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어 TER No. 599,589
“이거 진짜야?” 인터넷에 떠도는 프랑스어 풍문의 진위를 묻는 카톡이 왔다.
“응, 맞아.” 저 숫자 놀음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난 최대한 덤덤히 답했다. 칠십부터 구십까지에 숫자가 없지는 않다. 17세기 이전까지 다른 명칭인 septante(70), octante(80), nonante(90)가 있었다. 프랑스어가 공용어인 벨기에와 스위스는 저 명칭을 지금도 쓰지만 프랑스는 17세기 이후 20진법이 도입되며 지금처럼 바뀌었다.
숫자 사이에 있는 덧셈, 곱셈은 암묵적인 형태로 존재한다. 즉, ‘사 곱하기 이십’이라고 해야만 팔십이 되지 않는다. 4(quatre)와 20(vingt)을 이어 읽는 quatre-vingt은 두 숫자를 곱한다고 인지해 80이다. 90 역시 80에 10(dix)을 붙이는 데 이 땐 덧셈이 생략된 것이다. 본능적으로 숫자를 거부하는 ‘문과형’ 뇌의 소유자가 배우기엔 까다롭다. 모국어로도 셈하기를 헤매는 내겐 연산 부호 없이 이어 읽는 두 숫자만을 듣고 곧바로 팔십인지 구십인지 알아 듣기 더 어려웠다.
숫자 표현은 여행 때 요긴하게 쓰인다. 특히 물건 살 때. 그나마 유로 금액 단위가 한국 돈에 비해 작은 건 다행이다. (0을 세 개나 뺀다. 10유로≒13,000원) 여행하며 1인 기준으로 웬만해선 80~90유로나 되는 금액을 말할 일은 잘 없다. 이럴 땐 20진법의 복잡한 숫자 체계는 잠시 잊어도 된다.
문제는 교통편을 탈 때 생긴다. 여기서는 기차를 예로 든다. 편명을 잘 알아 들어야 기차를 놓치거나 하는 불상사를 줄일 수 있다. 전광판으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지연과 같은 비정상 상황에선 안내 방송에 나오는 열차번호를 캐치해야 한다. (기억을 곱씹어도 저런 상황에서 영어 방송이 나온 적이 잘 없는 것 같아 하는 소리다.)
그런데 편명은 최소 네 자리이다. TGV가 네 자리, 무궁화호 격인 TER나 Intercité는 무려 여섯 자리다. KTX가 세 자리, 무궁화호가 네 자리이니 화폐 단위와 반대로 이번엔 프랑스 숫자가 더 길다. 무궁화호도 네 자리니까 TGV 정도는 봐줄 수 있다. 길어봤자 천 단위 숫자일 뿐.
여섯 자리는 사정이 다르다. 2011년, 남프랑스를 여행하며 지역을 이동할 때 TER 열차를 자주 탔다. 십만 단위로 시작하는 긴 열차번호를 들으려고 온 귀를 쫑긋 세웠다. 20진법 수가 포함돼 있으면 계산도 동시에 해야 했다. 차르륵하고 문자열이 빠르게 회전하는 아날로그식 공항 전광판처럼 머릿속에서 숫자들이 차르륵, 차르륵 도니 머리까지 돌 지경이었다.
열차번호는 <599,598>라 하자. “오십구만 구천오백팔십구 열차 곧 출발합니다.” 우리말로 들어도 길다. 프랑스어로는 ‘Cinq cent quatre-vingt-dix-neuf mille cinq cent quatre-vingt-dix-huit.[생 상 카트흐-뱅-디즈-뇌프 밀 생 상 카트흐-뱅-이즈-위트]’
* 프랑스어를 안다면 굉장히 이상한 발음일 수 있으나,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작성했음을 알립니다.
오십구‘만’, 구‘천’처럼 네 자리씩 끊지 않는, 세 자리씩 끊는 수라 전체적으로 더 길어진다. 숫자 599에 mi천(mille), 즉 ‘0’을 세 개 또 붙여야 하니까. 십만 단위부터는 참 비효율적이다. 한국인에게 우리말 숫자가 더 효율적으로 보이는 건 당연하다만.
다르게 끊어 읽어 이미 어색한 여섯 자리 숫자 안을 4×20 같은 수가 채우면 뇌는 과부하에 걸린다. 이왕 하는 김에 난도를 더 높이려 넣은 두 가지 트릭. 만 단위에는 99(4×20+19), 십 단위에는 98(4×20+18)를 넣고, 숫자 앞엔 발음이 비슷한 5와 100을 병치했다.
열차 편명 속 함축적으로 제시된 계산식을 풀어보면,
[{500 + (4×20+19)} × 1,000] + 500 + (4×20+18)이다. 풀어 쓰니 오히려 더 눈에 잘 들어오는 건 기분 탓인가.
그리하여 난 기차역에서 매번 아무도 모르게 묵묵히 시험을 치렀다. 조각조각 끊어 나오는 열차번호 사이에 연산자를 넣어 완성시키는 듣기&암산 평가. 우리 같은 사람을 위해 소음 차단이 시급하다. 수능시험 듣기평가 때 비행기도 안 띄우는 것처럼.
저번 편에 소개 된 ‘발음 최종 빌런’ 체코어 333과 444를 잠시 떠올려 본다. 프랑스어를 몰랐다면 둘 중 뭐가 더 배우기 수월했을까. 발음이 그나마 쉬운 프랑스 숫자? 암묵적인 계산식이 빠진 체코 숫자? 막상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