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어 Vous ne serez pas déçu (실망하지 않을거에요)
* 생생한 느낌을 살리기 위해 제목에서만 최대한 실제와 가깝게 발음을 표기했고 본문에서는 외래어 표기법에 맞춰 작성했습니다. v/f는 b/p와의 발음 차이를 표시하려 제목에서는 앞에 괄호를 하나 달았습니다.
리옹은 여행하기 좋은 도시다. 눈을 부릅뜨고 실망스러운 부분을 찾으려 애써도 딱히 찾지 못할 정도로. 당시 프랑스가 월드컵에서 우승하여 도시, 아니 나라 전체에 축제 분위기가 무르익기는 했지만, 그렇지 않았어도 충분히 돌아보기 좋은 도시였다.
초행길인 나 같은 외부인의 마음에 들었으니, 여기서 나고 자란 사람이 리옹에 애정을 주는 것 역시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겠다. 물론 ‘사바사’, 사람마다 다르니 자기 고향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여행 시작 때 만난 세 명의 리오네(Lyonnais, 리옹 출신이거나 리옹에 사는 사람)에게는 도시에 대한 애정을 넘어선 자부심도 담겨있었다. “Vous ne serez pas déçu.” 자기가 사는 도시에 실망하지 않는단 말을 이렇게 서슴없이 한다는 건 분명 자부심의 표현이리라.
리옹으로 가기 전 현지 출신 친구에게 여행 정보를 얻었다. ‘리옹 가볼 만한 곳’ 검색어에 쏟아져 나오는 여러 관광지를 갈 만한 곳과 굳이 안 가도 될 곳으로 추려 주고, 리옹의 오랜 미식 문화를 간직한 부숑(bouchon, 리옹 지역 가정식 레스토랑을 지칭하는 말) 몇 군데도 추천해 준 그녀. 이어진 그녀의 마지막 메시지는 리옹에 실망하지 않을 거라는 말이었다.
항공편으로 리옹으로 넘어와 두 번째 리오네를 만났다. 리옹 태생인 <어린왕자>의 저자 이름을 딴 생텍쥐페리 공항에 도착해 시내로 가기 위해 공항철도를 타러 갔다. 직원에게 표를 사는데 리옹은 처음이냐는, 관광객에게 으레 물어볼 법한 질문을 받았다. 그렇다는 말에 여기가 관광하기엔 참 좋다고 뽐내기라도 하듯 저도 모르게 어깨를 살짝 으쓱하며 덧붙인 말, 역시 리옹에 실망하지 않을 거라는 말이었다.
연속으로 두 번이나 이 도시에 실망하지 않을 거란 말을 들으니 이번 여행에 대한 기대감은 커졌다. 숙소에 짐을 풀고 미리 주문해 둔 시티패스를 수령할 겸 벨쿠르 광장 관광안내소에 방문했다. 자그마한 카드를 내어주는 직원 역시 이러저러한 깨알 관광 팁과 맛집 몇 군데를 추천해줬고, ‘Merci’(고마워요)하고 돌아서는 내게 한마디 말을 더했다. 리옹에 실망하지 않을 거라는 말.
리오네 세 여자가 리옹에 대해 품은 자부심을 보여주는 문장 이야기를 꺼낸 김에 자신이 리옹 출신임을 자랑하려 만든 관광지 한 곳을 겸사겸사 먼저 꺼내 보겠다. 리옹 구시가지 앞을 흐르는 손강(la Saône) 바로 앞에는 시내 방향으로 난 건물 외벽 전체를 캔버스 삼아 그려둔 그림이 있다. 멀리서 보면 건물에 딸린 실제 발코니인가 착각하게끔 하는 그림인데 발코니 사이사이로 띄엄띄엄 인물도 몇몇 보인다. 작품 이름 '라 프레스크 데 리오네'에 리오네만 보더라도 리옹 출신인 인물을 그려두었구나, 그리고 이렇게 버젓이 잘 보이게끔 그렸다는 건 보통 사람이 아닌 유명인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한국 사람도 바로 알아볼 만한 리오네는 앞서 공항 이름으로 언급했던 작가 생텍쥐페리와 영화를 발명해 낸 뤼미에르 형제가 있다.
TV 채널을 돌리다 tvn의 <서울촌놈>이라는 방송을 본 적이 있다. 부산이면 부산, 청주면 청주, 지방 출신 연예인을 패널로 초대해 고향 자랑을 늘어놓는 방송이었다. 이 방송뿐 아니라 예전부터 국내든 해외든 방송 출연진이 본인이 나고 자란 도시를 자랑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긴 했지만, 이곳처럼 무려 2세기부터 현대까지의 리옹 출신 '셀럽'을 한데 모아 그려 둔 도시는 없었다. 벽화를 마주하고 나니 내게 연속으로 같은 말을 한 리오네가 느끼는 도시에 대한 애착 혹은 자부심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같은 인사말을 제외하면 타지에서 같은 문장을 연속으로 만나게 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적은 수치겠지만 그 수치도 세제곱이 되어 몸집을 부풀리고 부풀리니 리옹이란 도시에 실망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섰다. 확신은 믿는 도끼가 되어 내 발등을 찍지 않았고,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는 말도 리옹은 비껴갔다.
