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40대에 독서를 시작했다

너를 위한 희생이 아니라, 나를 위한 투자이다.

by 루나케이

10년간의 유학 생활의 종지부를 결혼으로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떠날 때 나의 꿈은 결혼이 아니었다. 30세에 우선순위가 아니었던 것이다. 정신없이 즐기고 배우고 성장하고 사랑했다. 어떤 후회도 없었다. 자신감과 그간 나의 경험이 헛되지 않았다는 믿음이 컸으니까.


결혼 후 가장 큰 변화는 우리는 같은 방향을 보고 함께 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내 인생의 방향을 같이 고민하고 상의하고 그와 나의 방향을 만들어 가는 첫 번째가 우리의 거처를 정하는 일이었다. 평생 외국에서 살아도 괜찮을 것 같았던 그는 한국행을 이야기했고, 다소 당황스러웠지만, 설득력이 있었고, 큰 방향은 한국으로 정했지만, 사정상 자리를 먼저 잡은 남편이 한국으로 떠났고, 만족스럽지 못한 자리였지만, 6개월 뒤 나도 귀국을 했다. 그러나, 같이 살지는 못했다. 우리는 주말 부부가 되었다. 색다른 곳에서 다른 느낌으로 사는 것도 처음에는 나쁘지 않았다.


한국의 연구소 생활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내가 적응할 시간도 자초지종을 물어볼 여유도 없었다. 그냥 본능적으로 몸이 기억했다. 더디었지만, 나는 토종 한국인이 맞았다. 금세 적응을 해 나갔고, 보이지 않는 경쟁 속에서 나는 생각보다 많이 지쳐었다. 의례 다들 그렇게 사니까 그러려니 했지만, 정신적으로 많이 피폐해져 간 건 사실이었다. 만족 스럽지 못한 곳이라고, 대충 살고 싶지 않았고, 나는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듯 이유 없이 너무 많은 에너지를 단시간에 쏟아내 버려서 금세 방전이 되었다.


그 와중에 내가 간과한 아주 큰 사실은 나는 한 집안의 며느리라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내가 정신을 좀 차리고 여기가 적응이 되면 내가 원할 때 아기는 가지면 된다고 생각했고, 주시면 가지고 아니면 굳이 억지로 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말 그건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무슨 이런 잘 난 척은. 입사 9개월 만에 아기가 찾아왔고, 난 그냥 원래대로 생활해도 괜찮을 줄 알았다. 이렇게 쉽게 유산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정말 너무너무 무지했던 나는, 미안함과 죄책감을 가질 여유도 없이 닥치는 대로 다시 일상을 살아가면서, 아기 소식은 점점 더 멀어져 갔다. 그때는 몸이 아파서 울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두려움과 나의 자만심에 화가 났고, 조심하지 못했던 후회와 나에게 찾아온 소중한 아기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모든 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결국 입사 1년 반 만에 나는 휴직도 아닌 퇴사를 선택했다. 휴직의 사유가 마땅하지 않았고, 뭔가 내려놓고 집중하고 싶었다. 정규직 버리고 언제든 퇴사가 가능한 비정규직 일을 하면서, 마음은 항상 임신을 위해 움직였다. 동시에 몸도 같이 만들어 갔다. 그러나, 매달 기대와 실망의 반복은 결국 다시 조급함으로 바뀌었고, 1년이 다 되어갈 때쯤 병원을 찾아가 보려고 마음을 먹으니, 코로나가 터져서 꼼짝도 못 하고 시간이 가고, 다시 잠잠해져서 병원 예약을 잡을 때쯤 시아버님의 갑작스러운 병 안으로 결국 우리 곁을 떠나셨다. 힘든 시간의 연속은 드라마처럼 흘러갔고, 클라이 막스처럼 아기는 아버님이 떠나신 2달 뒤에 선물처럼 찾아왔다.


