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EDINBURGH
오랜 친구를 만나서 밤을 새우다 돌아가는 길목에
언젠가 만났던 겨울 바다가 허전했던 그 곳이 그리워져…
- 빅마마 3집 <바다로 간 어느 날>
복작거리는 시내에서 인파에 치이다 한적한 장소로 갈 때마다 떠오르는 노래 속 한 구절. 제목처럼 꼭 바다에 가지 않더라도 삽시간에 주위가 한적함으로 휩싸일 때면 늘 이 노래를 흥얼거린다. 밤새울 만큼 주고받을 말이 많은 오랜 친구와의 유난스러운 수다 후에 겨울 바다처럼 적적한 곳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나다. 인간관계에 있어 외향적인 척하지만, 뼛속까지 내향적인 인간. 그래서 간헐적으로 주변을 허전하게 만들어 혼자만의 시간에 갇혀야만 하는 유(類)의 사교적이지 못한 인간인 바로 나.
도시의 여행자라고 하면 많이들 사람 많은 데 쏘다니면 스트레스받지 않느냐고 묻는다. 스트레스, 물론 받는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조금 전에 썼다가 인파에 휩쓸려도 아무렇지 않다고 쓰면 영 앞뒤가 안 맞는다. 도시 여행 중 인파에 뒤섞이더라도 평소보다 그나마 덜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는 여행지에서 마주하는 인파가 완벽한 타인, 그러니까 말조차 통하지 않는 타인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여행이 끝나면 떠나버리고 마는 철저한 이방인일 뿐이다. 한국에서보다 외국에서 인파에 휩쓸려도 편안함을 느끼는 건 이방인으로서 혼자 남겨지는 걸 평소에 원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행에 와서는 사람 많은 도심 속으로 파고드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서울에선 붐비는 것도 모자라 대기 줄까지 만들어 내는 맛집과 카페엔 얼씬도 하지 않는 내가 해외에선 무려 축제의 현장에 뛰어들곤 한다. 3년 전 8월, 뒤도 안 돌아보고 에든버러로 간 건 예술 축제로는 세계 최대 규모로 꼽히는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을 보기 위해서였다. 처음 3일간은 축제를 제대로 즐길 요량으로 다양한 거리 공연이 곳곳에서 매 시각 펼쳐지는 시내 한복판의 로열 마일(Royal Mile)에 숙소를 잡았다. 방만 나서면 축제의 열기 속으로 빨려들었다. 열기는 이내 방 창문 너머로 흘러들었다. 이틀째까지 적당하다고 느꼈던 열기에 3일째 되던 날, 데고 말았다.
지정된 구역에서 펼쳐지는 거리 공연은 하나하나가 다 독특하고 재밌었다. 몇 걸음 못 가 멈추고 공연을 보다가 노래가 들리는 곳으로 넘어 가 밴드 연주를 듣다가 다시 또 몇 걸음 못 간 곳에서 다른 공연을 보는 걸 반복했다. 축제의 광란에 도취해 영어도 못하는 주제에 인포메이션 센터에 들러 연극도 한 편 덜컥 예매했다. 낮 시간임에도 작은 소극장은 만석이었다. 내가 인파를 따라다니는 건지 인파가 나를 따라오는지 모를 만큼 가는 곳마다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많기만 많을 뿐 여행지의 철저한 이방인으로서 군중 속의 고독을 즐기고 있었다. 간혹 말을 걸어오는 이가 있었지만 애처로운 영어 실력 덕분에 고독한 이방인의 면모를 유지할 수 있었다.
얼마 전에 읽은 책*에는 우기에 동남아를 여행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관광 명소 중 한 곳인 대나무 다리를 애타게 찾아 헤매는 데도 보이지 않아 주변을 배회했는데, 알고 보니 다리가 비에 잠겨 있었다고 한다. 건기(성수기)였다면 볼 수 있었을 거라고 아쉬워했지만 우기(비수기)라서 사람에 치이지 않고 느긋하게 여행할 수 있다는 문장이 그 아쉬움을 달랬다. 에든버러 페스티벌 3일 차의 내 심정이 딱 그랬다. 비가 퍼부어서 인파가 쓸려 가길, 관광지고 페스티벌이고 비에 잠겨 버리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3일간 식사도 편히 하지 못했다. 일대의 식당은 늘 붐벼서 가는 곳마다 자리가 없었다. 밥은 됐고 커피나 마시자고 카페로 가도 자리는 없었다. 허기진 배를 조금이라도 채우겠다고 비스킷과 커피를 테이크아웃해 근처 벤치에 앉아 먹었다. 철저한 이방인은 무슨, 처량한 이방인이다. 그 와중에 무슨 생각이었는지 JK 롤링이 해리포터를 집필했다는 카페도 가봤다. 정말 가서 ‘봤다’. 그게 끝이었다. 자리가 없었으니까. 저녁엔 삼십 분이나 기다려 들어간 식당의 가성비가 꽝이라서 헛배 부른 채 식사를 마쳤다. 차라리 오후에 벤치에서 커피에 곁들여 먹은 엠파이어 비스킷이 더 맛있을 지경이었다. (저건 진짜 맛있다.)
*스물 아홉, 나의 캄보디아 NOT STAY / 김철중 저
이렇게 지칠 거란 걸 예상이라도 한 걸까. 남은 일주일간의 숙소는 시내에서 버스로 삼십 분이 넘게 걸리는 한적한 주택가의 에어비앤비로 잡아 두었다. 하루아침에 천지개벽이 이루어졌다. 시끌벅적한 광란의 도가니가 평화롭기 그지없는 골짜기로 변했다. 주변 공기가 한결 차분해졌는데도 마음은 들뜬 건 지도를 훑다가 발견한 도보 이십여 분 거리에 있는 바다였다. 순간 글 첫머리에 실은 노래가 떠올랐다. 가사에선 겨울 바다를 찾지만 조용한 동네 어귀, 이름 모를 한적한 바다라면 어느 계절이든 상관없다. 밤새워 놀다 흥에 지친 마음을 쓰다듬어줄 허전함만 있으면 됐다. 초행길이라 그런지 가는 길은 멀게만 느껴졌다. 체감상 너무 오래 걸었다고 느껴질 즈음 바다가, 바다에 나란히 놓인 산책로가 등장했다. 보자마자 노래의 후렴구가 떠올랐고 그게 끊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멈추지 않고 산책을 이어 나갔다.
말이 없던 그 곳에 할 수 없던 말들만
그 파도 속에 물거품 속에 다 던지고 묻어두고 뒤돌아서도
낯선 장소에서 낯설지 않은 일상을 지속하는 도시 여행의 감칠맛에 축제의 열기라는 조미료를 너무 들이 부었나. 자극적인 뒷맛을 우연히 만난 허전하리만치 한적했던 바다 속에 다 던져 버리려 했으니 처량한 이방인은 처절한 이방인이기도 했다. 도시의 여행자라고 자칭하면서도 가끔 자연을(적어도 바다를) 갈구했다는 건 좀 새삼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