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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철 Aug 21. 2020

생애 첫 여행

(1,020박  1,021일)


짧게 깎은 머리에 한 손에 입영통지서를 들고 경남 진주의 한 초등학교 운동장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입영통지서를 손에 쥔 몇몇 친구들과 대충 눈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장정壯丁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장정의 사전적 의미는 부역과 군역에 소집된 남자입니다. 

배웅 나온 친구들과 가족들의 호위를 받으며 도보로 진주역에 도착했습니다. 

아쉬운 이별을 뒤로하고 말로만 듣던 입영 열차를 탔습니다. 

열차의 좌석에 앉자마자 호송하는 현역군인의 불호령이 떨어집니다.    


“이 시간부터 여러분은 조국의 부름을 받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군인이다. 옆 사람과의 잡담을 금지하고 창문 커튼을 내린다.”     


이때부터 내 인생의 첫 여행은 시작되었습니다. 

인생의 첫 여행이 1,020박 1,021일 숙식 제공 무료 여행에 약 3,000원의 월급도 준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바깥세상과 차단된 공간에 두려움을 가득 실은 열차는 서서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또 한 곳에서 숙식 제공 무료 여행을 예약한 장정들을 싣고 기차는 북으로 북으로 달려갑니다. 

날은 어둡고 눈은 내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경기도 어느 역사에 정차했습니다. 


다수의 군인이 플랫폼에 서 있고 눈보라에 흐릿한 역사 이름이 내 눈에 들어왔습니다. 

눈을 의심했습니다. 망월사望月寺역입니다. 아! 이제는 망했구나! 죽었구나! 

하필 망자와 사자가 들어간 역이라니,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망월사역에 내려 도보로 갔는지 버스를 타고 갔는지 기억은 없지만 늦은 밤 101 보충대에 도착했습니다.     


보충대는 입대자들이 신병교육대나 기타 부대로 가기 전 임시로 대기하는 곳입니다. 

다시 혈액검사와 몇 개의 검사를 더 받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게 됩니다. 


초등학교 때 실시한 혈액검사에서 혈액형이 B형이라는 판정을 받았는데 여기서는 A형이라 합니다.

군대는 특수한 곳이라 혈액형도 바뀌는 곳인가 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뛰어난 내 상상력이 빛을 발휘합니다.

만약 적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의식 불명의 상태에서 수혈을 잘못 받아 사망하게 된다면, 나는 그야말로 개죽음을 당하는 것입니다. 군의관에게 달려가 B형이라고 우겼습니다.

군의관도 혈액형 검사의 중요성을 알기에 이의신청을 받아들여 재검사를 했습니다. 


결과는, 자기 혈액형도 모르는 바보 소리와 굴밤 한 대를 맞았습니다. 

(이때까지 군대에서 첫 구타와 마지막 구타가 이 굴밤 한 대로 끝날 줄 알았습니다.)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초등학교 혈액검사는 일렬로 서서 피를 뽑고, 그 줄 그대로 가서 혈액형을 통보받는 시스템인데, 산만한 친구들의 장난으로 줄을 선 순서가 바뀌면 시스템 오류가 발생해 혈액형도 바뀌는 것입니다. 

(군대도 안 간 초등학교 친구는 혈액형이 바뀐 줄도 모르고 지금도 별일 없이 잘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보충대에서의 첫날밤, 간단한 점호가 끝나고 잠자리에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습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거의 뜬눈으로 밤을 보냈습니다. 

가끔 흐느끼는 소리도 들렸지만 우리는 애써 모른 체했습니다.

삼 일째 되는 날 경기도 연천군에 위치한 5사단 신병교육대로 배치를 받았습니다. 


눈은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하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관광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장난기 가득한 40대 중반의 남자 운전기사분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합니다. 

버스는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전진 또 전진합니다. 어머님이 차려준 따듯한 저녁을 먹고 방에 누워 TV 시청을 하고 있을 시간에, 관광버스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적막을 싣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버스 안에 갑자기 음악이 흘러나왔습니다. 

흘러간 옛 노래입니다. ‘가거라 38선’을 시작으로 ‘봄날은 간다’ 

‘비 내리는 고모령’ ‘울고 넘는 박달재’ ‘꿈에 본 내 고향’ 등등 

그리고 엔딩 곡이 하필 ‘불효자는 웁니다.’입니다. 


옛 노래가 이렇게 슬픈 노래인 줄 내 인생에 처음 알았습니다.

이 순간 이런 노래를 들려주는 기사분의 배짱도 놀라웠습니다. 

군대는 불효자만 가는 곳인지 불효자가 너무 많아 보입니다.

소리 내어 울지는 않았지만, 우리 장정 불효자들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습니다. 

고인 눈물을 훔쳐내자 관광버스는 신병교육대 연병장에 도착했습니다.     


예외 없이 연병장에는 빨간 모자의 사나이들이 우리들 기다리고 있습니다. 

천주교에서 교황은 흰색, 추기경은 붉은색, 대주교와 주교는 자주색, 신부는 검은색 모자를 쓴다고 합니다. 

훈련소에서 훈련병들에게 빨간 모자의 교관은 추기경 정도 되는 모양입니다. 

입대 3일 만에 앉아 일어서는 수백 번을 한 것 같은데 또 앉아 일어서만 수도 없이 시킵니다. 

도대체, 군대에서 앉아 일어서는 몇 번을 해야 제대를 하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교관 한 분이 연단에 올라 지금 이 시각부터 우리는 훈병이라 합니다. 

훈병이란 훈련병의 줄임말입니다. 군대 진급이 이렇게 빠른 줄 몰랐습니다. 

3일 전 민간인에서 장정을 달았는데 오늘은 장정에서 훈병으로 계급이 한 계단 또 올랐습니다. 

이러다간 육군 병장이 아니라 육군 대장으로 별 네 개를 달고 제대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눈은 내리고, 

창이 넓은 빨간 모자 추기경의

앉아 일어서 소리에,  

1,020박 1,021일의,

내 생애 첫 여행은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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