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작품의 주연 배우로, 감독으로,
눈을 뜨면 첫 문장이 시작된다.
연작시를 쓰는 시인이 많이 있다.
여행, 산책길, 인물, 저수지 등 하나의 주제 아래 서로 다른 제목과 형식으로 여러 편의 시를 쓰는 것이다.
하나의 모티브 아래 대상을 바라보는 깊은 통찰력과 상상력으로 우리의 삶을 유추해 낸다.
지금은 연작시를 쓰는 것을 이해하지만, 예전에는 하나의 주제로 어떻게 다른 형태의 시를 꾸준하게 쓸 수 있는지 궁금했었다.
저수지는 하천이나 계곡을 막아 적당한 양의 물을 담수해 두는 곳이다.
떨어진 낙엽이 바닥에 쌓여 썩어가는 저수지를 보고 과연 몇 편의 시를 쓸 수 있는지 의문을 가졌던 건 사실이다. 산책길도 마찬가지다. 매일 걷는 그 길에 나무가 없어졌다가 새로운 나무가 갑자기 솟아나는 것도 아니고, 기존에 있던 길이 없어졌다가 느닷없이 새로운 길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저수지와 산책길을 주제로 과연 몇 편의 시를 쓸 것인지 지켜보는 내가 초조해지기도 했었다.
저수지는 일정한 양의 물이 모이면 더는 욕심부리지 않고 넘쳐흐르게 한다.
그 물로 논과 밭의 농작물이 과실을 맺어 인간에게 수확이라는 크나큰 기쁨을 안겨준다.
시인은 저수지에서 만물을 창조하는 작은 우주를 발견한다.
작은 우주를 중심으로 마을이라는 행성과 논과 밭이라는 위성을 창조해 낸다.
그 속에서, 대자연의 근원적인 힘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굴곡진 삶을 리얼하게 그려낸다.
때로는, 작은 우주의 둑에 앉아 밤새 울다간 누이의 모습을 본다.
우리의 삶이, 마음이, 작은 우주 속에 잔잔히 고여 있는 또 다른 세상을 들여다본다.
옛 선현들은 저수지에 빠진 보름달을 건져내기도 했었다.
수초 깊숙이 노숙자처럼 누워있는 물고기도 발견한다.
연작시를 쓰는 시인의 치열성과 세심한 관찰력이 놀랍다.
세상을 주체적으로 바라보는 정신의 높은 경지를 엿볼 수 있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연작시든 산문이든 소설이든, 첫 문장이 시작된다.
한 편의 작품이 빠르게는 하루, 아니면 한 달, 길게는 수십 년이 걸리기도 하고, 영원한 미완성도 있다.
반복되는 일상을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인생이라고 한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문학작품, 뻔한 이야기를 누가 읽어 보겠는가.
이런 삶은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다.
올바른 자아, 나라는 주체가 빠져있고 주변인으로서 나라는 형체만 있는 것은 아닌지.
남이 그렇게 살아가니 나도 그렇게 살아가고 기계보다 더 기계 같은 하루를 사는 게 아닌지.
쳇바퀴에서 벗어나 대자연속을, 우주를, 마음껏 활보하는 주체가 될 수는 없는지,
매일 출근길에서 만나는 사람, 거리의 분위기, 바람의 세기, 길 위의 표정은 매일 다르다.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매일 만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분들의 옷이나 표정은 조금씩 달라져 있다.
삶은 끊임없이 우리를 단련시키려 한다.
적개심을 심어주기도 하고, 현자의 모습으로 구도자의 길로 안내하기도 한다.
어차피 선택의 주체는 나이다.
달리진 것을 보려고 하면 보인다. 보려고 하지 않는 마음이 문제다.
그냥 눈에 보이니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눈이, 마음이, 세상의 주인공이 되어 바라보고 세심히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면 저수지에서, 산책길에서와 같이 순환의 법칙을 깨우쳐 현실에서 높은 정신의 경지에 도달해, 정신이라도 풍요롭지 않을까?
인생의 주인공이라 생각하느냐,
아니면 평생 조연이라 생각하느냐,
그것도 아니면 일생을 행인 1, 2, 3으로 살아갈 것인지,
우리는 오늘도 나라는 주제로 작품을 쓰고 있다.
짧은 수필이든, 일생의 대작 대하소설이든,
첫 작품의 주연배우로, 감독으로,
후대에 길이길이 전해질 명작 한 편
만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