간절함이 이런 것인가, 믿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42살에 난 첫 임신을 하게 되었다. 그 어떤 희생이 아닌 내 간절함이 하늘에 닿았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행복함과 불안함 감사함과 처음 겪는 몸의 변화, 그저 시간만 가길 바라고 아기가 건강하길 바라던 시간도 흘러 이제 40일을 채 남지 않은 시간 앞에 나는 놓여 있다. 감사와 겸손을 이렇게 몸소 느끼면서 그 뜻한 바를 헤아려보긴 처음인 것 같다. 매일이 감사하고, 자만과 오만을 깨달을 때 세상 앞에 겸손하게 되면서 선물 같은 아이를 받게 된 것 같다.


불과 40여 일을 채 남겨놓지 않은 이 시간 갑작스러운 주변인들의 승진과, 교수 임용이라는 소식을 전해 들으며, 임신을 위해 달려온 지난 2년여간의 시간 동안 난 그냥 정체되어 있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하루 종일 몸이 무거워 숨 쉬고 누워있는 것 외에는 허락되지 않는 내 모습이 순간 스쳐갔다. 어디서부터 잘 못된 것일까, 나는 정말 뭘 위해 살아온 것일까, 마치 평생 임신한 채 살아야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부정하고, 후회가 되려는 때, 배속에 태동이 나를 깨웠다. 아, 이 시간도 40여 일 밖에 남지 않았구나. 잊어서는 안 될 나의 소중한 시간이, 가진다고 가질 수 있었던 게 아니었던 이 소중한 선물이 나에게 와 주었다는 사실과 동시에, 40일 이후의 내 삶을 하나도 계획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마주했다.


마치 아이가 영원히 내 뱃속에 살 것처럼 그 시계에 맞춰 지난 8개월을 살았다는 사실에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40일 이후 나는 다시 내 삶을 살아갈 계획을 하나도 세우지 않은 것이었다. 아이는 나와 함께 성장하고 커나갈 것인데, 정작 나는 2년 전과 같은 생각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마치 아이가 나의 인생을 발목 잡은 것처럼. 내가 다시 살아갈 삶의 목표와 방향을 정해야 하고, 아이에게 보여줘야 할 방향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의 끝에 나는 TV를 접고 독서를 시작하기로 했다.


연구소 다니던 때는 밖의 일을 끊어내기 위해 TV를 보며 아무 생각 없이 웃다 잠드는 게 하루의 마무리였다면, 앞으로 나는 새로운 생명과 함께 새 삶을 살아가야 한다. 하루 종일 나를 보면서 삶의 첫걸음을 배워나갈 이 아이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것보다, 책을 통해 전달해 전 수 있는 게 훨씬 많기 때문에, 나부터 습관을 미리 고쳐나가야겠다 마음먹었다. 따라 하며 배우는 게 더 빠르다는 것을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까.


지난 10년간 주로 논문만 봤지 독서는 영 할 시간이 없었다. 이제 나도 텅 빈 내 머릿속을 채우고, 앞으로 살아나가야 할 긴 인생의 방향을 찾기 위해 독서를 시작했다. 다소 낯설고, 불편하고, 가끔 재미없는 책도 읽어야 하지만, 이건 너를 위한 희생이 아니라, 지난 2년간의 공백과 앞으로 살아갈 미래에 나 역시 투자하는 것이다.


육아라는 거대한 산이 놓여있지만, 너를 위한 엄마의 준비와 엄마의 제2의 인생을 다시 시작하기 위한 윈윈이 나는 독서라고 생각한다. 내가 흔들리지 않아야 너를 지켜줄 수 있기 때문이다. 뭘 해도 채워지지 않던 내 마음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두려움을 오늘 첫 장을 넘기며, 마음의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허기가 졌었던 모양이다. 출산 날짜가 가까워 오면서, 겁도 나고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로 정신없이 흘러가버릴 시간을 너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싶지 않다. 너 덕분에 나는 40에 나는 독서를 시작했다고 꼭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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