* 정확히는 주어와 동사가 조금씩 다른 문장이긴 하다. 친구는 내게 반말로 ‘너’라는 인칭대명사를 썼고(tu), 직원은 존댓말 2인칭 대명사(vous)를 썼기 때문. 주어에 따른 동사 변화 때문에 각각 tu ne seras pas déçu / vous ne serez pas déçu 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반말과 존댓말의 차이일 뿐 알맹이인 의미가 같으니 동일한 문장을 들었다고 했다.
가톨릭 국가가 많은 유럽을 여행하면 교회나 성당을 자주 보게 되어 리옹의 푸르비에르 성당에도 큰 기대가 없었다. 내가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서 종교 시설에 그다지 흥이 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그런 내 입에서 ‘할렐루야’가 감탄사로 나오게끔 한 곳이 푸르비에르 성당이었다. 리옹에서 가장 지대가 높은 곳에 우뚝 서 있는 건물이라 멀리서 이미 외관을 올려다보기는 했지만 성당의 외관보다도 나를 더 매료시킨 곳은 성당 내부였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유럽 여러 도시를 거치며 숱하게 봐 온 성당이랑 비슷할 거라고 시작부터 기대를 저버린 나란 녀석을 스스로 꾸짖었다. 리옹에 실망하지 않을 거라는 말을 세 번이나 듣고도 감히 실망을 미리 예견했냐며 성당도 나를 질책하듯 웅장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나를 압도했다. 그 웅장함과 화려함에 홀린 듯 성당 내부를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르겠다.
이쯤 되니 리옹을 여행하며 실망스러운 부분을 적어도 하나는 찾아내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별의별 오기가 다 있다.) 친구가 추천해줬거나 원래 가보고 싶었던 장소는 사전에 정보를 찾아볼 때 사진도 봤던 터라 실망할 여지가 별로 없었다. 그럼 아예 예정에 없던 곳을 가야겠다는 생각하는 데 손에 들고 있던 시티 패스가 보였다. 패스에 포함된 관광지를 최대한 많이 방문할수록 이득을 보는 셈이니 가 볼 생각을 미처 안 했던 관광지 목록을 훑었다. 추려낸 곳은 두 군데. 미니어처 박물관과 강제수용/레지스탕스 역사 센터였다.
미니어처 박물관의 작품은 그 크기 때문인지 처음에는 '작고 소중해' 그저 귀여워 보였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작은 체구지만 거대한 성량을 뿜어내는 가수 같았다. 조그마한 소품을 정교하게 다듬어낸 디테일에 한 번, 실제 공간의 분위기까지 각기 다르게 연출한 모습이 풍부한 성량이 되어 보는 사람을 놀라게 했다.
역사 센터는 리옹을 거점으로 나치에 대항한 레지스탕스와 수용소로 끌려간 리옹 유대인에 대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었다. 세계사 시간에 배운 세계대전 내용도 가물가물한데 한 지역에서 벌어진 세분화된 역사라니. 이번엔 실망하려나, 했지만 관람 시작 전 꼭 먼저 보라고 직원이 당부한 영상을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당시 리옹 게슈타포 친위대 책임자였던 클라우스 바르비(Klaus Barbie)의 재판 영상. 수많은 유대인, 레지스탕스 대원을 고문, 사살하는 만행을 저지른 장본인. 당시에 받은 고문이 떠올라 손을 부들부들 떨며 증언하는 생존자를 지켜보고도 바르비는 말한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바르비를 향한 분노, 피해자를 향한 안타까움이 뒤섞이며 '실망' 한 점을 찾아내려 시간을 때울 곳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집중해서 천천히 센터를 둘러보게 되었다.
예정에 없던 곳마저 실망은커녕 만족했는데 심지어 리옹에 머무는 동안 프랑스 최대 공휴일인 혁명기념일(7월 14일)이 끼어 있어 푸르비에르 대성당을 배경으로 한 불꽃놀이까지 봤으니 이 도시에 실망할 이유를 찾기가 더 어려워졌다. 처음 언급한 월드컵 경기는 혁명기념을 바로 다음 날 치러졌다. 프랑스가 우승하면서 걷잡을 수 없이 퍼진 축제 분위기가 도시 곳곳 숨겨진 '실망'을 덮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세 리오네의 실망하지 않을 거란 말은 사실이었다.
음, 굳이 실망한 부분이랄까, 실망할 뻔한 부분을 찾자면 공항철도 요금이 편도로 16로나 하는 점이 있겠고... 추천받은 맛집 '브라스리 조르주'에서 디저트로 시킨 전통 크림치즈가 입맛에 안 맞은 점 정도랄까. 근데 프랑스 교통비 비싼 건 이미 알고 있었고, 맛없는 음식 먹는다고 불평하는 미식가도 아니니 이 정도는 못 본 척 눈감아 주자. 누군가 리옹에 가겠다고 하면 이제 나도 이 말을 덧붙일 것 같다.
"Vous ne serez pas déç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