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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D Aslan Mar 23. 2021

전공의 일기

브런치북 출간용 편집. 30~최종

30화

CT에도 이상소견은 보이지 않았고, 수술 후 상당한 시간이 지났지만, 할아버지의 장마비 증상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가스가 배출되고 소량의 변을 보았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가스의 배출은 장 운동이 돌아오고 있는 신호로 해석하기 때문에 식이를 진행할 수 있다고 판단하게 되지만, 장을 수술한 환자의 경우라면, 복부 X-ray의 호전 상황을 면밀히 확인해 식이 진행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할아버지의 경우에는 복부의 가스가 아직 정상적인 형태로는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점차 힘들어하고 비위관(콧줄)으로 인한 불편감을 상당히 많이 호소하였기 때문에, 적절한 시기에 비위관 제거 여부를 결정하고, 식사 진행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중요했다. 

 

 정성스럽게 간병을 하던 보호자들도 시간이 지나고 호전이 없는 상황이 반복되자 지쳐갔다. 생업을 뒤로하고 간병에 매달렸지만, 확연한 진전이 없었고 나날이 날카로워지는 할아버지의 가시 돋친 언행들이 보호자들을 지치게 했다. 그래도 담당의라고 나에게는 비교적 온화한 단어를 논리적으로 나열하여 자신의 고충을 토로하셨지만, 보호자에게는 그러지 못한 모양이었다.  

 

"할아버지. 저랑 약속 하나 하실까요?" 

 

"이선생 무슨 약속? 그런 거 말고 어서 이것 좀 빼줘. 아파 죽겠어" 

 

"알았어요. 그거 빼 드릴 테니까 저랑 약속하시자고요." 

 

"그려 뭘 약속할까? 이거 좀 빨리 빼줘" 

 

"콧줄을 뺀다고 해서 바로 식사를 하실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아시겠죠? 먼저 물부터 조금씩 시작할 겁니다. 소량씩 목을 축일 수 있을 정도만 드셔야 해요." 

 

"알았어 그럴게...... 이제 빼줘" 

 

"하나 더 남았어요. 일단 콧 줄은 뺀다고 해서 장이 좋아진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지금처럼 운동을 계속하셔야 해요."  

 

"알았어 빨리 빼줘. 답답해" 

 

"약속한다고 하시면 지금 빼 드릴게요." 

 

"알았어 알았어 약속할게." 

 

"누워 보세요. 고개를 편하게 하시고요" 

 

"으으윽..." 

 

"이제 다 빠졌어요. 다 됐어요 이제" 

 

할아버지의 코를 통해 위로 들어가 있던 70cm의 기다란 콧줄이 밖으로 형체를 드러냈다.  

 

"아고고 깊이도 들어가 있네. 이제야 살겠다. 살겠어. 고마워 이선생" 

 

"저랑 약속하신 거 잊지 마세요. 운동하셔야 합니다. 물은 소량씩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알았어 고마워"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할아버지를 보며 잠시 기분이 나아졌지만, 금세 장마비가 악화되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다행히 비위관을 제거한 뒤에도 할아버지의 상태는 나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물을 조금씩 마시게 되면서 가스 배출도 원활해지고, 장의 가스 패턴도 호전되는 것으로 보였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식사를 미음으로 바꾸게 되었고, 미음을 섭취한 지 3일이 지나서는 죽을 드셔도 될 정도로 호전이 되었다. 혈액검사는 호전되어 정상 수준으로 측정되었고, 발열이나 통증도 없었다.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게 된 것이 분명했다. 이제는 퇴원을 준비할 시기가 되었다. 수술 후 몸속에 거치되어 체액 성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던 배액관들도 제거가 되었고, 상처는 잘 아물어 실밥을 모두 제거했다. 

 

 

"오늘 기분은 좀 어떠세요?" 

 

식사를 하던 할아버지에게 안부를 물었다.  

 

"응? 이선생 왔어? 밥맛도 좋고, 다 좋아. 나 이제 집에 가도 되는 거야?" 

 

"네. 이제 퇴원하실 준비를 하셔야겠어요" 

 

"그래? 언제쯤 퇴원할까? 가족들이 나 때문에 고생하는 걸 보니까 퇴원을 좀 빨리하고 싶어. 몸도 좋아졌고, 할망구 혼자 있는데 걱정이 돼서 빨리 가야겠다 싶어" 

 

"내일쯤 퇴원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그려. 마침 큰아들이 내일 온다고 하니까 내일 가면 되겠네. 이선생. 수술하면서 검사한 거 결과 나왔어? 어때?" 

 

"내일 보호자분 오시면 같이 설명드리겠습니다. 예상했던 결과가 나왔어요. 퇴원하신다고 다 끝난 게 아니라는 건 알고 계신 거죠?" 

 

"무섭게 또 이러네. 결과가 별로야?" 

 

"아니에요. 예상했던 결과가 나왔어요." 

 

"예상했던 결과면 나쁜 거 아녀?" 

 

"내일 설명드릴게요. 오늘은 일단 식사하시고, 창밖에 한강 경치 좀 실컷 구경하셔요" 

 

"이제 너무 봐서 지겨워. 내일 아들 몇 시에 오라고 할까?" 

