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치볶음과 두리안과 두부장조림

고맙고 괜찮다는 프랑스어 반찬 삼총사

by Fernweh

말을 모으는 여행기, 말.모.여. 1)


프랑스어 “Merci beaucoup” [메ㅎ씨 보꾸]

“De rien” [드 히앙]

“Je vous en prie” [쥬 (v)부 장 프히]

expr. 고맙습니다 / 천만에요.


* 생생한 느낌을 살리기 위해 제목에서만 최대한 실제와 가깝게 발음을 표기했고 본문에서는 외래어 표기법에 맞춰 작성했습니다. v/f는 b/p와의 발음 차이를 표시하려 제목에서는 앞에 괄호를 하나 달았습니다.


그나마 두리안은 동남아 열대 과일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지만 멸치볶음과 두부장조림은 이국적인 냄새조차 나지 않는 우리네 반찬인데 프랑스어라니, 무슨 궤변인가 싶다. 파리 여행 중 편집숍 ‘MERCI’에 다녀왔거나 프랑스어를 조금이라도 접했다면 멸치볶음 정도는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다. 정말 고맙다를 프랑스어로 ‘merci beaucoup’라 하고 발음은 ‘메르시 보쿠’다. 그냥 들어도 멸치볶음으로 들릴 정도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진다.

merci1.jpg 파리 여행 중 한번쯤 가봤을 유명 편집숍 MERCI. 여기는 멸치라고 하지 말길...


과장하자면 가래 뱉듯 내야 하는, 성대를 긁어서 내는 프랑스어 R발음은 한번쯤 고맙다고 ‘merci’라고 해보려는 가벼운 마음으로 온 여행자에겐 다소 까다롭다. 그럴 땐 보다 친숙한 영어 R발음으로 ‘메르시’라 하는데 좀 더 멸치볶음처럼 들리게 된다. 빼빼 마른 한 개그맨이 본인을 멸치에 비유해 메르치라고 부르는 유튜브 영상을 우연히 봤는데 그 별명을 빌자면 시와 치는 자음 하나만 다르니 충분히 멸치볶음으로 들릴 수 있다.


누군가 고맙다고 멸치볶음을 권했을 땐 두리안과 두부장조림 중 한 가지 반찬만 권해야 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하나만. 그런데 흰 쌀밥 위에 반찬 두세 가지를 듬뿍 얹어 먹는 맛이 더 기가 막힐 때가 있지 않은가. 상대방이 베푼 선의에 하나만 주면 정(情) 없다고 덤을 더 얹어서 돌려주는 정이 있는 한국 사람에게 반찬 한 가지도 더 곁들일 수 없는 프랑스어 반찬 시스템은 야박해 보인다. 멸치볶음을 두리안으로 응수하든 두부장조림으로 응수하든 두 가지 모두로 응수하든 그건 주는 사람 마음이겠지만 정이 없는 야박한 시스템에도 예의는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두리안은 '먹는' 사람에게, 두부장조림은 '드시는' 사람에게 권해야 한다. 먹는다는 반말이고 드신다는 존댓말이니 이제 감이 올 것이다. 감사 인사에 대한 you’re welcome(우리말 ‘천만에요’는 잘 안 쓰니 영어 표현을 인용)이 불어로 ‘de rien[드 리앙]’과 ‘je vous en prie[주 부 장 프리]’이다. 드 리앙-그러니까 두리안-은 반말이고 주 부 장 프리-그러니까 두부장조림–은 존댓말이니 섞어 쓸 수 없다. 물론 두리안의 고약한 냄새 때문에라도 다른 반찬을 섞기는 좀 께름칙하다.


