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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끝없는대화 Jul 27. 2020

너를 보내주는 시간

애도, 그리고 폐쇄병동의 역설된 자유

 이 글은 언니가 동생에게 하는 일방적인 대화와 자살 유가족의 애도 과정 및 우울증과 심리적 변화과정을 기록한 것입니다. 글의 중간에 당시 작성했던 일기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시간의 순서에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애도 단계

첫 번째, 죽음에 대한 충격(Shock)과 부인(Denial)이다.

두 번째, 지속적이고 강하게 고인에 대하여 생각하는 시기이다.

세 번째, 절망(Despair)과 우울증(Depression) 시기가 찾아온다.

마지막으로, 회복(Recovery)의 시기가 찾아온다. 일상생활로의 복귀가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것들에 대한 흥미가 생기고, 가족의 죽음으로 이전처럼 똑 같이 돌아갈 수는 없으나, 자신의 삶을 새롭게 꾸려나가게 된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인 퀴블러 로스(Kubler-Ross)는 1969년 자신의 저서에서 죽음과 애도에 대한 5가지 심리 변화 단계를 소개했다. 이에 따르면 죽음을 앞둔 환자들이 겪는 심리 변화는 부정(Denial)-분노(Anger)-타협(Bargaining)-우울(Depression)-수용(Acceptance)의 다섯 단계에 거쳐 나타난다.

하지만 꼭 이와 같은 순서대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여러 단계가 함께 나타날 수도 있고, 특정 단계는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상실과 우울증 (정신이 건강해야 삶이 행복합니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전 편에서 계속

 나의 애도 단계는 위와 조금 달랐다. 처음은 충격이었고 현실 부정이 시작되며 모든 이들이 나를 동생에게서 떨어트리려 짜고 치고 거짓말하는 것이 아닌가, 서류와 장례식 등도 다 위조된 것이 아닌가 망상을 하며 거짓의 증거를 찾았다. 한동안은 조커처럼 발작적인 웃음을 동반한 조증이 찾아왔다. 기존의 나약한 자아와 부정적인 생각, 현실을 냉장고에 가둬놓고 밝고 재밌는 또 다른 자아를 꺼내서 썼다. 거울을 보며 웃는 연습을 자꾸 했더니 정말 얼마간 그러고 살았다. 기운이 솟고 자신감이 솟았다. 오래가진 않았다.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운 시기였다.


 자기 통제가 어려워서 정신병동에 입원했다. 강제입원이 아닌 자의입원이었는데 폐쇄병동이 자리가 잘 나지 않는 모양이다. 동생이 입원했던 대학병원도, 내가 입원했던 여러 층을 나눠 쓰는 병원도 거의 항상 만실이었다. 동생이 입원했던 곳은 대학병원의 구석에 있는 작은 폐쇄병동이었고 나는 한 전문병원에 입원했는데 조금 더 자유로운 환경으로, 휴대폰 사용이 가능했다. 보호자 한 명과 함께 소지품을 가지고 가서 입원서류를 작성하고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용도가 기억이 안 나는 피검사를 하고 자리를 배정받았다. 문은 창문이 없는 두꺼운 철문이었고 보호사 분들은 출입카드를 목에 걸고 다녔다. 소지품을 검사할 때 스테인리스 뚜껑이 있는 텀블러와 볼펜과 끈이 있는 후드티를 비롯한 여러 가지를 금지당해서 화가 났던 기억이 난다. 동생이 입원했던 대학병원 병동에서는 휴대폰 금지에 자해 위험성 때문에 비닐봉지도 금지고 수건도 반으로 잘라 쓰게 한 것을 생각하면 그나마 자유로운 편인가 싶었다. 유선 이어폰은 반입이 가능했지만 휴대폰 충전기 선은 금지였다. 매일 밤동안 보호사 분들이 가져가서 충전해주었다.

