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VV ㅅㅅ 07화

V.V, ㅅ.ㅅ

(6) ZADAR

by Fernweh

ZADAR


‘VV’, ’ㅅㅅ', 즉 ‘도시의 여행자’ 혹은 ‘시내의 산책자’ 콘셉트에 맞는 이야기를 담다 보니 도시형 여행자의 이미지보다 자연 회피형 여행자처럼 그려지는 듯해 도심보다 자연에 더 가까이 닿아 있는 크로아티아의 한 도시 이야기를 꺼낸다. 위아래로 길쭉하게 뻗은 크로아티아 땅의 중간 즈음에 위치한 작은 도시 자다르. 중간 즈음이 어디인지 궁금해 지도를 켜고 도시 이름을 쳐보았다면 닿아 있다는 자연의 정체를 바로 알 수 있다. 바다다.


자연을 즐기는 여행자에게도 간혹 산과 바다 중에 하나를 고르라는 질문이 날아들곤 한다. 그만큼 두 공간이 가진 매력은 확연히 다르다. 자연에 별 감흥을 못 느낀다는 고백에는 모순이 섞여 있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기꺼워하는 나 자신을 한두 번 마주한 게 아니기 때문. 시내 산책자인 내게 더 잘 맞을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로 향하다 자다르에 들른 이유도 시내가 아닌 바다 앞을 거닐고 싶어서였다. 여름이었다면 바다에 몸을 던졌겠지만, 계절이 이미 가을로 넘어간 때라 아드리아해 탐닉은 산책으로 갈무리하기로 했다. 초록으로 몸을 던지는 트래킹, 캠핑은 기피하면서 서슴지 않고 파랑으로 몸을 던지려는 모습은 내가 봐도 좀 신기하긴 하다. 천성이 게으름뱅이라 산을 오르며 몸을 혹사하는 게 싫은 건가. 수영, 스노클링, 서핑 같은 수중 액티비티를 해도 지치는 건 마찬가지니 그것도 아니다. 도시형 여행자의 경계에 물의 영역이 닿는 것만 허용하는 건 여독에의 적당한 중독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상에 오른 달콤함을 맛보려면 아득바득 거기까지 오르는 수고를 먼저 겪어야 한다. 바다에 발을 담그기까진 그만한 수고를 겪지 않아도 된다. 차로 해변 앞 적당한 곳까지 가서 내린 다음, 길어봐야 몇십 미터도 안 될 백사장을 가로지르면 바다에 몸을 담글 수 있다. 이 친절한 바다님께선 한시라도 빨리 들어오라고 힘차게 파도를 밀어내 백사장 한가운데까지 바닷물을 밀어 보내주곤 한다. 콧대 높은 산님께선 빨리 올라오라며 고도를 낮춰 주시거나 하진 않는다. 어느 님이든 영접 후엔(산이나 바다를 다녀온 후엔) 그만한 여운이 따른다. 피로로 남을 여운, 대개 여행에서 겪는 후유증이니 흔히 ‘여독’이라 부르는 여운이. 나 같은 게으름뱅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여독은 여행 ‘후’에 남는 정도가 적당하다. 여행 ‘전〮후’에 쌓여 배가 되는 여독은 내게는 너무 아찔하다. 산을 오르는 과정도 분명 여행의 일부다. 다만 피톤치드 따위에 무감각한 나 같은 치는 산 여행을 오르는 과정의 즐거움으로 생각지 않고 정상에 도달하는 행위 정도로만 여긴다. 그러니 등반의 과정은 여행 ‘전’의 여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돈은 전부터 잘만 당겨쓰면서 여독은 전부터 당겨쓰고 싶지 않나 보다. 아, 이런 여행 전 여독을 없앨 수 있다면 산도 숲도 대환영이다. (케이블카 혹은 모노레일 대환영!)