 

"오전 회진시간 맞춰서 오실 수 있으시겠어요? 8시 정도가 좋겠는데" 

 

"그려 오라고 하지 뭐, 서울이니까 금방 올 수 있을 거야"

 

"네, 내일 설명드리겠습니다. 푹 쉬시고요. 병원에서 마지막 밤이니까 꿈도 꾸지 말고 푹 주무세요" 

 

"그려 이선생 내일 봐"      



31화


 오랜 시간 동안 마음의 짐으로 남았던 할아버지가 드디어 퇴원을 맞이하게 되었다. 큰 수술을 한두 번 받아보냐며 큰소리치시던 자신만만한 할아버지의 모습과 수술 후 아프다며 투정을 부리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묘하게 오버랩되며 미소를 짓게 했다. 이런 여유가 생긴 것은 할아버지의 수술 후 경과가 좋아서일 것이다. 그토록 마음 졸이게 했던 수술 후 장마비 증상도 씻은 듯 사라졌고, 특별한 이상 증상 없이 할아버지는 오늘을 맞이했다. 


 약속했던 오전 회진시간이 다가오고, 차트를 다시 한번 꼼꼼하게 챙겼다. 아직 할아버지의 몸에는 정체를 확인하지 못한 작은 덩어리가 자리 잡고 있다. 조직검사 결과는 예상한 것처럼 방광 내 육종으로 판명되었다. 방광의 육종은 그 자체가 희귀할 뿐 아니라, 상당한 속도로 성장하고 전이가 되기 때문에 그다지 만족스러운 결과는 아니었다. 하지만, 정체가 불분명한 간의 작은 결절을 제외하면 현재 수술 후 상태는 매우 좋았기에 할아버지의 일상생활은 회복될 것이 분명했다.  


"밤에 잠은 잘 주무셨어요? 오늘이 마지막 아침인사가 되겠네요." 


"이선생 왔어? 이제 여기는 그만 올래. 아주 징글징글 혀."  


"안녕하세요 선생님" 


"아침 일찍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오늘이 할아버지 퇴원 날이기도 하고, 가족분들께 현재 할아버지의 상태에 대해 알려드려야 해서 모시게 되었습니다." 


"괜찮습니다. 항상 저희 아버지를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별말씀을요.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물론 할아버지가 엄살만 조금 덜 부리셨어도 조금 덜 힘들었을 것 같긴 하네요" 


"에이 이선생 내가 무슨 엄살을 부렸다고 그래. 진짜 아팠어. 다른 수술하고는 차원이 다르더라고." 


"알아요. 오늘 퇴원하신다니까 저도 기분이 좋아서 농담 한번 해봤습니다." 


"그려, 고생 많았어 이선생" 


"저희 아버지 조직검사 결과는 어떻게 나왔나요?" 


"일단은 수술적 절제를 시행한 부위에서는 암세포가 발견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말은 수술이 아주 깔끔히 잘 끝났다는 것을 의미해요." 


"잘됐네요! 그러면 저희 아버지 항암치료는 필요가 없는 건가요?" 


"현재로써는 그렇습니다. 물론 간에서 확인되는 작은 결절이 마음을 조금 무겁게 하기는 하지만. 현재로서는 수술이 깔끔히 끝났으니 부담을 덜어내셔도 될 것 같습니다." 


"간에 있는 결절 말고 다른 곳에서는 전이가 없다는 말씀이시죠?" 


"현재 검사한 결과로는 그렇습니다. 물론 저희가 시행한 CT의 경우에는 4mm 간격으로 영상을 얻어내기 때문에 그보다 작은 결절들은 발견이 되지 않는 경우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건 의심을 위한 의심일 경우에 의미가 있는 것이고요. 현재 할아버지의 상태는 괜찮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간에 있는 결절은 어떻게 되나요? 전처럼 매달 와서 검사를 받으셔야 하는 건가요?" 


"아니요. 그렇지는 않고요. 퇴원하시고 경과가 괜찮으신지 2주 정도 뒤에 외래에 내원하시고, 그 이후에는 3개월에 한 번씩 영상검사가 진행될 거예요. 예약해 드린 시간에 꼭 오셔서 검사를 받으셔야 합니다. 수술하고 괜찮다고 안 오시고 하다 보면, 중요한 순간을 그냥 넘어가는 일이 생겨요." 


"제가 꼭 챙기겠습니다. 그럼 2주 뒤에 오시면 되는 거죠?"  


"네. 외래에서 간단한 혈액검사와 소변검사를 진행하게 될 겁니다." 


"오전에 검사하시고, 오후에 교수님 외래에서 결과 확인하시면 됩니다." 


"그려 알겠어 이선생. 항상 고마워. 이번에도 전화번호 안줄텨?" 


"제 전화번호가 워낙 비싸서요. 안드릴랍니다." 


"그럴 줄 알았어 내가. 그러면 여기 내 전화번호 다시 남길 테니까 나중에라도 연락해. 이선생 밥 한 끼 사줘야겠어 내가" 


"건강해지셔서 퇴원해주시는데 제가 대접해야죠. 말씀만이라도 감사해요. 이제는 절대! 다시는 입원하지 마세요! " 


"나도 안 하고 싶지. 이제 안 할려. 지겨워 죽겄어 아주" 


" 잠깐만 계세요. 조금 있으면, 교수님 회진 나오실 시간이에요" 


"그려, 이선생 가봐" 


 할아버지와의 작별이 아쉬웠는지 상당히 긴 시간 동안 병실을 벗어나지 못했다. 혈뇨로 응급실에서 만난 할아버지와의 인연이 이렇게나 소중하게 될 줄은 생각지 못했었다. 수더분한 인상의 중절모 할아버지가 밝은 얼굴로 퇴원을 준비하시는 모습을 보니 그렇게 감사하고, 행복할 수 없다.


