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르 제리코(JEAN LOUIS THÉODORE GÉRICAULT, 1791-1824)의 <메두사호의 뗏목(Le Radeau de la Méduse)>(1819)
이 이야기는 앙시앙 레짐(Ancient Regime, 구체제) 하에서 시민들의 봉기로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1789)의 물결이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된다. 흉작에 고통받던 농민들은 민중의 혁명을 일으켜 모든 체제를 전복시켰고, 전쟁과 쿠데타를 통해 혜성같이 등장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 1771~1821)는 유럽 곳곳에 자유와 민족주의를 확산시켰다. 절대왕정과 봉건제도를 무너뜨린 유럽 역사상 최초의 시민혁명이라는 의미를 뒤로하고 1804년 황제에 오른 나폴레옹은 공포정치를 이용해 독재를 하며 프랑스의 위상을 유럽 전역에 떨치게 하였다. 1806년의 대륙봉쇄령으로 야기된 물자 부족으로 유럽인들이 고통을 받게 되자 반프랑스 감정이 고조되었고, 이베리아 반도와 러시아 원정의 실패, 파리의 함락과 1814년 퐁텐블로 조약으로 인해 엘바섬으로 유배되며 나폴레옹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1815년 황제로 복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권력 쟁취 과정은 일장춘몽과도 같이 백일천하로 끝나게 되었고, 결국 그는 여생을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보내게 되었다.
Sacre de l'empereur Napoléon 1er et coronation of the Empress Josephine dans.... Jacques-Louis David
사건의 배경은 1815년 워털루 전투(Bataille de Waterloo)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대-프랑스 동맹에 대패한 후 실각하게 되었고 루이 18세(1815-1824)가 왕권을 쟁탈했을 무렵 발생했다.
1816년 프랑스의 프리깃함 메두사호는 보르도 북쪽의 로슈포르항(Rochefort)에서 드 쇼머레이(Hugues Duroy de Chaumareys, 1763-1841)의 지휘 아래 보급선인 루아르, 범선인 아르구스, 소형 호위함인 에코와 함께 함대를 구성해 항해하기 시작했다. 이 배에는 세네갈의 총독으로 임명된 줄리앙-데지레 슈말츠(Julien-Désiré Schmaltz)와 그의 가족들을 위시해 400여 명을 태우고 있었다. 1816년 7월 2일 세네갈의 생루이(Saint-Louis)를 향해 항해하다 아프리카 연안에서 암초에 부딪혀 조난을 당하게 된다.
이 사건은 대중에게 부르봉 왕조에 의해 임명된 선장의 무능과 독선으로부터 기인한 사고였음이 알려졌고 국제적인 스캔들로 비화되었다. 선장인 53세의 드 쇼머레이는 20년 이상을 항해한 적이 거의 없었고 평생 호위함을 지휘해본 적조차 없었다. 하지만 루이 18세와 정치적인 관계 덕분에 함장으로 임명되었고, 세네갈에 빠르게 도착하려는 슈말츠의 요구로 함대와 떨어져 암초와 모래톱이 많은 연안으로 향해한 것이 난파의 원인이 되었다. 결국 메두사호는 해안에서 겨우 50km 떨어진 연안에 좌초되었고, 난파 직후 구명정으로 도피한 선장과 부자들 및 일부 선원들은 149명의 승객을 갑판과 돛을 이용해 급조된 뗏목에 태우고, 구명정과 밧줄에 연결했으나, 나흘도 채 지나지 않은 7월 5일 그들은 비정하게도 밧줄을 끊어버렸다. 선장은 평민들은 죽게 내버려 둔 채 자신과 고위 장교들을 구하기 위해 생명줄을 끊은 잔인함을 보인 것이다. 버려진 뗏목 위의 사람들은 13일간 표류를 하며 아르구스호에 의해 겨우 15명이 생존자로 발견되었는데, 기아와 탈수로 인해 시체와 인육을 먹으며 버텼던 것이었다. 살아남은 사람 중 5명도 구조 직후 사망하였다.
