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로 가득한 공원, 산책 중인 진돗개가 등장한다. VCR을 통해 이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던 패널들은 진돗개가 입마개를 하지 않았다며 탄식한다. 이어서 진돗개와 체급이 비슷한 보더콜리가 등장했지만, 입마개 언급은 없다. 지능이 높은 견종이라는 칭찬만 할 뿐이다. 중형견 이하 체급의 또 다른 믹스견을 두고는 패널들이 "저 생긴 거 딱 (입마개)했으면 좋겠다", "약간 성깔 있어 보인다" 등의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다. 지난 10일 유튜브 채널 '르크크이경규' 채널에 올라온 영상의 일부다.
해당 콘텐츠는 '더 많은 것들을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첫 걸음'이라는 메시지를 내세우며, 1편으로 '펫티켓'을 다뤘다. 보호자들의 동의 없이 몰래 촬영된 영상을 보여주며 존중과 배려를 강조하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했다.
영상에선 강아지의 인식표 착용 유무와 반려견이 소변을 본 자리에 일명 '매너워터'를 뿌리는지 등을 관찰하기도 했으나, 내용의 중심은 '입마개'였다. 문제는 입마개 착용의 필요성이 영상 내내 진돗개와 믹스견에 치중되는 양상을 보였다는 것이다.
패널들은 입마개를 하지 않은 진돗개가 등장하자 탄식을 내뱉었지만, 현행 동물법상 입마개 착용 의무가 있는 견종은 도사견, 아메리칸핏불테리어, 아메리칸스탠퍼드셔 테리어, 스탠퍼드셔 불 테리어, 로트와일러 등의 5개 종이다. 사실 패널들 입에서 품종에 대한 지나친 품평이 나올 때마다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견종차별'의 실태를 보는 듯해 씁쓸했다.
'가짜 두려움', 공존의 가치를 훼손시켜
진돗개 입마개 착용을 강조하던 패널들을 보며 그들이 '가짜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란 생각을 했다. 진돗개들은 사나울 것이라는, 근거 없는 '뇌피셜'에 기반한 가짜 공포감. 여기에 부응해 공격성 없는 반려견에게 입마개를 채우는 것을 진정한 존중과 배려라고 칭할 수 있을까?
존중의 사전적 의미는 '높이고 귀중히 여김'이며, 배려의 사전적 의미는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씀'이다. 이 두 가지의 가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행위 주체자의 자발성은 필수적이다. 오로지 '진돗개는 사납다'라는 공고한 인식적 프레임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내 개에게 입마개를 채우는 것은 존중과 배려를 강요당한 결과물에 불과하다.
1500만 반려인 시대, 펫티켓에 대한 사회적 요구와 필요성이 높아진 상황이다. 그러나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더 중요한 것은 '상호작용적인 에티켓'이다. 해당 콘텐츠가 더 무겁게 다가온 이유는 토종견을 배척하고, 반려견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실체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반려 사회는 기울어져 있다. 소형 품종견은 일반적인 '반려견'으로 인정받는 반면, 중대형견은 '위험할 수 있다'는 이유로 산책 현장에서 불필요한 시비의 대상이 된다. 반려 사회에서 토종견의 위치는 더욱더 마이너적이다. 각종 포털 사이트와 SNS에 '산책 시비'를 검색해보면, 관련된 많은 자료들이 넘쳐난다.
"저런 개는 안락사 시켜야 한다는 소리까지 들어 봤어요."
파주에서 진돗개를 키우는 30대 여성 송모씨. 반복되는 산책 시비는 닮아있다고 지적한다. 반려견이 무섭게 생겼다는 이유로 입마개를 강요당하고, 이를 거부하면 가해자의 폭언과 위협이 따른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점은 입마개 시비가 반려인들 사이에서도 벌어진다는 것이다. 어떠한 위험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음에도, 5대 맹견에 해당하지 않는 대형견 및 토종견에게 입마개 착용을 요구하는 몰지각한 일부 반려인들의 사례도 종종 SNS에서 공유되곤 한다.
30대 여성 김슬기씨는 몇 년 전 아파트 단지 내에서 입마개 시비에 휘말렸다. 슬기씨의 반려견 진도믹스 스잔이는 인스타그램에서 3만여명의 팔로워를 보유한 '유명견'이다. 당시 시비 상황은 라이브 방송을 통해 팔로워들에게 생중계되었는데, 가해 남성은 다름 아닌 소형 품종견의 보호자였다.
슬기씨는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던 중, 오늘 아침에도 산책 시비에 걸려 경찰을 불렀다고 토로했다. 가해자는 자신의 아이가 개를 무서워 한다는 이유로, 아무런 공격성을 나타내지 않은 스잔이를 발로 밀었다고 한다.
진정한 에티켓의 의미를 고려해야 할 때
5월 14일 새벽에 '르크크 이경규' 제작진의 사과문이 올라온 상황이지만, 진돗개 보호자들의 항의는 잦아들지 않고 있다. 그릇된 편견과 혐오의 잣대 속에서 진돗개 보호자들이 겪어온 '일상 속 위협'이 그만큼 컸기 때문일 것이다.
나 또한 9년 차 진도믹스견의 보호자다. 특정 대상에 대한 근거 없는 편견과 두려움은 때때로 그 대상을 마음껏 혐오할 수 있는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수년간의 산책 시비를 통해 깨닫게 됐다.
간혹 길거리에서 진돗개를 마주친다면, 좀 더 따뜻한 시선을 보내줬으면 한다. 진돗개들은 '개농장'과 같은 최악의 상황에서 구조되어 입양된 경우가 많다. 어려운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가족을 만난 이들을 좀 더 안전한 환경에서 반려할 수 있는 일상을 보장받고 싶다. 토종견들을 반려견으로 인정하는 사회의 에티켓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