아침 햇살이 잘게 부서지는 한강을 배경으로, 할아버지는 밝은 얼굴을 남기곤 퇴원을 하셨다. 



32화


계절이 바뀌어 세상에 가을이 내렸다. 

 


높은 하늘,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날, 나는 강릉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매 석 달마다 찾아오는 파견을 앞둔 때면,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짧아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새로운 환경에서 환자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뒤섞여 오묘한 기분이 든다.  

 

한 달의 파견 기간 동안 필요한 준비를 마치고 병원을 떠났다.  한강을 좌측으로 하고 강릉으로 향하는 길은 가을의 색이 담뿍 담겨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남들은 즐거운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올 시간이었기에 강릉으로 내려가는 도로는 한적했다.  

오후 다섯 시경 서울을 출발해 강릉에 도착했을 때, 시계는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전 달 파견 전공의와 서둘러 재원환자에 대한 인계를 마친 뒤 근무를 교대했다.  

 

"어디 보자...... 다들 수술 환자구나. 특별히 문제가 될 만한 환자는 없어 보이네. 다행이다." 

 

환자를 파악한 뒤 병동으로 향했다. 당직실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병동에 도착해서는 내일 오전에 있을 회진을 대비하여 환자 상태를 파악했다.  

 

한 시간 가량이 흘렀고, 주변은 어느새 어둑해졌다. 멀리 보이는 동해바다에 고깃배들의 불빛이 아름답게 일렁였다.  

 

짐을 풀기 위해 기숙사로 향했다. 병원 본관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오래된 건물이 기숙사이다. 한 달을 묵을 채비를 한터라 짐이 상당히 많았다. 낑낑거리며 짐을 들고, 방문을 열면 습기가 가득한 매캐한 공기가 나를 반긴다.  

 

'다시 왔네. 매번 올 때마다, 이 냄새는 적응이 안된다니까......' 

 

푸념을 내뱉으며, 강릉에서의 첫 날을 마무리 했다.  

 

강릉에서의 파견 생활은 그리 편하지 않다. 본원에서의 시스템과 상당 부분 차이가 있기 때문에 기계로 대신할 일들을 손수 챙겨야 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환자 수는 본원의 1/4 수준이지만, 들이는 수고는 거의 비슷하다. 

 

강릉에서 만나는 환자들은 주로 감염과 연관된 경우가 많다. 방광염, 전립선염, 신우신염 등 다양한 염증 케이스를 접할 수 있으며, 이들의 중증도는 생각보다 높다. 이들 상당수는 의료접근성이 좋지 못한 곳에 거처를 두고 있기 때문에, 감염이 발생한 초기에 병원을 방문하기 어려워 병을 키우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강릉에서의 생활이 몸에 익어갈 때쯤, 서울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어, 난데 그 할아버지 응급실로 오셨네?" 

 

"그 할아버지가 누군데? 한두분도 아니고. 그 할아버지라고 하면 어떻게 알아." 

 

"그 할아버지. Sarcoma(육종)" 

 

"엥? 얼마 전에 퇴원 잘하셨는데 왜?" 

 

"일단 열이 나서 ER(응급실)로 오셨는데, Lactic(젖산) 3.1이고, BP(혈압)도 떨어지고 아마 Septic condition(패혈증 상태)으로 가는 중인 것 같아." 

 

"마지막 Cx(fever study, 균 배양검사)에서 특별한 게 자라진 않았는데?" 

 

"일단은 Anti(항균제) 쓰고, 입원해서 봐야지, U/O(소변량)도 줄고 안 좋다." 

 

"아고...... 집에 가신다고 좋아하셨는데 우짜냐......" 

 

"입원장은 낸 거지?" 

 

"응 입원하셔야지. 너랑 각별한 것 같아서 전화했어. 끊는다" 

 

"떙큐, 복귀하면 찾아가 봐야겠다" 

 

"그때까지 버텨 주실지 모르겠다. 기분이 싸한데......" 

 

"잘 좀 봐줘. 부탁임" 

 

"그래 알았어. 오면 보자. 특별한 게 있으면 알려줄게" 

 

"오키, 수고" 

 

서울에서 걸려온 전화는 얼마 전 퇴원하신 중절모 할아버지의 상태가 좋지 않음을 알려주는 전화였다. 밝은 얼굴로 퇴원하셨던 할아버지가 감염이 발생하여 응급실로 내원하셨다는 소식에 걱정스러웠다.  

 

    

'마지막 날 Lab(혈액검사)도 괜찮았고, 배양검사도 특별한 게 없었는데 왜 그랬을까......' 




33

서울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난 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서울로부터 전해 들은 할아버지의 상태는 분명 패혈증 쇼크였다. 할아버지의 연세와 기저 질환을 고려하면 상당히 빠른 시간 안에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퇴원 전에 시행한 혈액검사도 이상소견은 없었고, 입원 중에 발열도 없었는데...... 도대체 이유가 뭘까? 패혈증 상태임은 분명한데 원인이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내가 놓치고 있던 게 있었을까? 분명히 다 확인을 했는데...... 이제 병원에서 보지 말자고 약속해놓고 왜 다시 오신 건지......' 


내적 불안이 심해졌다.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의사 생활을 하면서 이런 불안감이 엄습했을 때 결과가 좋았던 적이 거의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일과가 끝나고 서울의 동기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형, 할아버지 어때? 괜찮아?"


