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VV ㅅㅅ 14화

V.V, ㅅ.ㅅ

(13) LUANG PRANANG

by Fernweh

LUANG PRABANG


도시를 떠올리면 벽지에 붙어있는 시골 동네보다 큼지막하고 복작거리는 광경이 먼저 떠오른다. 조그맣고 고즈넉한 도시를 도시라고 부르기가 껄끄러운지 우린 늘 수식어를 붙이곤 한다. 소도시라거나, 시골 도시라거나. 선입견처럼 가지고 있던 도시의 이미지와 거리가 먼 도시를 달래주려는 듯, 한두 글자라도 더 길게 불러주려고 쓰는 인심이다. 별거 아닌 인심이지만 덕분에 소도시나 시골 도시라고 부를 때면 왠지 정감 어린 기분이 든다. 달랑 도시 두 글자만 있을 때 느껴지는 휑뎅그렁함과는 다르다.


이런 인심이 작용해 정감 어린 기분으로 여행한 소도시를 꼽으라면 단연 라오스의 루앙프라방을 꼽을 것이다. 고즈넉하다는 형용사가 시내 곳곳에서 풍겨 나오던 곳. 일상이 조용하게 흘러가지만 지루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던 곳. 반복되는 일상과 동남아의 더위에 지칠 때면 소소한 이벤트로 여행자의 흥을 돋우어 주던 곳.


첫인상은 딱 고즈넉한 시골이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주변을 한 바퀴 둘러봤다. 아스팔트 길 대신 깔린 흙길에 발을 대고 걷다가 도착한 강변에는 나무들이 아무렇게나 세워져 있었다. 콘크리트 사이에 정방형 공간을 만들어 인위적으로 심어둔 가로수와 다른, 흙 위에 자연스럽게 얹힌 나무였다. 잔잔한 물소리를 들으며 걷다가 대충 걸쳐 둔 해먹에서 잠자는 아저씨를 봤다. 문득 농활 때 봤던 정자에 뻗어 낮잠 자던 어르신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시골에서나 가까이서 보던 풍경이 루앙프라방의 첫인상으로 남아서 고작 한 번의 산책으로 ‘아, 여긴 시골이구나.’라고 단정 지었다.


본격적인 시내 산책에 나서니 방금 시골이라 단정 지은 게 좀 부끄러워졌다. ‘왓 씨앵통(ວັດຊຽງທອງ)’ 사원으로 가는 길은 잘 포장되어 있었고, 출구에서 반대편으로 이어진 길도 여느 도시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가운데 큰 줄기로 뻗은 아스팔트 도로와 양옆에 듬성듬성 세워진 차량이 흙길과 나무로 이루어진 아까의 산책로와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삼각 지붕의 흐름이 그 뒤로 이어지며 자연의 능선 대신 도회적인 풍광을 드리웠다. 길가의 모든 건물은 높아 봤자 2층 정도로 낮았고 도로 폭이 의외로 넓어서 숨이 탁 트였다. 차분한 분위기가 트이는 숨통 주위를 동남아의 따뜻한 햇볕처럼 감싸주는 기분이 여태껏 느껴진다. 시내 산책에서 만난, 적당히 시골 같고 적당히 도시 같은 이 적당함이 루앙프라방에 푹 빠지게 했다.


루앙프라방에서 보낸 나날은 비슷한 결의 적당함으로 늘 균형을 유지했다. 해가 채 뜨지도 않은 이른 새벽에 참여한 탁발은 스님께 드리던 합장처럼 경건했다. 경건한 고요함이 이어지던 도시는 해가 뉘엿뉘엿 질 때부터 차려진 야시장 덕분에 적당히 흥겨워졌다. 아침에 갓 구운 바게트에 버터와 잼을 발라 먹고 에스프레소를 곁들인 프랑스식 식사를 했다가(프랑스 식민지였던 라오스엔 프랑스식 카페가 꽤 남아 있다) 점심은 라오스식 쌀국수를 먹었다. 라오스에 왔는데 뜬금없이 파리지앵 흉내를 내는 어색함을 로컬 음식을 먹으며 적당히 덜어냈다. 블루 레모네이드에 우유를 푼 색감의 꽝시(ກວາງຊີ) 폭포에서 한참 물놀이를 하고 시내에 돌아왔을 때 우연히 들른 갤러리에서 명상 관련 사진전을 보게 된 것도 적당한 균형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도시가 만들어 낸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다. 석양을 보려고 푸시(ພູສີ)산을 가려다가 마음을 바꾼 건, 산 타기를 거부하는 내 취향 때문이라기보다 애써 맞춰 둔 여흥의 균형을 깨드리지 않기 위함이었다. (비겁한 변명입니다.)


지금까지 거쳐온 도시가 남긴 여운은 분명 짙었다. 위대한 미술 작품이, 성대한 축제의 현장이, 도심의 언저리에서 마주한 자연과의 조화가, 현지 대중교통을 타보며 처음 와본 도시를 정복해 나가는 쾌감이 남긴 여운 말이다. 루앙프라방이 남긴 여운은 앞선 여운에 비해 짙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다른 도시보다 오래도록 루앙프라방을 곱씹는 건 얕은 여운이 가진 담백한 맛 때문은 아니었을까. 자극적인 맛보다 슴슴한 맛을 결국 더 오래, 자주 찾듯이. 이 도시를 향한 그리움은 마음 한구석에 치우치지 않고 잔잔한 균형을 갖추며 마음 저변에 넓게 자리했다. 얕지만 넓게 퍼지는 여운으로. 도시를 떠나던 날, 체크아웃하는 내 옆에는 이틀 숙박을 연장하던 여행자가 있었다. 그에게 질투가 날 정도로 부러워했던 건 여행하는 도중에 이미 마음에 깔려 있던 얇고 넓은 여운 때문이었다.


도시. 두 글자만으로는 도저히 루앙프라방의 차분한 온기를 품을 수 없었다. 암, 도시라는 단어에는 내포된 냉한 기운과는 맞지 않지. 도시 여행을 주제로 했는데 도시라 부르기 애매한 아쉬움에 앞에 ‘소’나 ‘시골’을 붙여보지만, 역시 입에 붙지 않는다. 크기만 따지자면 소도시지만, 시내에서 아침저녁으로 모습을 달리하며 펼쳐진 이벤트는 작다는 말로 뭉뚱그리기엔 꽤 다채로웠다. 첫인상은 시골이었지만, 사원을 나가자마자 마주한 도심은 선입견처럼 가진 도시의 이미지와도 부합했으니 무작정 시골 도시라고 우기기도 우스운 모양새다. ‘도시’ 두 글자, ‘소도시’ 세 글자, ‘시골 도시’ 네 글자로도 형용할 수 없는 마음을 담으려니 다섯 글자가 필요했다. 루앙프라방. 이 다섯 글자 말이다. 다른 말이 필요 없이 이름 그대로 다섯 글자가 필요한 도시였다.


얼마 전 여행을 주제로 한 팟캐스트에 출연했을 때 ‘코로나가 끝나면 당장 가고 싶은 도시가 어디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땐 안 가본 도시 중에 고르느라 뉴욕을 꼽았는데, 다시 고르라면 일 초의 고민도 없이 루앙프라방을 꼽을 것이다. 그곳에서라면 코로나로 무너져 버린 일상과 여행 사이의 균형을 금방 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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