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알롱제 글라세 vs. 아이스 아메리카노

프랑스어 Café allongé glacé (아이스 아메리카노)

by Fernweh

말을 모으는 여행기, 말.모.여. 2)


프랑스어 Café allongé glacé. [꺄(f)페 알롱줴 글라쎄] n. 아이스 아메리카노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요.”

라고 주문받은 프랑스 현지 웨이터의 낯빛과

“Deux cafés, s’il vous plaît” (커피 두 잔이요)

프랑스에 여행 온 친구 대신 주문해 준 커피를 받아 든 친구의 낯빛은 비슷했다.


* 생생한 느낌을 살리기 위해 제목에서만 최대한 실제와 가깝게 발음을 표기했고 본문에서는 외래어 표기법에 맞춰 작성했습니다. v/f는 b/p와의 발음 차이를 표시하려 제목에서는 앞에 괄호를 하나 달았습니다.


나는 ‘얼죽아’다. 얼어 죽어도 얼음을 가득 넣은 차가운 커피를 마신다는 으스스한 사람이니 펄펄 끓는 여름날의 필수품 역시 아이스 아메리카노다. 이 메뉴를 프랑스어로 말하면 ‘카페 알롱제 글라세’(Café allongé glacé)다. 카페라는 장소를 뜻하기도 하지만, 음료를 지칭할 땐 에스프레소 샷을 뜻하는 ‘카페’에 길쭉하게 늘였다는 형용사 ‘알롱제’가 붙는다. 커피를 늘이려면 물을 부으면 되니 이 두 단어만 말하면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된다. 즉, ‘뜨죽아’-더워 죽어도 뜨거운 아메리카노 -들은 형용사를 하나만 붙이면 주문 끝. 물을 넣어 길어졌다지만 아직 뜨거운 커피를 차갑게 만들기 위해 ‘글라세’라는 또 다른 형용사를 붙인다. 얼음을 넣는다는 뜻. 속속들이 파헤쳐보면 너무나도 직관적인 메뉴 이름이라 외우기도 그리 어렵지 않다. 메뉴 이름 주제에 여덟 음절이나 되니 까다로워 보이지만 요즘 그보다 더한 메뉴 이름도 차고 넘친다. (얼마 전 카페에 갔을 때 본 할로윈이랍시고 출시한 '리틀 위치 할로윈 크림 프라푸치노'같은 메뉴. 무려 14음절이다.)


프랑스로 가는 비행기에서 이 여덟 음절을 열심히 외워 로컬 카페에서 주문해보자. 우리말로도 무작정 "아이스 아메리카노!"라고 주문하면 점원이 속으로 욕할 테니 앞, 뒤로 단어 하나씩을 덧붙인다. “엉 카페 알롱제 글라세 실 부 플레(Un Café allongé glacé, s’il vous plaît).” un은 한 개, s’il vous plaît는 ‘please’를 뜻한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라고 주문받은 현지 직원은 이 커피를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재빠르게 궁리할 것이다. 상상으로도 메뉴를 못 만든다면 죄송하다, 그런 메뉴는 없다고 할 테고, 그 나름대로 친절을 발휘해 메뉴를 ‘개발’해준다 한들 우리가 아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아닐 확률이 높다. 실제로 프라페처럼 얼음을 넣고 간 커피를 받은 적도 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유래를 떠올려 보면 왜 유럽에서 우리가 떠올리는 ‘아아’를 쉽게 마시기 힘든지 알 수 있다. America, 즉 미국이란 이름을 딴 메뉴인 게 아주 잘 드러나는 단어가 아메리카노 아닌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이탈리아에 온 미군에게는 유럽식 ‘카페’(에스프레소)가 너무 쓴 탓에 물을 넣어 희석해 마셨고 그게 바로 아메리카노의 유래라고 한다. 애초에 유럽 사람을 위해 고안한 메뉴도 아니거니와 현지인에게 사랑받기는커녕 철저히 외면당한 메뉴였다. 스타벅스가 번번이 이탈리아에 진출하지 못하다가 2018년에야 겨우 1호점을 내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뜬금없이 이탈리아 이야기지만 커피를 바라보는 프랑스인의 시각은 이탈리아인과 대동소이하기에 프랑스에서도 ‘한국식 아아’는 보기 힘들다. 물을 탄 커피도 맹물 취급하는데, 얼음까지 넣는다니. 그들의 시각에선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나마 커피는 따뜻하게 마시는 음료로 취급받고 이탈리아인만큼 정통 커피 문화에 집착하지 않는 프랑스인은 따뜻한 아메리카노(Café allongé)는 자주 마신다. 그래서 카페 음료 메뉴에 알롱제까지는 있지만 알롱제 글라세는 잘 없다. 아메리카노 말고도 다른 음료도 마찬가지. 따뜻한 카페 라테는 있고 차가운 카페 라테는 없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더니 프라페처럼 만든 음료를 받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아이스 라테를 시켰더니 카페 직원은 카페 알롱제 한 컵과 차가운 우유 한 컵을 같이 내어 줬다. (에스프레소+물+우유 조합의 맛을 상상해보길.)