"어, 지금 바쁘니까 조금 이따가 통화하자. 내가 다시 전화할게."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모니터링 기계의 알림음이 날카롭게 고막을 긁어댔다. 분명 중절모 할아버지일 것이다. 

할아버지는 생사의 갈림길을 눈앞에 두고 무섭게 질주하는 모양새였다. 


걱정스러운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된다면, 지금쯤 승압제 요구량은 늘어나고 있을 것이고, 항생제에 반응이 없다면 이제 정말 끝일 수 있었다. 


할아버지의 폐는 괜찮은 건지, 신우신염이 원인인 것은 아닌 건지, 수술부위에 염증이 생긴 것은 아닌지, 혈액검사 결과는 어떤지 정말 궁금한 것들이 너무 많았지만 정보를 얻을 수 없어 절망스러웠다. 

자정이 다 될 때까지 서울에서는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

어찌 된 일인지 다시 연락을 해보고 싶었지만, 서울의 상황을 모르기도 했고, 담당의가 아닌데 처치 과정에 지나친 개입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동기가 적절한 처치를 했으리라 믿고, 기다리기로 했다.  


다음날 정오 무렵 중절모 할아버지의 상태가 더 좋지 않다는 연락을 받았다. 예상대로 승압제 요구량이 늘어갔고, 배양검사 결과는 확인되지 않았다. 


 밤사이 쇼크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투여한 수액이 연한 폐조직 바깥으로 빠져나와 할아버지의 폐는 물에 잠긴 상태가 되어있었고, 광범위 항생제를 투여하고는 있었지만 감염이 조절되지 않아 열은 40도까지 솟구쳤다. 


물에 잠긴 폐를 정상적으로 복구하기 위해 이뇨제를 투여한다면 할아버지의 혈압이 더욱 조절되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현재 상태를 유지하기에는 산소 요구량이 늘어날 것이다. 진퇴양난이다. 현재는 비강을 통한 산소 주입으로 버텨내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기관 내 삽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응급상황에서의 처치는 의사의 지식과 경험이 상당히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환자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다. 담당의로서 할아버지의 질병 초기부터 지금까지 계속 함께했던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타까운 마음이 더욱 커져갔다.  


이틀이 지나고, 중절모 할아버지는 중환자실로 내려갔다. 승압제 요구량이 여전히 높았고, 불안정한 혈압을 이유로 이뇨제를 투여할 수 없었다. 응급으로 흉관을 삽관하여 흉강 안에 고인 물을 빼내려고 시도했지만, 아직 효과는 미미했다. 


할아버지는 결국 기관삽관을 피할 수 없었고, 가느다란 호흡을 인공호흡기에 의지하게 되었다.  


"형 상황은 좀 어때?" 


"전이랑 비슷해. 크게 나빠지지도 그렇다고 크게 좋아지지도 않았어. 일단 승압제는 줄이고 있는데, 이제 Self(자발 호흡)가 돌아오는지 봐야지." 


"마지막에 mental(의식) 있었어?" 


"조금 쳐지기는 했는데 이후에는 ICU(중환자실)에서 intu(기관삽관) 하기 전에 Sedation(진정) 걸어놔서 분명하지는 않아. 아무래도 Sedative(진정제)를 끊고 의식 돌아오는 걸 봐야지. 아직은 이른 것 같아." 


"Source(감염원)는 뭐 같아?" 


"CT에서는 UTI(Urinary tract infection, 요로계 감염) 같고, APN(acute pyelonephritis, 급성 신우신염)도 동반되어 있어서 그쪽을 제일 의심하고 있어" 


"Urostomy(요루) 환잔데 그동안 voiding(배뇨)가 잘 안되었었나? 왜 그렇지?" 


"일단 다행인 건 U/O(urine output)이 조금씩 늘고 있다는 거니까 경과를 지켜봐야지. HD(hemodialysis, 투석)는 안 돌려도 될 것 같아. 어지간히 불안한가 보다. 계속 전화하고" 


"계속 내가 보던 환자잖아. 신경이 쓰이네. 잘 좀 봐주세요" 


"안 그래도 없는 머리 더 빠지게 생겼어. 상황 변화 있으면 또 알려줄 테니까 너무 걱정 말고 있어" 


"고마우이. 변화 생기면 꼭 연락 줘" 


"OK."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상황에서 할아버지는 잘 견뎌내고 있었다. 할머니가 걱정스러워 수술을 받겠다고 결정하셨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상황이 할머니에게 보이는 마지막 모습이 되는 것을 할아버지 또한 원치 않을 것이다. 부디 잘 이겨내시길.    




34화

"오늘은 특별한 이벤트 없었어? 괜찮은 거야?" 


"뭐 일단 승압제는 끊었으니까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것이겠지?" 


"오 끊었어? 바이탈(Vital sign) 괜찮아? Vent(ventilator, 인공호흡기)는? 


"아직. 오늘 승압제 끊었는데, 그럭저럭 잘 견뎌내고 계셔. 문제는 effusion(pleural effusion, 흉막삼출)이 아직도 조절이 안 되는 상태라 아직 Vent는 못 뗄 것 같아" 


"오늘이 4일째인가? 이제 Cx.(culture, 배양검사) 나올 때 되지 않았어?" 


"이제 나올 때가 되었는데, 아직 미확정 상태라......" 


"궁금하네...... 인공호흡기만 떼면 이제 올라오실 수 있겠는데?" 


