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D Aslan Nov 15. 2020

전공의 일기.

5-29



할아버지의 상태는 수술 후 4일이 지나도록 호전이 보이지 않았다. 가스가 배출되지 않아 배는 남산만 하게 부풀어 올랐고, 부푼 장이 횡격막을 압박해 숨을 쉬기도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었다. 매일 콧줄을 통해 배액 되는 체액의 양은 여전히 500cc를 넘어선 상황이었기 때문에 지금 당장 콧줄을 제거하기도 어려웠다. 가스 제거 효과가 있는 약물과, 장 운동을 도와주는 보조 약물을 사용했지만 이마저도 효과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지쳐갔고, 오랜 금식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할아버지, 오늘은 CT를 좀 찍어 볼까 해요. 장마비가 지속되고 있고, 장이 부풀어서 횡격막을 압박하는 상황이라, 숨쉬기도 어려우실 거예요. CT를 찍어서 기계적 장폐색이 아닌지 확인을 해보겠습니다." 


"이선생 이거 언제나 좋아지는 거야? 물도 못 마시고, 콧줄 때문에 불편하고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야. 어떻게 좀 해줘 봐." 


"CT 찍어서 지금 당장 수술적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분명히 좋아지실 거예요. 오늘 오전에 찍으실 수 있게 제가 최대한 맞춰볼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CT 찍고 괜찮으면 나 물 마셔도 되는 건가?" 


"그건 아니에요. 기계적 장폐색이 아니라고 하면 안심하고 더 기다려 볼 수 있다는 의미이지 바로 물을 드실 수 있다는 건 아니에요." 


"아우 힘들어. 이선생 나 너무 힘들어. 콱 죽어버릴걸. 괜히 수술하겠다고 했나 싶어" 


"죄송해요. 장마비가 있을 것이고, 꽤나 오래갈 것이라고 예측을 했던 상황이지만, 이렇게 심할 줄은 몰랐어요. 오늘 오전에 CT 찍고 결과 나오면 제가 바로 와서 결과 말씀드릴게요. 조금만 더 기운 내세요." 


"......" 


할아버지는 지친 듯 고개를 돌렸다.  


"검사하시면 제가 와서 바로 설명드릴 거예요. 그동안 지금처럼 누워있지 마시고, 운동을 하셔요. 지쳐서 누워계시면 상태가 좋아질 리 없어요. 다른 혈액검사 수치는 다 정상적이니까 가스만 나오면 됩니다. 운동하셔요. 아셨죠?" 


"......" 


"운동하세요. 운동하셔야 해요. 아셨죠? 저 이따가 올게요" 


대답 없는 할아버지를 뒤로하고 병실을 나섰다. 그동안 잘 견뎌오셨던 할아버지의 달라진 모습에 당황스러웠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다행히 오전에 시행한 CT에서는 수술 이후 구조적 문제에 의한 장폐색은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기쁜 마음으로 할아버지를 다시 찾았다.  


"할아버지, 운동은 좀 하셨어요?" 


"이봐 이선생. 아무것도 못 먹고 기력이 없는데 자꾸 운동만 하라 그러면 어떻게 해. 기력이 없어서 쓰러질 것 같아. 나 오늘 운동 안 할 테니까 이선생도 그렇게 알고 있어. 힘들어서 못해." 


"오늘 CT 결과는 우려했던 것보다 좋게 나왔어요. 수술하면서 오랜 시간 동안 장이 공기에 노출되어 있었고, 유착이 심한 상태라 다른 분들보다 장마비 증상이 조금 오래가는 것 같아요. 여기서 지치시면 안 돼요. 상태가 호전되지 않아 속상하신 마음은 잘 알고 있어요. 저도 할아버지가 호전되지 않아서 안타까워요. 누구보다 제가 할아버지 회복을 바란다는 걸 알고 계시잖아요. 저는 할아버지가 어서 회복하셨으면 좋겠어요. 제 말 좀 들어주세요. 네?" 


"이선생 나 진짜 힘들어. 기력이 하나도 없다고. 이 늙은이를 이렇게 고생시켜야겠어? 오늘은 정말 기력이 하나도 없어서 그러니까 이선생이 양보해. 나도 이선생 마음 잘 알아. 오늘은 좀 쉬자" 


"알겠어요.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컨디션 좋아지시면 운동하시는 거예요? 아셨죠? 오늘 저녁까지도 호전이 없으면, 관장을 조심스럽게 해 볼게요" 


"알았어. 수고해 이선생"



출처: https://mdaslan.tistory.com/91?category=953367 [의사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