난파로 인해 다수의 사망자가 나오고 생존을 위해 비인간적으로 버텨야만 했던 상황이 선장과 선원들에 의해 발생했다는 점에서 대중들에게는 왕조에 대한 적개심이 쌓이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선장이 로슈포르 군법회의에서 겨우 3년형을 선고받는 것으로 사건이 종결되었다.
낭만주의 화가인 테오도르 제리코의 이 작품은 현실의 잔인함을 캔버스 위의 절망적인 감정으로 섬뜩한 사실주의로 표현했다. 제리코는 사실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살아남은 승객들을 인터뷰하였고, 발견된 시체들을 스케치하며 그림을 완성하였다. 당시 제리코는 시체안치소를 찾아 사체를 스케치하였고, 병원의 황달병 환자들의 피부 빛깔과 사후 경직 정도를 연구하여 그릴 정도로 작품 제작에 열정을 바쳤으며, 심지어 파도 위에서 움직이는 뗏목을 위해 바다 위에 뗏목을 재현해 놓고 관찰하기도 하였다. 그림에는 그의 후배인 들라크루아가 화면의 중심에 팔을 뻗은 채 머리를 땅에 대고 있는 시체의 모델로 등장하기도 한다. 1819년 프랑스 정부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작품은 이름이 바뀐 채로 전시가 되었고, 구매자를 찾지 못한 채 유럽 곳곳에서 전시되었으며, 영국의 런던에서는 4만여 명이 그림을 관람하였다고 한다. 이 작품에 헌신과 열정을 다했던 제리코는 그림을 완성한 지 5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Le Radeau de la Méduse (1818-19), JEAN LOUIS THÉODORE GÉRICAULT, 7.16mx4.91m, Louvre
작품은 강하고 어두운 색채, 밝고 어두움의 대비가 주를 이룬다. 또한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받아 이상적인 근육의 움직임을 재현한 인물들은 극적인 포즈로 드라마틱하게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한 측면에서 이러한 형상은 기아와 탈수에 빠진 사람들의 형태와 모순되게 보인다. 다른 측면에서는 불행과 대비되는 삶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일견 낭만주의적인 형태를 띤다고 볼 수도 있다. 화면에서 하늘과 바다의 수평적인 구분과 함께 왼쪽의 돛대와 오른쪽에 잘 보이지 않는 아르구스호를 향해 깃발을 흔드는 인물 군상과의 피라미드형 구도의 대립과 명암의 대비는 죽은 자와 산 자의 대비를, 희망을 포기한 자와 희망을 갈구하는 자들과의 대비를 보여주며, 비인간성과 생존본능의 충돌을 말한다. 또한 시선을 왼쪽 하단부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해 본다면 죽은 자로부터 죽은 아들의 시신을 부여잡고 슬픔에 휩싸인 아버지, 그리고 삶의 희망을 위해 소리치는 사람들까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극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그들의 슬픔의 소리까지도...
<메두사호의 뗏목> 이전에는 영웅적 서사시가 주류를 이루었지만 이 작품이 희생자의 서사를 표현했다는 것을 우리는 '서사의 대전환적 작품'이라고 부를 만하다. 따라서 현대작품은 작가가 원하는 모든 것이 작품의 주제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메두사호의 뗏목을 시원으로 여길 수 있다는 것이 과언은 아니다. 권력자들의 권위와 명성에 봉사하는 기록화가 아닌 이름 없는 사람들의 비극을 통해 부조리를 밝히고, 위기와 공포에 처한 인간이 ‘인간의 존엄성’을 어떻게 유지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강한 물음을 우리에게 던진다. 이것은 200여 년 전의 재앙을 대하는 한 화가의 관점이 많은 현대적 재앙과 마주한 현대 예술가들의 관심과 태도를 돌아보게 하며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