 밤 10시에 tv 리모컨을 반납한 뒤 소등했고 아침 7시, 점심 12시, 저녁 5시에 식사를 했다. 식후 정해진 시간에 약을 먹었다. 대학병원의 입원비는 300만 원 정도라고 들었는데 내가 입원했던 곳은 100만 원도 되지 않는 곳이라서 의사의 회진도 드물었고 상담치료가 없었다. 하루 약 8번의 흡연시간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유일하게 하늘을 보고 바깥바람을 쐴 수 있는 시간이어서 그런가 비흡연자들도 이따금 나와있었다. 식사는 그냥 그랬다. 미각을 잃었던 시기라서 상관없었다. 동생 사망 직전 173에 65였는데 엄마의 온갖 노력에도 5달 뒤 58까지 몸무게가 내려갔다.

 입원하는 동안 해야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았다. 책을 읽고 휴대폰으로 영화를 보고 플러스펜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티브이를 보고 같은 병실 사람들과 이야기를 했다. 알코올 중독, 우울증, 말이 통하지 않고 그저 복도를 멍하니 걷는 사람도 있었고, 왜 여기에 들어온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정상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여자 병동은 가끔 싸움이 일어나서 구경하는 것이 작은 낙이었다. 나는 과자를 병실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는데 옆자리 어떤 언니는 자꾸 받아먹기만 하고 여기에서 '조금 더 이상'했다. 한 동생이 그 언니는 화장실에서 자위를 해서 보호사 분들께 혼난 적도 있고 자기 입으로 유흥 일을 했었다고 말했다고, 상대하지 말라고 그랬다. 난 굳이 미워할 이유가 없어서 똑같이 잘해줬는데 어느 날 내 이름을 가지고 헛소리를 해서 닥치라고 했다.

 이 곳에서는 이유 없이 울거나 웃거나 손을 떨거나 무례한 짓을 하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또는 못하고) 허공을 보거나 씻지 않거나 보람 있는 행동을 하지 않아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곳은 가장 통제되었지만 가장 자유로운 곳이었고, 현실과 매우 동떨어져 있으면서도 인간관계는 여느 바깥과 비슷한 곳이기도 했다. 상담치료가 없었고 이 곳에 있어봤자 이득이 없겠다 싶었다. 일주일의 입원 후 내 의지로 퇴원했다.

 그 뒤엔 분노가 찾아왔다. 도울 기회를 주지 않은 것에 대하여, 책임감과 죄책감, 당혹감을 준 것에 대하여, 답을 알 수 없는 의문을 남긴 것에 대하여, 혼자 떠나버리고 뒤처리를 남겨놓은 것에 대하여, 관계의 일방적인 단절에 대하여 화가 났다. 화도 눈물도 잘 느끼지 않는 무딘 편이었는데 걷다가 일방통행, 폐쇄 중, 출입금지 같은 단어들에 눈물이 쏟아지기도 했다. 처음 느끼는 온갖 감정들에 낯설고 당황스러웠다. 친구에게 털어놓았더니 다들 느끼는 당연한 감정들을 나만 이제야 느끼는 게 아닌가 말해주었다. 걸음마를 하는 기분이었다.

 다시 살아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어떤 대가도 치를 수 있다고 수없이 생각했지만 생전 그렇게 아파했던 동생을 살리는 것이 진정 그 애를 위하는 것일까 자문했고,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죽고 나서 어디로 갔을까, 천국으로 갔을까 궁금해했지만 천국으로 가서 웃고 행복하기만 하는 동생의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고 슬픔도 분노도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면 온전한 동생의 영혼이 아닐 것이기에 그냥 무(無)로 사라졌기를 기도했다. 천국이나 사후세계 어딘가로 가서 잘 지내고 있을 거라고 상상하는 것보다 완전히 사라졌기를 바라는 것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접는 훨씬 참담하고 힘든 마음이었다.

  동생이 왜 그랬을까 언니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책임감은 과거를 파헤쳐보고 싶은 충동을 수없이 불러일으켰지만 막상 현실 앞에 서면 동생이 알려주고 싶지 않을 수 있는 사생활을 내가 파헤칠 권리가 있나 싶어 매번 포기했다. 이해해야 한다는 책임감이라는 이름의 집착은 가장 끝의 끝까지 남아있었다. 거의 반년의 시간 동안 온전히 동생을 충분히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지칠 때까지 맘껏 생각하고 나서야 끝이 보였다. 정말 충분히 생각해서 그런 건지 지쳐서 포기한 것인지 지금도 그건 잘 모르겠다. 답이 나와서 그만둔 것도, 보내준 것도, 이제 충분히 되었다 싶어서도 아니다. 애도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지금도 동생 생각을 하면 빙하 위의 한 마리 기린처럼 막막하고 춥다.