"Septic condition(패혈증 상태)에 들어가면서 계속 sedative(진정제) 걸어둔 상태니까 의식도 좀 봐야 하고......" 


"Brain work up(뇌 검사) 계획은 있고?" 


"NR(신경과)에서는 Image w/u(영상의학 검사) 시행하고, brain EEG(뇌파검사) 해보자고 답변받아서 오늘 검사할 거야" 


"별 문제없었으면 좋겠다. 제발" 


"괜찮으시겠지. 나중에 전화하자" 


"전화 줘서 고마워 형."


중환자실로 옮겨졌던 할아버지는 점차 회복되어가고 있었다. 패혈증 상태에서 할아버지의 혈압을 지탱해주던 승압제는 이제 투여가 중단되었다. 아직 불안한 상태이기는 했지만, 승압제의 투여가 없어도 어느 정도 안정된 수축기 혈압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흉강 내의 삼출액량이 줄어들지 않아 자발 호흡은 어려운 상태였고, 여전히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호흡을 이어가고 있었다. 패혈증을 일으킨 원인 균주에 대한 배양검사는 아직 미확정 상태였기에 아직 광범위 항생제를 투여하고 있었다. 


이제 호흡만 회복된다면 할아버지는 일반 병실로 올라오시게 될 것이다. 자발 호흡과 의식이 문제였지만, 지금은 약물 투여 중으로 정확한 평가에 제한이 있었다.  


나흘 뒤 서울에서 연락을 받았다. 할아버지의 상태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었고, 뇌병변은 관찰되지 않았다는 소식이었다. 보통 패혈증 상태에서 혈압이 떨어지게 되면, 일시적으로 뇌로 가는 혈류가 줄어들게 되고, 이 시간이 길어지게 된다면 뇌에 영구적인 허혈성 손상을 입게 된다. 때문에 의식 수준을 바탕으로 뇌 손상 정도를 추정하고, 영상의학적 검사를 통해 뇌손상 여부를 평가해야 한다. 할아버지의 경우에는 패혈증 쇼크가 발생하기 전 의식 수준이 비교적 괜찮았던 터라 큰 이상은 없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었다. 


패혈증의 원인 확인을 위한 배양검사 결과가 확정되었다. 다행히 항생제 내성균주에 의한 감염은 아니었지만, 진균 감염이 동반되어 있었다. 현재 사용 중인 항생제를 한 단계 낮추어 사용하고, 진균에 대한 새로운 항생제가 추가되었다. 전신 염증 상태를 확인하는 혈액검사 지표도 점차 회복세에 접어들었다. 흉막삼출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지만, 배액관의 위치를 재조정하는 시술을 통해 기능이 이전에 비해 훨씬 나아졌다.  


원인도 알았고, 처치는 적절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제 조금 더 지나면 인공호흡기를 벗어내고 일반병실로의 전동이 가능할 상황이었다. 


할아버지가 중환자실로 내려간 지 2주가 지났고, 일반병실로 전동 되었다.  


흉막삼출이 줄어들어 인공호흡기는 제거했고, 자발 호흡은 회복된 상태였다. 혈액검사 결과 또한 호전되는 양상이었다. 


뇌 손상이 우려되어 시행한 검사 또한 특별한 이상 소견은 없는 상태였지만, 아직 할아버지의 의식은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 병실로 오셨다" 


"괜찮으신 거야? 의식은?" 


"의식만 없고 나머지는 다 정상적이야." 


"Sedative 끊은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조금 더 기다려봐야지." 


"여하튼 고생 많았소. 다른 건 문제없는 거지?" 


"내가 문제다. 내가 문제야. 이번 달은 왜 이렇게 힘든 거냐" 


"다음 달에 괜찮겠지. 좀 쉬셔" 


"오늘 또 당직이다. 무튼 변동사항 있으면 알려줄게" 


"고마워" 


아직 의식이 회복되지 않았다는 말에 마음이 가볍지는 못했지만, 아직 체내에 남아있는 진정제의 영향일 것이라 생각하고 걱정을 덜어냈다.  


'일주 뒤면 본원으로 복귀인데...... 그때까지 지금처럼만 안정된 상태를 유지했으면 좋겠다. 제발' 




35화


강릉에서의 파견 생활이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찬란한 가을 단풍을 가슴으로 맞으며 강릉으로 향한 지 벌써 4주 차에 접어들었고, 선선하게 기분 좋던 바람은 앙칼지게 차가워졌다.  

 

비교적 무난했던 하루를 마무리하며 차트 정리를 시작했다. 저녁 바람이 서늘하게 느껴져 당직실 창문을 닫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전화가 울렸다. 서울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서 겨울 한기가 느껴졌다.  

 

"어 난데, 야 또 BP(혈압) 떨어진다. 미치겠네" 

 

"왜? 무슨 일인데?" 

 

"아침에 살짝 열이 올랐다가 금방 떨어져서 걱정 안 하고 있었는데 방금 전에 39도까지 열이 나더니 지금 sBP 70대야. 환장하겠다 이거, 뭐가 문젠지 모르겠네." 

 

"anti(항생제)는 계속 쓰고 있던 거 아니었어? 왜 열이나?" 

 

"그걸 알면 내가 전화했겠냐. 일단 급한불은 꺼야 하니까 NS(normal saline, 생리식염수) drip 하고 line(수액을 투 여하기 위한 혈관 확보) 다시 잡고 있어. drip으로 안되면 다시 norpin(승압제) 써야겠다." 

