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SOFIA
시내 산책의 즐거움이 크다지만, 도시의 넓은 땅덩이를 두 다리로만 다닌다는 건 참으로 무모하고도 어리석은 짓이다. 간혹 홀린 듯 작정하고 산책을 해보겠다고 오래 걷는 경우가 있기는 하나 기껏해야 한 시간이다. 잠시 걷기에 미친 저런 때를 제외하고는 대중교통을 탄다. 다른 도시에서 타는 대중교통은 내게 도시 여행의 쏠쏠한 맛을 선사한다. 그런데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의 대중교통은 쏠쏠한 맛은 무슨, 씁쓸한 맛만 선사했다.
외지인의 눈으로 노선이 몇 개인지 가늠도 안 될 만큼 무수한 선이 얽히고설킨 수도권 지하철 노선이지만,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탓에 복잡하긴커녕 눈 감고도 타고 다닐 경지에 올랐다. 처음 버스와 지하철을 탔던 건 초등학교 3학년. 그때부터 이십 년 넘도록 무수히 대중교통을 타며 쌓아온 노하우 덕에 웬만한 도시의 대중교통은 생각보다 금방 섭렵할 수 있었다. 승차권 유형부터 개찰구 유형까지, 꽤 긴 세월을 거치며 변모하는 시스템을 체득했기에 여행하는 데 있어 대중교통으로 고생한 적은 없었다. (파업 등으로 교통편이 끊긴다거나 하지 않는 이상) 그런데 소피아의 대중교통 시스템은 그야말로 잡탕이었고, 시내로 가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 잡탕 속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지하철 노선은 꼴랑 두 개. (2021년 현재 4개로 늘었다) 시내를 더 촘촘히 잇는 트램은 노선이 더 많았지만 숙소에서 시내로 나갈 때 타는 노선 하나만 기억하면 됐기에 어려울 게 전혀 없었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지하철이나 트램까지 오르기까지가 장애물이었다. 바코드가 인쇄된 종이 승차권인 1일권은 탈 때마다 바코드 인식이 안 돼서 날 당황시켰다. 이건 뭐 장애라고 하기도 우습다. 매번 개찰구로 가서 표를 바꾸는 수고는 해야 했지만. 그러고 보니 애초에 사려던 건 3일권인데, 이건 지하철 매표소에서만 판매하고 오로지 지하철만 탈 수 있다길래 1일권을 산 것이었다. 1일권은 모든 교통편에서 쓸 수 있고 3일권은 지하철만 쓸 수 있게 한 의도가 뭘까. 도대체.
주머니에서 짤랑거리는 동전을 다 써 버릴 요량으로 지하철 매표 기계를 지나다가 표를 잔뜩 사 두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트램을 탔을 때 검표원이 날 붙잡았다. 종이 승차권의 경우 수동으로 ‘펀칭’(자체 개표)을 해야 했는데, 이런 것도 이미 다른 유럽 도시에서 해본 거라 분명 잊지 않고 펀칭까지 했었다. 3일권에서 힌트를 얻었어야 했다. 지하철’만’ 탈 수 있다는 그 조건. 지하철 1회권으로는 트램을 탈 수 없다. 카드 한 장이면 버스고 지하철이고 다 타게끔 해 놓은 도시에 살다 보니 간과한 부분이었다. 당시엔 ‘뭐 이런 시스템이 다 있지’ 하고 기함했지만, 교통 카드란 게 없던 어렸을 적을 떠올리니 내 자만이었음이 분명해졌다. 그땐 서울에서도 지하철 표로 버스를 타진 않았으니까.
이튿날도 개찰구의 빗장은 쉬이 내게 길을 터주지 않았다. 1일권이 개시 후 24시간 동안 쓰이는 경우도 있지만, 이곳의 1일권은 날짜 기준이라 또 바코드가 인식되지 않는 해프닝은 아니었다. 지난 번에 미리 사 둔 표를 쓸 수 없어서였다. 지하철 표로 지하철만 탈 수 있다더니 지하철마저 탈 수 없는 건 뭐람. 구입한 표는 30분 이내에 사용해야 한단다. 당황을 넘어서 실소가 나올 지경이었다. 이걸 문화 충격이라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충격적인 규칙이었다. 소비자의 권리에 포함되는 사용의 권리에 시간제한이 꼬리표처럼 달려 있을 줄이야. 하긴, 요즘 시대에 동전 써버리겠다고 표를 무더기로 사놓는 사람도 없겠다마는... 아무튼 소피아 시장이 이효리가 아닌 건 천만다행이다. 적어도 ‘Just one ten minute’을 흥얼거리며 10분 내에 타라고 독촉하진 않으니까. 거의 뭐 도둑놈 심보라 이곳을 소피아 말고 마피아라 부를 뻔했다.
관광지랄 데가 뻔해서 트램과 지하철만 있어도 다 둘러볼 수 있었지만 약간 떨어져 있는 국립 역사박물관에 가보고 싶어서 용기를 내 버스도 타 보았다. 버스는 탈 때 기사에게 표를 살 수 있어서 탈 때부터 한바탕 법석을 떨지 않아도 됐다. 갈 때는 헐어 빠진, 노선도마저 제대로 보이지 않는 폐차 직전의 버스를 탔다가 돌아올 때는 서울 버스랑 비교해도 손색없는 신식 버스를 탔다. 트램도 마찬가지였다. 겉모습만 신식과 구식이 섞여 있는 게 아니라 그 안의 시스템도 구식과 신식을 모두 뒷받침할 수 있도록 구비돼 있었다. 종이 승차권을 수동으로 펀칭할 수 있는 기계, 카드 승차권 사용자(보통 현지인)를 위한 태그 기계가 나란히 있기도 하고, 구식 객차에선 기사에게 직접 표를 샀지만, 신식 객차는 차내에도 매표 기계가 마련돼 있었다. 신식 트램은 전부 저상 트램인 것도 신기했다. 구식을 신식으로 점차 개조하는 동안 장애인 처우 개선도 같이 이루어졌나 보다. 혼돈의 도가니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 차츰차츰 적응해 나가니 온갖 교통 시스템을 접할 수 있는 소피아 여행이 퍽 재미있었다.
“지방 사람들도 소피아 와서 대중교통 탈 때 한 번씩 낭패를 겪곤 해. 하하하.”
뒤늦게 이 말을 전해온 불가리아인 친구의 마지막 웃음소리가 비웃음처럼 들리긴 했지만, 그 소리마저 지금은 재미로 남았으니, 그걸로 됐다.
아, TMI지만, 소피아 대중교통을 타면 겪을 일화를 불가리아어와 접목해 쓴 에세이는 페른베라는 작가의 <말을 모으는 여행기>에도 실려있다. 여러 독립서점의 스마트 스토어에서 살 수 있다는데... (미리 감사합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