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103)
대만에 왔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날까지 일이 몰아치는 바람에 겨우 항공권만 호텔만 끊어놓을 만큼 즉흥 여행이었는데, 마음은 편했다. 이번에 다시 대만을 찾은 건 대만 중간 즈음에 위치한 '타이중'을 가기 위해서다. 수도인 타이페이(서울)와 남부의 대도시 가오슝(부산)과 타이난(경주)까지는 정복했으니 대전에 비교할 수 있는 타이중을 가기로 정했다.
타이중은 첫 방문이었지만 타이중까지 오는 건 크게 걱정이 안 됐다. 계획이 충만해야 마음이 편안한 J형 인간임에도 말이다. 이유인즉, 대만이야 네 번째 방문이고 입국 관문인 가오슝 공항은 그 구조부터 시내로 가는 교통편까지 여전히 기억에 또렷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가오슝을 다녀온지 1년도 채 안 됐다) 생각했던 대로 입국 수속 후 인출 수수료 무료인 ATM에서 돈 뽑고, 편의점에서 교통카드(이지카드) 구매와 충전을 하고 바로 시내로 향하는 지하철을 타러 내려갔다. 가오슝에서 타이중까지는 KTX에 해당하는 HSR이란 고속철도를 타고 갔는데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서 표를 끊고 기차에 오르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인천발 직항편이 다시 생긴 거 같은데, 내 경우엔 부산발이어서 가오슝을 거쳐서 타이중으로 들어왔다.
호텔 체크인도 별탈 없이 하고 나니 그제서야 스멀스멀 이번 여행에 대한 걱정이 일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는 J형 인간의 심리다. 타이중은 시내보다는 근교에 가볼만한 곳이 많다. 한 여행 플랫폼에서 근교 관광지를 다녀오는 하루짜리 상품이 있어 후다닥 예약해버렸다. 여행 코스를 짤 시간이 넉넉했다면 직접 발품팔아 가며 차편부터 깨알 여행 팁까지 세세히 알아보는 게 J형 인간인 내게 재미라면 재미인데, 이번엔 그럴 시간도 여력도 없었다. 짐을 풀면서부터 일단 야시장으로 갈 생각만 하고 있기도 했고...
이튿날 한나절을 통째로 근교 투어를 다녀오고 바로 뻗었다가 눈을 뜨니 여행 3일째가 되어 버렸다. 전날 가이드님이 추천해 준 시내 명소를 돌아보려고 하는데, 순간 3일동안 커피를 단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가오슝 공항에서 동선이랑 계획을 정리해야 했다면 도착층 카페에서라도 커피를 마셨을지도 모른다. 체크인하자마자 방을 박차고 나가 갔던 야시장의 인기 음료 메뉴가 커피였다면 커피를 마셨을지도 모른다. 대만에 왔으니 버블티는 먹어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버블티 대신 커피를 마셨을지도 모른다. 아침에 빵과 커피를 즐겨 먹는 나지만, 대만에 오면 무조건 딴삥(계란전)과 요우티아오(밀가루튀김)와 또우장(두유)을 먹어서 커피 생각을 아예 못 한 건지도 모르겠다.
뭐 엄청난 일이라고 이렇게 구구절절 커피를 거른 일에 대해 적냐, 하시겠지만... 하루에 최소 두 잔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때려 박는 내게 있어 커피를 2.5일(3일차 점심에 결국 커피를 마셨으니 2.5일이다) 동안 안 마셨다는 건 아주 큰일이다. 사실 카페인 섭취를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단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라서 의식하며 커피를 안 마셔 보려고도 했는데 쉽지 않았다. 그런데 대만에 와서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이틀 넘게 커피를 안 마셨다니. 심지어 커피 생각이 나지도 않은 게 내 스스로도 신기해서 이렇게 단상이랍시고 몇 자 적어 본다.
커피 생각이 나자마자 파블로프의 개 반응처럼 카페인을 빨리 주입해야 한다는 생각에 휩싸여 시내 명소를 가다가 말고 가까운 카페에 들렀다. 그러고 나서 저녁에 호텔 근처에 왔을 때도 도보 5분 거리에 괜찮은 카페가 있어 바로 들렀는데, 왠걸, 두 카페 모두 커피에 진심인 사장님이 하는지 커피가 정말 맛있었다. (커피를 안 마시다 마셔서 맛있다고 하는 게 아니라 진짜 맛있는 카페임. 드립백까지 사버렸다)
여담이지만, 대만에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면 커피 위에 크레마를 따로 올려주는 듯하다. 그게 또 의외로 매력있는 부분이기도... 다시 카페인에 눈을 떠 버렸고, 덥진 않아도 습한 곳이라 오늘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입하러 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