 

"lab(혈액검사 결과)은 괜찮았어? 왜 갑자기 그래. Chest PCD(흉강 배액관) malfunction(기능 이상) 아니야? PCD function은 괜찮아?" 

 

"CXR(chest X-ray)은 어제랑 큰 차이 없어. pleural effusion(흉막삼출)도 늘거나 하지 않았고, 지금 irrigation 해보려고 하는 중이야. 오전까지도 drain 비슷했거든. 아마 다른 문제인 것 같은데. 돌겠네." 

 

"진정하고 잘 좀 찾아봐. 어딘가는 문제가 있겠지." 

 

"야 일단 끊어봐." 

 

"알았어. 끊어"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던 하루의 이유를 알았다. 중절모 할아버지가 다시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동안 잘 버텨내셔서 이제는 회복기에 접어들었다고 생각을 했던 참이기에 충격과 불안감이 더욱 컸다. 일반병실로 올라오신 뒤 얼마가 지나지 않았던 터라 다들 긴장하고 환자 상태를 모니터링하고 있었겠지만, 이런 상황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을 것이다.  

 

'어디가 문제지...... 그사이에 새로운 균이 자라기라도 한 건가? 다시 중환자실 가셔야 할 것 같은데......' 

 

불안한 마음에 당직실을 서성였다. 의자와 책상, 침대가 어지럽게 얽혀있는 당직실이 지금 내 마음 같았다. 미로같이 구불한 당직실을 빙글빙글 돌며, 불안정한 내 자신을 달랬다.  

 

앉았다 일어섰다 서성이 다를 반복했다. 시계는 어느덧 저녁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궁금해서 미쳐버리겠네...... 괜찮을까? ICU(중환자실)로 다시 가신 건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마음에 전화기를 들었다. 서울의 당직 전공의에게 전화를 걸려던 참에 동기 형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형 어떻게 됐어?" 

 

"무슨 전화를 이렇게 빨리 받냐. NS(normal saline) 3L까지 drip 했는데 BP(혈압)이 안 잡히더라. 결국에는 C-line(중심정맥관) 다시 넣고 norpin(승압제의 한 종류) 다시 시작했어. 마지막 lab에서 lactic(젖산) 4점대가 넘는데 또 septic shock이지 뭐" 

 

"norpin에는 반응이 있어? 지금은 얼마야?" 

 

"지금은 0.08 mcg에서 sBP(수축기 혈압) 90대 유지하고 있는데, 아직 열도 계속 나고 점점 안 좋아질 것 같아" 

 

"anti(항생제)는? 바꾼 거야?" 

 

"일단 내과 하고 상의해서 Pip/Taz (piperacillin/tazobactam, 항균제)로 변경했어. 내과에서는 pneumonia(폐렴)로 보고 있더라고." 

 

"CXR(흉부 방사선) 특별한 문제없었다면서?" 

 

"Pleural effusion(흉막삼출)이 오래 지속되기도 했고, both lung field infiltration도 증가한 게 지금으로서는 pneumonia가 제일 의심이 된다고 써보자고 하네" 

 

"효과가 있어야 할 텐데...... ICU(중환자실)은 다시 안 내려가도 될까? 지금 얘기 들어봐선 가야 될 것 같은데?" 

 

"안 그래도 알아보고 있는데. 가족들끼리 의견이 갈려서......" 

 

"이건 또 무슨 얘기야? 의견이 갈린다니?" 

 

"할아버지가 지난번에 퇴원하시면서 이 정도 했으면 다했으니까 이제 죽게 되면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하셨다네." 

 

"아니 그건 그거고. 지금은 septic condition이고 회복이 가능하잖아? 근데 안 가겠다고 그래?" 

 

"인공호흡기 처치를 하게 되면 소생 혹은 사망 시까지 제거가 어렵다고 설명을 드렸거든. 지난번엔 상황이 급박해서 가족들도 생각을 못하고 있었던 거지. 이번에 할아버지 중환자실 가고 인공호흡기 치료하는걸 할머니가 보시더니 할아버지 그만 괴롭히라고 했다고 하셨다네. 두 아들은 그래도 해볼 수 있을 때까지는 하자고 하시고." 

 

"난처하구먼...... 오늘은 그럼 그냥 처치실에서 보기로 한 거야?" 

 

"그래야지. 오늘 새벽이라도 돌아가실 수 있다고 설명드리고 빨리 결정해달라고 말씀드렸는데. 아직까지 결정을 못하셨나 봐."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 상황이면 중환자실 가시는 게 낫겠는데......" 

 

"연락 기다려보자." 

 

"그려 고생했어. 퇴근하세요" 

 

"뭔 퇴근이야. 환자가 저런데. 무튼 변동사항 있으면 연락 줄게" 

 

"고맙습니다. 당직 있으니까 집에 가서 좀 쉬다와. 이번 달 힘들었다면서"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쪽이나 주무시지요" 

 

"예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행님"   

 



36화

유난히 긴 밤이 지났다. 서울의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에 답답함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늦은 새벽까지 침대를 벗어나 방안을 서성이다가 다시 자리에 눕는 상황이 반복됐다.  

 

새로 맞이한 아침. 강릉에서의 일상은 전과 다름없이 흘러갔지만 나의 하루는 어제의 연속이었다. 

 

지난밤 할아버지의 상태는 어떻게 변했고 가족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지가 너무나 궁금했다. 오전 회진을 마치고 서울로 전화를 걸었다.  

