락의 형태로 유니즌으로 불렀으나, 점점 더 발전해 코랄의 멜로디를 소프라노에 두고 다른 파트가 여기에 단순한 화성을 곁들이도록 하는 유형이 대표적 코랄 형식으로 자리매김하지요. 

이러한 코랄의 작곡가로는 루터의 친구이며 협력자였던 요한 발터(1496-1570)와 오지 안 더(1534-1604), 허슬러(1564-1612) 등을 들 수 있어요. 물론 루터도 많은 코랄 멜로디를 작곡했고요. 

프로테스탄트의 코랄은 훗날 고도의 예술적 작품의 기초로 쓰이게 되며, 이를 코랄 편곡이라 하지요.

그 발전에 공헌한 프레트리우스(1571-1621)에서 바흐에 이르기까지 독일 하면 코랄 하고 떠올리게 되지요.  

심지어 베토벤 까지도 코랄 편곡과 멜로디를 빌려 쓰게 되지요.     




 이탈리아는 신성로마제국의 비호 아래 가톨릭 국가로 남게 됩니다. 

교황청이 아직도 로마에 있는 것은 알고 계시지요? 

저는 유럽이라는 곳을 이해하는데 참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어떻게 로마에 있는 교황청이 로마의 행정법의 영향을 받지 않고 그 자체의 나라로서 남아 있을 수 있는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나라들이 있었는지, 

왜 그렇게 많은 전쟁들이 있었는지, 

머릿속에 남한과 북한, 미국과 소련이라는 4개국밖에 들어있지 않던 저에게 

음악사 공부는 무척 힘든 일이었어요.

하지만 음악사는 특히 중세를 지나 르네상스를 오면 저 말고 다른 나라 학생들도 다들 헤매는 것을 보면 

이때의 역사가 복잡했던 것은 사실인가 봐요.

르네상스 전통의 계승

종교 개혁의 물결에서 르네상스의 전통을 이어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가톨릭 교회였어요. 

르네상스 마지막 시대 교회음악을 쓴 팔레스트리나(1525-1594)와 오를란도 드 라소가 그 주인공이지요.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외국 사람들은 자기 성 대신 출신지 이름을 붙여 불렀다는 것이에요.  

예를 들자면, 우리나라에서도 전주댁, 광주댁, 이렇게 여자에게 이름 없이 출신지역을 붙여 부르던 것과 같이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배운 대부분의 이름이 지역 이름인 경우가 많아요.

팔레스트리나도 피에르우이지 라는 성이 따로 있는데 팔레스트리나 출신이라 팔레스트리나로 알려졌다네요.  팔레스트리나는 이탈리아 로마 근교의 작은 도시로 이 지역 출신인 팔레스트리나는

평생을 로마의 교회 주변서 성가대 소년 합창단원으로, 지휘자로, 작곡가로 살아간 독실한 가톨릭 교인이었다 하네요


팔레스트리나


한참을 종교 개혁의 붐에서 로마 교회가 시달리고 있었을 때 활동했던 팔레스트리나는 종교개혁에 대응하고자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4)에 의하여 지향된 반종교개혁의 형식을 반영한 종교음악을 많이 작곡했어요. 그래서, 팔레스트리나는 아르스 노바 스타일의 새로운 스타일이 아닌 아르스 안티쿠아 스타일의 옛날 복고풍의 스타일로 가톨릭 미사곡들을 썼다 하네요. 

이거 마치 내가 집이 싫어서 아무리 가출 시도를 해도, 누가 와서 집을 부수어 버리려고 하면,  죽을힘을 다해 지키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 아닐까요? 

그래서 신앙심이 그다지 없고 막 새로운 스타일을 받아들이고 싶던 로마의 음악가들도 신앙심이 불타올라 옛 전통을 지킨 거 아니겠어요? 청개구리 마인드라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인지,

팔레스트리나의 음악은 당시의 경향에 따라 1 음표 대 1 음표라는 호모포닉 화성 구조를 취하고는 있지만,  그 기본은 항상 다성 적인 것에 두고 있어 베네치아악파에서 볼 수 있는 극적인 표현을 목표로 한 반음계적 진행이나 불협음 등은 되도록 피하고, 보다 자연스러운 음의 움직임과 전체 음의 경쾌한 울림을 따라갔지요.  

이렇게 그의 음악은 새로운 표현이나 양식을 개척함이 없이 성악적인 폴리포니의 전통을 지켜 순수하고 숭고한 종교적 음악을 작곡하려고 노력했다고나 할까요?      

