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VV ㅅㅅ 10화

V.V, ㅅ.ㅅ

(9) BUCUREŞTI

by Fernweh

BUCUREŞTI


시내의 산책자로서 여행하려면 한 도시에 머무르는 기간을 넉넉히 잡아야 한다. 유명 관광지만 보고 오는 게 아니라 시내 구석구석을 탐방해야 하니까. 다행히 주어진 기간 내에 최대한 많은 나라나 도시를 보고 와야 한다는 강박감이 없어서 늘 여행으로 간 도시에 머물 수 있는 만큼 머물고 오는 편이다.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도 일주일간 머물 예정이었다. 계획을 짜다가 막판에 이틀이 줄었다. 그마저도 5일 중 이틀은 근교 도시로 당일치기 여행을 갈 거라 부쿠레슈티에 머무는 건 고작 3일이었다. 그곳에서 체류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을 만큼 줄이라고 일러준 건 다름 아닌 그곳에 오래 살았던, 파리 어학원에서 만난 루마니아 친구였다.


친구가 나고 자란 고장은 루마니아 서북부 ‘클루지나포카(Cluj-Napoca)’라는 곳이지만, 성인이 되고 난 후, 남자친구를 따라 파리로 오기 전까지 부쿠레슈티에서 살았단다. 그녀의 나이와 파리에 온 연도로 어림잡아 따져도 10년은 부쿠레슈티에 산 셈이었다. 고향 도시와 수도 간의 외지인은 모르는 지역감정이라도 있는 건가. 루마니아에 간다는 내게 콕 집어 부쿠레슈티는 볼 게 없다고 대놓고 말하던 그녀였다. 그래도 ‘동유럽의 파리’라는 별명이 있지 않으냐고 반문했더니 콧방귀를 낀다. 친구의 반응은 부산 감천마을에 적힌 홍보 문구 ‘한국의 마추픽추’를 본 부산 출신 지인이나 철원 직탕 폭포를 두고 ‘한국의 나이아가라’라고 하는 걸 들은 철원 출신 지인이 내보인 반응과 흡사했다. 부쿠레슈티에 도착하자마자 나 역시 콧방귀를 끼었으니(심지어 이 여행 전까지 난 파리에 살았다) 동유럽의 파리라는 별명은 금기어로 두든지 부다페스트나 프라하에 별명을 넘기는 쪽이 적절해 보였다.


부쿠레슈티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동유럽의 파리로 불렸을 소싯적의 흔적이 보이기는 한다. 구시가지라고 표시된 우니리(Unirii) 광장 근처에는 ‘#유럽 감성’이 달릴 법한 건물이 꽤 남아 있었다. 양파 모양의 유리 돔이 가운데 볼록 솟은 중앙은행 건물은 파리의 그랑 팔레를 연상케 했다. 숙소를 이 근처로 할 걸 그랬나… 내가 예약한 호텔이 있는 시가지는 파리 감성과는 거리가 먼, 칙칙하고 딱딱한 분위기였다. 공산 정부를 거치며 소련의 건축 스타일에 영향을 받아 크고 웅장하지만 잿빛의 각진 건물이 날을 세우던 시가지였다. 하필 첫인상이 잿빛이라서 도시를 부정적으로 묘사할 때 자주 쓰이곤 하는 ‘회색 도시’라는 명칭이 부쿠레슈티에 따라붙었다. 이러한 잿빛 건축 양식의 진수라도 되는 양, 도심 한복판에 거대하게 지어진 인민궁전을 본 후엔 그나마 구시가지에서 찾았던 도시의 감성마저 짓밟혔다.


그래도 역사의 흐름이 건축물이든 유적이든 도시 안에 어떠한 발자취를 남긴 것을 보는 재미는 쏠쏠했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지만, 드라마틱하게 바뀌는 건 강산 같은 자연보다는 도시의 모습이리라. 루마니아 역사를 살펴보니 공산주의와 차우셰스쿠의 독재 정권이 삼십 년 정도 나라를 지배한 듯했다. 십 년간 바위가 풍화작용으로 깎여도 고운 모래 입자까진 될 수 없다. 그렇지만 동유럽의 파리라던 부쿠레슈티는 삼십 년 역사의 풍화작용으로 전형적인 동구권 도시의 모습이 되고 말았다. 회색 도시라는 말. 탁 트인 자연과 달리 빽빽한 건물에 둘러싸인 이미지를 어둡게 표현한 말이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비극의 역사를 흉터처럼 품어내는 도시를 일컫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인상이 다소 실망스러운 도시를 여행할 때도 잿빛 꺼풀 안에 담긴 역사의 한 켠을 마주하곤 한다. 그때 알게 된 역사나 일화를 여행 후에 잊을지언정 그걸 마주하는 순간만큼은 기억에 짙은 인상을 남긴다. 특히 외지인의 시선에서는. 어쩌면 저런 인상 깊음을 기대해서 자연보다는 도시로 자꾸만 가려고 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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