 

"형. 어떻게 됐어?" 

 

"일단은 어제랑 큰 변화는 없어. 승압제도 그대로 유지 중이고. 아침 CXR(chest X-ray, 흉부 방사선 촬영)에서 effusion(흉막삼출)이 조금 더 늘어났다." 

 

"mental은 여전하지?" 

 

"쭉 변함없어. Intensive care(중환자 집중치료)를 하는 게 좋겠는데 오늘 아침에도 알아보니까 ICU(중환자실)는 입실기준에 해당 안된다고 하고, 자리도 없는 상황이고......" 

 

"계속 처치실에서 계셔야겠네...... 가족들이 어서 결정을 내려줘야 한시름 놓을 것 같은데......" 

 

"아직도 의견이 합쳐지지가 않나 봐. 배우자분 의사가 너무 확고하셔서 아들들도 지금 엄청나게 고민하고 계셔." 

 

"큰아들이 와계신 건가?" 

 

"응 두 분 다 와계시지. 배우자분은 몸이 좋지 않으셔서 오늘 오전에 댁으로 가셨고." 

 

"진짜 큰일이다. 어째 약들이 반응이 없냐......" 

 

"야 일단 전화 끊어봐 콜 계속 들어온다. 나중에 통화하자" 

 

"오키 고마워!" 

 

언제나 그렇듯, 불안한 마음을 해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전화통화를 마쳤다. 

 

나는 냉정하게 할아버지의 상태를 다시 살펴보려 했다. 의사로서 내가 판단하기에 할아버지는 정말 소생 가능성이 없는 것인가? 어떤 것이 할아버지를 조금 더 편하게 해 드리는 것일까? 내가 할아버지의 담당의였다면 가족들에게 어떤 설명을 했어야 했을까?  

 

'할아버지는 지금 패혈증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이미 병과의 싸움에서 졌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기능을 제외하면 어느 하나 온전한 것이 없는 상태야. 약물이 아니었다면 할아버지는 이미 차갑게 식어버렸을 거야. 그래 알겠어. 나도 충분히 알아. 모든 지표가 할아버지의 끝을 가리키고 있어. 전부 알지만,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정말 소생할 가능성이 없을까? 정말 1푼이라도 가능성이 없는 거야?' 

 

나는 의사로서 이미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깨어날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진심으로 할아버지를 위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기적을 바라는 며칠의 시간이 흘렀고, 할아버지의 상태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다만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할아버지의 바람처럼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위한 어떠한 처치도 시행하지 않는데 가족들이 동의한 것이다. 

 

할아버지는 처치실에서 다시 병실로 자리를 옮겼다. 가족들이 모여 있을 수 있는 오롯한 할아버지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강릉에서 서울로 복귀하자마자 병동으로 향했다. 마음이 급했던 터라 가운을 챙겨 입지도 못한 상태였다. 

 

닫힌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모여있던 가족들의 눈이 나를 향했다. 그제야 내가 의사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아...... 죄송합니다. 저는 비뇨의학과 전공의입니다. 할아버지 상태가 걱정되어서 바로 찾아오느라 복장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아! 이선생님?" 

 

"아 네. 큰 아드님이시죠? 죄송합니다. 제가 강릉으로 파견을 가 있는 동안이라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별말씀을요...... 신경을 엄청 써 주신 것을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강릉에서도 계속 저희 아버지 상태를 챙겨주셨다고 담당 선생님을 통해 얘기 들었습니다." 

 

"아닙니다. 큰 도움이 되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퇴원하실 때 환하게 웃으면서 인사를 나눴는데...... 지금 이렇게 의식이 없는 채로 다시 만나게 되어 뭐라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퇴원하시고는 이선생님 말씀을 참 많이 하셨어요. 잘은 모르겠지만 이선생님께 많이 의지를 하고 계셨던 것 같아요. 식사 한번 대접해야 하겠다고 병원으로 수차례 전화를 하셨는데 연결이 안 되어서 많이 서운해하셨습니다. 병원에 다시 입원하실 때에도 입원하면 이선생님이 봐줄 거라며 걱정 말라고 저희를 안심시키셨는데 선생님께서 강릉으로 가셨다는 소식에 실망이 크셨어요...... 지금도 말씀은 못하시는 상황이지만 이선생님이 오셨다는 얘기를 듣고 계실 겁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보호자와의 대화를 끝내고 할아버지 곁으로 다가갔다. 할아버지는 산소마스크를 쓰고 가뿐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두 눈은 감은채 우측으로 돌아 뉘어져 있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승압제의 영향 탓인지 손끝은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고, 손마디는 단단하게 굳어져있었다.  

 

'늦게 와서 죄송해요. 건강 잘 챙기셔서 다시 보지 말자고 해놓고 이렇게 사람 놀라게 하시면 어떻게 해요. 할머니 걱정된다고 수술받으셔놓고는 할머니가 더 걱정하시게 되었잖아요...... 눈 뜨셔요. 이제 저 왔으니까 일어나셔도 돼요. 저 없다고 투정 부리시는 거면 그만하시고 일어나세요. 제가 더 잘할게요. 네?' 

 

대답이 있을 리 없는 할아버지의 손을 부여잡고 한참 동안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와의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3년이 넘는 시간 동안의 일들을 기억하려 했다.  