팔레스트리나의 미사는 대부분 성가 선율을 사용하였지요. 

하지만, 팔레스트리나는 당시의 작곡기법을 모두 사용하여 여러 유형의 미사를 작곡했어요.  

현존하는 그의 미사 중 모테트를 인용하여 작곡한 패러디 미사가 53개인데 이 모테트들은 대부분 성가에 기초한 것들이긴 했지요.

또한 성가나 세속 선율을 변형하여 사용한 변형 미사도 서른다섯개 있으며, 그중 열한개는 그레고리오 성가가 아닌 다른 평성가를 변형한 거라고 음악사 책에 길게 설명되어 있어요.  

또, 일곱개의 정선율 미사는 세속 선율을 사용한 미사 <무장한 남자>와 6 음음계를 사용한 미사 <웃레미파 솔라>를 제외하고는 모두 그레고리오 성가를 정선율로 사용하였다 하네요. 

또한 미사 <카논>과 같이 카논 기법을 사용한 미사가 다섯 개이고, 미사 <마르첼 라우스 교황님>과 같이 자유롭게 작곡된 것도 여섯곡 있다고 외워 놓으면 유식해 보이는데 도움이 되고요, 

혹시 음악사 시험 치시는 분들은 시험에 자주 출제되는 문제들이에요-주로 객관식으로요.  

되도록 원어로 외우시면, 나중에 대학원 외국으로 갈 때 큰 도움이 되지요.     

팔레스트리나의 400여 개의 모테트 중 2/3 정도가 4-5 성부이고 나머지 곡들은 8-12 성부이지요.  

가사는 대부분 안티폰 또는 응답 성가(Responsorium)에 기초하였으며, 

선율은 거의 그가 작곡했고,  카논과 같은 인위적인 기법에 의해 곡을 구성하지도 않았어요. 

그의 곡들은 순수한 음악적 설계에 의하거나 가사의 내용에 따라 자유롭게 작곡되었기 때문에 

대부분 모방 대위적인 기법을 사용했다는 것 이상의 공통성은 찾아볼 수 없이 그 형태가 매우 다양해서, 특징을 짓기가 무척 힘들지요.  

그의 4성 모테트는 전통적인 성부 진행과 음정 구조, 서로 잘 융합되는 성부, 그리고 세심하게 억제된 불협화음 등 르네상스 다성음악의 표본이라고 볼 수 있어요. 

팔레스트리나 양식은 플랑드르악파의 다성음악 전통을 더욱 세련되게 만든 양식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래서, 그와 그의 제자들 음악은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유럽의 많은 사람들에게 성스러운 음악으로 느껴지는 구양식(stile antico)의 표본으로 많은 종교음악 작곡가들의 모방 대상이 되었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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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도, 르네상스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곡가는 독일서 활동을 했어요.

오를란도 디 라소는 플랑드르에서 태어나 플랑드르악파의 영향을 받고, 뮌헨과 로마에서 활동을 했어요.  

뮌헨은 독일의 남단, 바이에른의 주 도시이기는 하지만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이 집권을 했으니, 독일이어도 독일이 아니었지요.

 그래서 라소는 가톨릭 음악을 작곡하지요.  

여기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인데요, 로마는 이탈리아에 있는데 로마의 왕은 신성 로마제국의 왕이기에 독일에 있었다는 거지요. 

그래서 서양 음악과 종교와 역사는 늘 같이 공부하지 않으면 이해 하기가 좀 힘들어요.


오를란도 디 라소(1532-1594)

라소는 팔레스트리나와 함께 16세기 르네상스 음악 가톨릭 음악의 최대 거장으로 불려요. 

1556년 이후 뮌헨에서 활약하였으며, 2천 곡이 넘는 종교곡과 세속 곡을 쓰셨으며, 

그 가운데서도 모테트는 가사의 정확한 표현과 음악의 내면적 표현을 가시화함으로 역사상 인정받게 되지요. 세속 곡으로는 독일어의 리트, 프랑스어의 샹송, 이탈리아어의 마드리갈 등

각국어로 된 작품을 써서 국제적인 성향을 나타냄과 동시에 

플랑드르악파의 폴리포니 기법을 기초로 하여 음악과 언어의 밀접한 결부와 극적인 표현력, 색채적인 하모니 기법 등으로, 다음 세대인 바로크 음악을 예고했어요. 

그의 제자들 중에서는 새로운 음악의 개척자들이 나타났으며, 

특히 베네치아악파의 조카 지오반니 가브리엘리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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