적당한 여독이란 말을 설명하려다가 글이 답답할 만큼 늘어져 버렸다. 환기를 위해 자다르로 돌아가자. 자다르 앞 바다엔 포말이 자취를 남기며 여행자를 유혹하는 백사장 대신 오르간이 있다. 오르간이라니. 참 생뚱맞다. 이름하여 ‘바다 오르간.’ 크로아티아를 오기 전 여행했던 폴란드에서 운 좋게 오르간 연주를 직접 들었다. 유럽 중세 교회 내부에 화려한 장식쯤으로만 보이던 거대한 오르간에서 뿜어 나온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선율은 놀라웠다. 묵직하게 울리는 피아노 소리와 달리 교회 안을 부유하듯 울려 퍼지는 소리가 생소하면서도 신비로웠다. 귀가 소리에 놀랐다면 눈은 연주 모습에 놀랐다. 한눈에 봐도 오르간에 달린 파이프가 수십 개는 돼 보였다. 수많은 파이프에 각각 연결된 건반을 다해도 고작 네 개인 손과 발로 연주하려는 모습에 다빈치의 인체 비례도(비트루비우스적 인간)랄까, 천수관음 보살상이 겹쳐 보였다.


연주자를 대신해 바다가 저런 모습으로 오르간을 연주하려면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작정하고 바다에 마법을 부리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해적 영화에 나오는 거대 괴수 문어가 나와 줘야 오르간을 두드리는 시늉이라도 할 테니 바다 오르간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해서 스펙터클한 연주 모습은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렇지, 바다로 오면서 내가 밟고 지나온 이 땅 자체가 바다 오르간이라니. 그걸 깨닫곤 실망하고 말았다. 신께 닿으려는 듯 위로 솟은 교회 오르간과 달리 바다에 닿아야 하는 바다 오르간은 수평으로 뉘어 있어 땅과 구분이 되지 않았다. 멀리서 어렴풋이 들리는 뱃고동 소리를 닮은 소리가 그나마 음을 낼 수 있는 기관이 있다는 걸 겨우 알려준다. 바다에 닿은 오르간 본체의 바깥 면에는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일렁이던 바닷물이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마다 보도블록 위로 봉긋 솟아난 구멍에서 ‘우우웅’, 메아리 같은 소리가 나온다. 구멍마다 담당한 음이 있음을 뽐내듯 솔-라-파-솔, 도-미-시-레, 불규칙한 음계를 만들어낸다. 의도치 않았겠지만 멜로디가 생겼으니 뱃고동 소리보단 덜 투박한 소리였다.


자다르 시내는 ‘OO’단길이라 불리며 핫해진 여느 동네보다도 작아 시내 산책이라는 말을 붙이기가 머쓱했다. 그나마 로마 시대 유적이 있지만 바로 전에 들른 스플리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계단에 걸터앉아 단출한 음계만 듣고 있자니 심심해졌다. 이름만 번지르르하지 별것 없구나, 실망하며 호텔로 돌아갔다. 밤이 되고 나서야 다시 밖으로 나왔다. 저녁을 먹고 또 바다 오르간에 갔다. 안타깝게도 갈 만한 곳이 그곳뿐이었다. 그런데 바다 오르간 근처에 무심하게 깔려 있던 둥근 원판에서 형형색색의 LED 전구를 밝히고 있었다. 오르간 연주의 스펙터클함을 기대한 내게 보란 듯이 스펙터클한 빛 연주를 보이고 있었다. 오후의 실망은 원판 위를 유영하는 빛 그림자와 함께 유유히 사라졌다. 끽해야 서너 개의 음이 만드는 바다 오르간의 멜로디마저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선율만큼 웅장하게 들렸다.


누군가 자다르 시내의 조촐함에 실망한다면, 해가 진 후 그를 데리고 바다 오르간에 가리라. 그리고는 빛과 바다 소리의 하모니를 보여주며 ‘낮에 못 보던 거야. 어때, 자, 다르지?’라고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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