한 가지 다행인 건 프랑스 파리가 우리나라에 비해 덥지 않은 것. 아니, 정확히는 습하지 않다. 온도는 똑같이 36도라도 건조하기 때문에 그늘로 들어가면 달아오른 열기가 금세 식는다. 파리에서의 여름은 한국식 아아를 마시기 어려워도 버틸만했다. (기후변화 때문에 좀 더 혹독한 여름이 되어 가기는 하지만) 물론 여행 목적으로 파리를 찾은 사람이 에스프레소에 적응하기엔 좀 더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어학연수 당시 파리에 놀러 온 친구와 카페에 가서 차가운 커피 대신 에스프레소 두 잔(Deux cafés)을 시켰을 때 친구 표정은 딱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는 메뉴 주문을 받았던 웨이터의 표정과 똑같았다. 내가 '얼죽아'인 걸 알고 있던 친구라 커피나 한잔 하자는 말에 '아이스'가 생략됐다고 여긴 것이다. 능청스럽게 각설탕을 넣어주며 마셔 보라고는 했지만 만 걸음 가까이 걸어 다녀 지친 친구에게는 에스프레소가 아닌 차디찬 음료가 절실했다. 그런 친구에게 덧붙인 한마디. “여기서 아아 마시려면 스타벅스 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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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fé (왼쪽) / Café allongé (가운데) / Café allongé glacé (오른쪽, 로컬 카페에는 잘 없는 메뉴라 스타벅스로 가야 한다.)



'아아' 없는 삶에 적응한 내게도 여름에 떠난 남프랑스 여행은 쉽지 않았다. 서울보다 부산이 덥고 습하듯 프랑스 남부가 파리보다 더 덥고 습하다. 남프랑스에 간 건 2013년. 수도인 파리에도 아직 스타벅스 매장이 많지 않았을 때니 남프랑스에는 거의 전멸 상태였다. 툴루즈, 아를, 엑상프로방스를 차례차례 넘으며 더위에 허덕일 때도 버틸 수 있던 건 내가 여행하는 도시 중 유일하게 스타벅스 매장이 있던 마르세유 때문이었다. (당시 마르세유도 지점이 딱 한 군데였다) 마르세유에 도착해 가장 먼저 간 곳이 여느 관광지가 아닌 스타벅스였고 벤티 사이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흡입’하고 나서야 그간의 여독을 풀 수 있었다. 아아 없이도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쩔 수 없는 얼죽아임을 실감했다. 여담이지만 프랜차이즈 카페인 스타벅스도 현지화되어 아이스 커피를 주문하면 프라페처럼 만들어 주지는 않을까 걱정할 수도 있지만 그럴 필요는 전혀 없다. 메뉴판에 버젓이 Café allongé glacé가 아닌 Iced amercano라고 적혀 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애타게 찾던 친구에게 스타벅스를 가야 한다고 말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아메12.jpg 마르세유에 도착하자마자 벤티 사이즈 '아아'를 마셨다. (옆엔 기념품으로 산 수제 비누)



그리고 2018년 다시 남프랑스에 갔다. 5년 전에 비해 남부에도 스타벅스 매장이 많이 생기긴 했지만 엑상프로방스 같은 소도시에 별다방을 꿈꾸기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엑상프로방스 관광청에서 운영하는 발랑솔(Valensole, 양 옆으로 펼쳐지는 라벤더 밭이 있는 도시) - 무스티에 생트 마리(Moustiers-Saint-Marie,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꼽힌 도시) - 베르동(Verdun, 천혜의 협곡을 끼고 있는 도시)을 거치는 종일 투어 후 다시 엑상프로방스 시내로 돌아왔을 때 이미 내 ‘아아력(力)’은 이미 고달되었다. 프랑스 커피 문화에 적응했다지만 36.6도에 달하는 더위에 에스프레소는 그 맛만큼이나 쓰디쓴 사약처럼 느껴져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커피 대신 평소에 거의 안 마시는 에이드나 주라도 마셔야 할 기분이라 미라보 광장에서 왼쪽, 촘촘히 얽힌 좁은 골목 어귀의 한 카페에 들렀다.


음료를 고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카페 알롱제 글라세’가 있냐고 물었다.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혹시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파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은 거냐고. 메뉴를 지칭할 때도 형용사 알롱제와 글라세가 붙은 카페가 아닌 미군이 물로 희석했다는 아메리카노라고 말한 걸 보아 부연설명을 하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얼음 동동 띄운 커피를 만들어 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직원은 20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어린 친구라 아메리카노를 유럽 커피 문화에 반(反)하는 검은 물 따위로 보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고객의 니즈에 응한다고 속으로 칭찬까지 했다. 근데 파리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 해 현지 친구를 만났을 때 친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 그거 하루 종일 마시게?” 젊어도 커피란 자고로 에스프레소라고 생각하는 프랑스 사람이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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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ensole (왼쪽) / Moustiers-Saint-Marie (오른쪽)
아메8.jpg Verdon (베르동).
위 세 도시를 거치는 긴긴 투어 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찾는 한 마리 하이에나가 되어 엑상프로방스 골목을 어슬렁거렸다.


흔하디흔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뭐라고 인증샷까지 남겼다. 기대도 안 한 곳에서 한국식 아아를 찾은 게 어지간히 기뻤나 보다. 거의 애증의 관계가 되어 버려 잊으려야 절대 잊지 못할 말, 카페 알롱제 글라세.


그러니까 저 단어만 안다고 한국식 아아를 프랑스에 갔을 때 아무 데서나, 아무 때나 마실 수 있는 건 아니다. 파리 같은 대도시에선 스타벅스로 가서 한국에서처럼 iced americano를 시키면 되고(혹은 얼음을 넣는다는 형용사 글라세를 붙여 아메리카노 글라세라고도 한다), 작은 도시에선 로컬 카페에 가 일단 카페 알롱제 글라세라는 말을 뱉어보면 나처럼 '아아'를 마시게 되는 행운이 따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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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선 여름날 에스프레소도 괜찮았지만 훨씬 더운 남프랑스에선 결국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흡입'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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