2019. 10 **
 어제는 너의 49제였다. 가족들은 제사상을 차리고 마지막 가는 길이라고 각자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나는 그 말을 문닫힌 옆방에서 듣고 있다가 못 참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너를 좋은 곳으로 보내줘야 한다고 하는데 나는 너를 보내주기 싫다. 마지막 말을 하게 되면 정말 네가 가버릴 것만 같아서 작별인사를 하지 않았다. 제사상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 보지도 않았다. 네가 서운했을까, 잘했다고 했을까?
너는 죽었고, 영원히 너의 대답과 생각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네가 간 뒤로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언니는 궁금하다...
 나는 약도 꼬박꼬박 먹고 있는데,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다. 모든 사람들이 다 짜고 네가 죽은 것처럼 꾸미고 너를 어딘가에 숨겨놓고 나를 속이는 것 같다는 상상이 선명한 의심으로 변한다. 아빠가 우는 나를 안고 네 마음 다 안다, (  )이 못 지켜줘서 아빠가 미안하다고 했는데 나는 그 손을, 품을 뿌리치면서 거짓말, 거짓말이야 라고 했다. 아빠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건지, 아니면 이 모든 일들이 거짓말이라는 건지 모르겠다. 아빠가 죽고 네가 살아났으면 좋겠다.

2019. 10. **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망자에게는 그 누구도 용서받지 못하리니.

2019. 10. **
 사후세계가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너를 따라갈 텐데. 지옥으로 갔다면 지켜주기 위해서 갔을 텐데, 너는 어려서 천국으로 갔고 나는 죽어도 지옥으로 가게 될 것이다. 죽어서도 너를 영원히 만나지 못한다. 네 생각을 하면 갈비뼈 사이를 갈라 심장을 맨 손으로 꺼내 쥐어짜는 느낌이 든다.
 부모님은 나를 몹시 걱정한다. 살고 싶은 사람의 눈빛이 아닌가 보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도, 갖고 싶지도, 하고 싶지도 않다가도 나는 여전히 가끔씩 맛있게 먹고, 쇼핑을 하고, 어딘가를 간다.
 17년은 너를 잊기에는 너무 길고 보내기엔 너무 짧았다.
<중략>

 너는 너무 착한, 소중한 동생이어서 보내주기가 힘들다.
 어제는 아침 일찍 양평 용문사에 가서 기와와 연꽃 모양 초에 너의 극락왕생을 적었다. 내가 다시 돌아오라고 쓰면 안 되냐고 물었는데 엄마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울면서 억지로 글씨를 천천히 쓰자 안내원은 내가 극락왕생의 철자를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친절히 알려주고 동생이냐 묻고 울지 말라고 했다. 이상한 하루였다.


2020. 01. **
 너는 나이를 먹지 않고 이젠 없는데 새해가 왔어. 2020년이. 그리고 네 외모와 목소리와 생각과 특별한 점들의 기억이 점점 희미해지고 너를 생각하는 횟수가 점점 적어지고 살만해지고 있다. 네가 살았다 갔다는 납득할 만한 증거가 있기는 할까?

 점점 괜찮아지고 있는데 너를 잊고 있는 것 같아 겁이 난다. 괜찮아지는 것이 두렵고 무섭다. 이미 모든 일들은 내가 등을 돌리고 있을 때 일어나고 완결되어 버렸고 내가 바꿀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감, 막막함이 느껴진다. 내가 어찌  있는   마음과 몸뿐인데 그조차 아무것도 되지 않고. (  ), 라는 머릿속 혼잣말이 한숨처럼 가만히 내려앉는다. 깃털처럼 아주 가볍고 조용하게. 그러면  무게가 나의 것인  마냥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주저앉아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한다.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사진을 못 본다. 감정이 너무 벅차서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 네가 없는 집. 네가 없는 명절. 네가 없는 일상. 너를 제외한 모두가 한 살 더 먹었고 나는 점점 늙어가겠지만 너는 17살로 끝이 났고 날 두고 갔다는 생각에 미치도록 춥고 외로워서 웅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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