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1분을 위한 여섯 번의 파리 여행

프랑스어 Gratuits le 1er dimanche.

by Fernweh

말을 모으는 여행기, 말.모.여. 4)


프랑스어 Gratuits le 1er dimanche [그하뛰 르 프흐미에 디망슈]

expr. (매달) 첫째 주 일요일 무료


파리 여행의 한 가지 팁. 매달 첫째 주 일요일, 꽤 많은 박물관이 무료로 열린다. 한국인이 많이 찾는 오르세 미술관도 이에 해당된다. 루브르는 콧대가 좀 높아서 일요일 대신 첫째 주 토요일 ‘야간에만’ 무료로 열린다. 어떤 박물관은 8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만 무료 개방을 한다. 세세한 지침이 다르다보니 파리에 갈 때마다 ‘Gratuits(무료) le 1er dimanche(매달 첫째 주 일요일)’을 검색했다.


약어 형태 ‘1er’로 쓰인 단어는 ‘premier’이다. 영어로도 ‘제1의’라는 뜻이 있어 쉽게 뜻을 유추할 수 있다. 축구 애호가라면 ‘프리미어’ 리그를 떠올려도 좋고. 일요일(dimanche) 앞에 붙일 땐 ‘제1의 일요일’이라 하면 뭔가 역사적으로 기억해야 하는 일요일 같은 느낌이니 ‘첫 번째’란 뜻과 어울리는 말. 그리고 '첫 번째' 일요일에 오랑주리 미술관에 방문한 '첫 번째' 사람이 된 기억은 짧지만 강렬했다.


강렬한 기억으로 남은 말, 기수사 ‘premier’를 추억하며 남기는

오랑주리 미술관 헌정 에세이.




단 1분을 위한 여섯 번의 파리 여행



“여기 앉아서 좀 쉬어요.”


수련 연작을 처음 마주한 순간 내 귓가에 들린 속삭임이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도망치듯 빠져 나온지 10분 만에 또 다른 미술관에 들어왔다. 벽면 한가득 수련이 가득한 오랑주리 미술관이었다.

파리는 내게 첫 해외여행이었고, 미술관도 처음이었다. 루브르의 어마어마한 인파와 규모에 질려버렸지만, 초보여행자에게는 뮤지엄 패스를 포기할 배짱도 없었다. 오로지 가깝다는 이유로 선택한 오랑주리 미술관은 내게 꼭 필요한 오아시스였다.


오랑주리에 6번이나 가게 된 이유


오랑주리 미술관에 들어서면 1층에 있는 두 개의 전시실엔 오직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연작만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원래는 겨울마다 튈르리 정원의 오렌지나무를 들여놓았던 온실이었기에 이름이 ‘오랑주리’, 즉 오렌지 보관 창고다. 오렌지나무로 꽉 찼던 장소는 이제 수련 그림으로 탈바꿈 됐다. 길이가 짧게는 6m, 길게는 17m이고 높이가 2m나 되는 ‘수련 연못’ 한 주제의 작품으로 채워졌다. 그 전시실 가운데 의자에 털썩 앉아 30분간 수련 연못 속으로 빠져들었다. 눈에 차고 넘치게 그림을 담았음에도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해 제1전시실 30초, 제2전시실 30초, 이런 식으로 두 전시실을 몇 번이고 넘나들다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고작 1분이지만 수련 연작이 오롯이 나만을 감쌌던 그날의 기억 때문에 이후 오랑주리 미술관은 파리에 갈 때마다 가장 먼저 찾는 장소가 되어 지금까지 6번을 다녀왔다.


모네가 보지 못한 것


자연스레 수련 연작의 ‘프리퀄’이 궁금해졌다. 수련 연작은 모네가 노년에 지베르니(Giverny)란 도시에 정착해 집 앞에 직접 조성한 수련 연못을 그린 것이다. 연못의 실제 모습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데에는 지네르니 도착날의 흐린 날씨가 한몫을 했다. 아쉬운 마음으로 이튿날 오랑주리 미술관을 갔는데, 이번에는 흐린 날씨가 의외의 역할을 했다.


전시실 천장의 타원형 채광창은 구름의 움직임에 따라 밝았다 흐려지기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전시실의 수련도 그 빛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마치 지베르니의 연못 앞에 선 모네처럼, 내 눈은 맑은 날과 흐린 날, 각각 다른 모습의 수련 연못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상주의 대표 화가인 그가 받았던 ‘인상’이라는 영감을 고스란히 느꼈던 순간이었다. 자연 채광창을 통해 ‘빛’이라는 요소까지 전시에 고려한 오랑주리 미술관이야말로 위대한 인상주의의 작품을 감상하기에 가장 안성맞춤인 곳이다.


모네는 미술관 개관을 6개월 앞둔 1926년 12월에 유명을 달리했다. 그가 보았다면 정말 좋아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사실 노년의 모네는 눈에 큰 문제가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백내장에 걸린 채로 수련 연작을 완성했다. 오랑주리 미술관의 수련 8점은 1914년부터 1926년에 걸쳐 그려졌고 백내장 수술은 1923년의 일이었다. 당시 의술로는 수술 후 실명할 가능성이 있어서 모네 자신이 수술을 최대한 미뤘다고 한다.


수련과 나만을 위한 1분


가장 최근에 여섯 번째로 수련 작품을 방문하러 갈 때 한 가지 욕심이 생겼다. 아무도 없는 전시실에서 오롯이 홀로 수련을 관람하고 싶어진 것. 독점적으로 대관할 능력은 없으니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가장 먼저 전시실에 들어가야 한다!


거사의 때는 첫 번째 주 일요일로 정했다. 무료 개방일이라 매표소를 들르지 않고 곧바로 입장할 수 있다. 짐 보관 절차를 생략하기 위해 차림도 단출하게. 이미 다섯 번이나 보안 검색부터 입장까지의 과정을 경험했고, 입구에서 제1, 2전시실까지는 눈을 감고도 갈 수 있었다. 오픈 30분 전에 미술관에 도착하니 딱 한 사람만 줄을 서 있었다. 곧 내 뒤로 줄이 길어졌지만 문이 열린 순간 나는 결승선을 앞둔 주자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1전시실로 향했다. 줄곧 경계해 왔던 내 앞사람은 다행히 안내데스크로 갔다. 결국 나는 그날 처음 수련 전시실에 발을 디딘 주인공이 되었다. 딱 30초 동안.


30초가 지나자 뒤 주자들이 전시실로 들어왔다. 30분간 꼼짝 않고 자리에 앉게 만들었던 첫 방문 때의 속삭임과 달리 이번에는 저들을 피해 어서 옆 전시실로 가라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제2전시실에서 또 30초. 속으로 열을 세 번 세면 끝나버리는 짧은 시간이었다. 전시실이 두 개뿐이니 30초씩 곱하기 2에서 시간은 멈췄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보낸 그 찰나의 1분은 최고의 1분이었다.



'첫 번째' 일요일, '첫 번째' 손님의 특권. 30초란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무도 없는 수련 전시실을 독점했다.
두 개의 전시실에서 각각 30초씩. 1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황홀했던 순간.


DSC_0159.jpg 이윽고 뒤이어 들어 온 관람객으로 차기 시작한 전시실.




서서히 사람이 차 가는 걸 파노라마 컷으로 정리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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