친구끼리는 멸치볶음과 두리안이, 초면이거나 어른과 아이의 대화에서는 멸치볶음과 두부장조림이 오간다. 다만 프랑스어는 존댓말이 우리말에 비해 덜 엄격해서 초면이어도 비슷한 또래에겐 “우리 말 놓을까?” 따위의 형식치레 없이 바로 두리안으로 답하기도 한다. 파리에서 유명 빵집을 들러 에클레르를 산 후배를 만나러 간 날이었다. 빵집에 따로 먹을 곳이 없어 바로 옆 카페로 갔다. 커피를 시키며 직원에게 옆에서 사온 디저트를 같이 먹어도 되냐 했더니 흔쾌히 그러라면서 앞 접시와 포크, 나이프까지 내어주었다. 그냥 멸치(merci)로는 그 친절에 제대로 화답하지 못할 것 같아 우린 멸치를 볶았다.(merci beaucoup) 멸치볶음을 받은 직원은 자기나 나나 또래라 생각했는지 두부장조림 대신 두리안(de rien)이라 했다. 불어를 모르는 친구가 대화를 듣다가 멸치볶음, 두리안이 도대체 뭔 말이냐고 내게 물어봤으니 ‘de rien’ 발음도 충분히 두리안을 연상시킨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도 R을 성대 긁는 불어 대신 버터 바른 영어로 발음하면 두 소리는 거의 비슷하다. (드리앙, 두리안. 비슷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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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볶음에 대한 대답은 반말로 두리안이거나 존댓말로 두부장조림. 단번에 외워지는 기초표현이다.
표의 두 번째, 세 번째에 써 있다.

두부장조림은 약간의 억지가 필요하긴 하다. 발음이 완벽히 겹치는 글자는 부 한 글자 뿐. 첫 글자 주(je)가 두가 되는 건 간혹 ‘주세요’를 애교를 섞어 말하면 ‘뚜떼요’라고도 하니 두처럼 들린다고 하겠다. 다음 글자 장의 원어 표기는 en. 지읒 음가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알파벳 e와 n이 지읒 소리라니. 불어를 아무리 모른다 한들 아무도 믿지 않을 말이다. 발음 기호를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한글로 적어도 '앙'이다. 영어 알파벳 H와 똑같이 생겼지만, 키릴문자에서는 'ㄴ'에 해당하는 글자가 되는 사례처럼 en이 ‘장’ 발음이 되려면 쓰는 문자 자체가 아예 다를 때나 가능한 일이다. '장' 소리가 나는 이유는 바로 연음 법칙 때문. 프랑스어는 모음으로 시작하는 단어가 앞 자음과 이어져서 발음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연음이라 부른다. 이 때문에 부(vous)의 끝 글자 s가 en에 부드럽게 이어져 장이란 소리로 탈바꿈한다. Je vous en prie 속 단어의 발음 기호를 따로따로 보면 '앙'이지만 문장 전체 발음 기호에는 ㅈ과 앙을 이어서 발음하라는 표시가 되어 있으니 정확히 '장'이 된다. (z‿ɑ̃) 그나마 이 세 글자는 큰 억지를 안 부려도 될 정도다.


문제는 마지막 두 글자 프리(prie). 프리와 조림. 소리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끝 글자 리와 림은 받침의 유무 차이 정도로 볼 순 있지만 전체적으로 비슷한 소리라고 하긴 힘들다. '주부장'과 '두부장'은 모음 조합이 완벽하게 일치하지만, 이 경우 하나는 'ㅡ'와 'ㅣ', 다른 하나는 'ㅗ'와 'ㅣ'로 모음 조합마저 달라 소리만 가지고 비슷한 발음이라고 끼워 맞추기가 힘들다. 멸치볶음, 두리안 모두 먹거리였으니 앞 글자 ‘두부장’을 먹거리로 만들도록 억지로 반찬 한 가지를 떠올렸더니 두부장조림이 됐다. (물론 두부장이라는 반찬도 있지만 주부장프리와 맞게 다섯 음절로 맞췄다) 조금 억지스럽더라도 이 정도는 눈 감아 주는 거로... 이렇게 쓰고 보니 이 말이 과연 너무 억지인지 아닌지 궁금해졌다. 멸치볶음에 두리안으로 응수한 카페 직원이 더욱 정중한 태도로 “je vous en prie”하고 높임말을 썼다면 친구가 두부장조림은 무슨 말이냐고 물어봤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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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먹거리 이름으로 한국어 표현을 재미있게 본따 보려다가 아재개그가 될 것 같아 그만두기로.


파리에서 누군가에게 호의를 받으면 멸치를 볶아 보자. 반대로 멸치볶음을 받았을 때는 두리안이나 두부장조림을 건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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