 

응급실에서 나를 애타게 찾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아직은 너무나 생생했다. 점잖은 갈색 양복에 중절모 차림. 내려진 지퍼 사이로 툭하고 삐져나온 도뇨관과 암적색의 혈뇨. 엄살이 심했던 할아버지의 사람 좋은 웃음. 다시 보지 말자던 수차례의 약속들. 웃으며 맞이한 행복한 이별의 순간들.  

 

따뜻했던 할아버지의 온기는 이제 반쯤 식어 부여잡은 나의 손끝을 시리게 했다. 나는 의사로서 실패했다. 밀려드는 죄책감에 의도치 않게 시야가 흐려졌다.  

 

얼마가 지났을까? 가족들 중 젊어 보이는 여성이 울음을 억지로 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할아버지를 바라보는 내 모습이 끝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일까? 나는 잡고 있던 할아버지의 손을 침상에 가지런히 내려놓고 가족들에게 인사를 했다. 내일 또 찾아뵙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병실을 나섰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흐려진 시야가 나를 더 비참하게 했다.     

 



37화

이상한 꿈을 꾸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짙은 어둠 속에 나 홀로 떠다니고 있었고, 형체를 알 수 없는 파도가 계속해서 나를 덮쳐왔다. 도움을 요청하려 입을 열면 어둠이 밀려들어와 소리를 낼 수 없었다. 벗어나려 해도 끝이 없이 계속해서 깊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 기괴한 상황에서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일어나 보니 땀으로 베개가 흠뻑 젖어있었다. 할아버지를 뵙고 난 뒤 마음이 뒤숭숭한 탓인지 평소에 꾸지 않던 꿈을 꾸었다며, 이상한 일이라 생각하고는 다시 잠을 청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언제나처럼 불쾌한 진동에 눈을 떴다. 출근 준비를 위한 알람이 울린 것이었다. 아내와 아기들이 모두 곤히 잠에 들어있던 터라 조심스럽게 알람을 끄고는 방을 나섰다. 


이제 겨울에 접어든 새벽 집안의 공기는 차가웠다. 정신을 차리려 물을 한잔 따라 들고는 밤새 있었던 일들을 파악하기 위해 메신저를 열었다. 




[오전 4시 34분 H 교수님 환자분 000 님 사망하셨습니다.]




가슴이 철렁했다. 


'며칠은 더 뵐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가셨구나.'


먹먹한 가슴을 부여잡고 병원에 도착해서 할아버지의 병실을 찾았다. 


내가 병실에 도착했을 때에는 침대에 새롭게 깔려진 새하얀 시트가 할아버지의 흔적을 이미 지워버린 뒤였다. 


예상했고 준비했던 상황이지만, 기적을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기에 실망이 컸다.


할아버지가 누워 계셨던 침대 곁에 서서 무겁고 비통한 마음을 다잡기 위해 기를 썼다. 


눈물이 눈앞을 어지럽혔다.


하얀 시트에 반사되는 햇볕이 이별의 공간에서 찬란하게 대조를 이루어 나의 슬픔을 더했다.



'가셨네요. 인사도 없이. 안녕히 가세요. 이제는 아프지 마시고요. 푹 쉬세요. 그래도 오늘 저는 좀 보고 가시지......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저는 할아버지 걱정 많이 했는데 서운하네요. 어제라도 얼굴 보여주셨으니까 용서해드릴게요. 그건 고마워요. 할아버지. 지금 와서 하는 얘기지만, 중절모 진짜 잘 어울려요. 머리 가운데 벗겨진 거 가리려고 쓰신 거 아는데요. 모자 벗었을 때보다는 중절모 쓰셨을 때가 훨씬 멋있어요. 앞으로도 계속 챙겨서 쓰세요. 그리고 이제는 엄살 좀 그만 부리세요. 점잖은 얼굴로 아프다고 살살하라고 하실 때면 제가 얼마나 밍구스러웠는지 아세요? 나름대로 실력 있다고 자부하는데 시술할 때마다 아프다고 하시니까 제가 자존심이 좀 상했어요. 그것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이 걱정해요.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엄살 부리지 마세요. 전화번호 알려드리지 않은 건 죄송해요. 업무규정상 어쩔 수 없었어요. 전에 적어주신 쪽지는 아직도 잘 보관하고 있어요. 이런 상황이 올까 봐 보관하고 있던 건 아닌데 할아버지 생각날 때마다 열어볼게요. 저 할아버지 장례식에는 안 가려고요. 제가 죄송스러워져서 웃고 있는 할아버지 사진을 다시 볼 용기가 없어요. 나중에 뵙게 되면 그때 맛있는 밥 얻어먹을게요. 다시 한번 당부드리는데요. 아프지 마세요. 저 이제 병실에서 나갑니다. 이제 진짜 안녕히 가세요.'


할아버지가 떠나셨다. 텅 빈 할아버지의 병실처럼 하루가 공허했다.




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와 할아버지의 부고를 아내에게 전했다. 그동안 할아버지와의 일들을 아내에게도 얘기했던 터라 아내도 나와 같은 마음으로 할아버지를 걱정하고 있었다. 


"자기야, 할아버지 장례식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자기한테 특별한 할아버지셨잖아."


"안 갈래...... 그냥 이렇게 보내드릴래."


"진짜 안 가봐도 괜찮겠어?"


"응. 안 갈래 여보. 이미 인사드렸어. 나중에라도 뵙게 되면 꼭 내가 밥 한번 얻어먹겠다고. 안녕히 가시라고...... 푹 쉬시고 중절모는 꼭 쓰고 다니시라고...... 보고 싶지만 참겠다고"



이전 29화 전공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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