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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ist in Atelier Nov 18. 2022

<한국에서의 학살> Picasso

재난(Catastrophe)은 항상 곁에 머문다_2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의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ée)>(1951)



전 세계에서 크고 작은 전쟁은 끊이지 않고, 전쟁의 대상인 민간인들에게 커다란 상흔을 남긴다.


1950년 6월 25일 '폭풍224'라는 암호명과 함께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은 순식간에 한반도를 집어삼키고 더 이상 한국인들만의 전쟁이 아닌 미, 소 양국의 냉전체제하에서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진영 간의 대리전 양상을 띠며 확전 되어갔다. 1950년 7월 25일에서 29일, 같은 민족으로서 피아를 식별하기 힘들었던 참전 미군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는 피난민에 북한군이 잠입했다고 주장하며 노근리(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를 지나는 경부선 철도 아래 쌍굴다리에서 민간인들을 모아 기관총으로 난사하여 약 400여 명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으며 참사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사람은 20여 명에 불과하였다.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는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ée)>(1951)에서 비인간적인 전쟁의 참상을 탁월한 방식으로 표현하였다. 그는 이미 앞서 스페인 내전인 <게르니카(Guernica)>(1937)와 <시체구덩이(The Charnel house)>(1945)를 통해 예술가의 사회적 관심과 책임에 대해 표현한 바 있다. 


먼저 <게르니카>는 1937년 4월 26일 스페인 북부의 바스크 지역에 위치한 게르니카에 스페인 프랑코를 지원하는 나치에 의해 폭격을 했던 사건을 배경으로 하였다.

폭격받은 게르니카, 1937


이에 반해 공화파 지지자였던 피카소는 공습에 분개하여 게르니카에 투하된 폭탄으로 인해 죽은 아이를 안고 절규하는 엄마, 아우성치는 사람들과 울부짖는 소와 말, 부러진 칼을 손에 쥔 병사, 어둠에 램프를 들고 있는 여인 등을 소재로 하여 흑백 톤의 단순화한 색채 구성을 통해 그날의 비극을 표현하였다. 이 작품은 절단된 희생자들의 시체를 작품의 중간에 배열함으로써 더욱 극적인 구성을 띠게 되었다.

Guernica(1937), Pablo Picasso, Oil on canvas. 349.3 cm × 776.6 cm, Museo Reina Madrid, Spain.


그 후 1945년 신문의 사진에서 영감을 받은 피카소는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천백만 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가 학살된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한 <시체구덩이>를 흑백 톤과 약간의 푸른색 톤을 이용하여 냉정하고 차갑게 표현하였다. 작품에 표현된 희생자들은 손발이 묶인 채로 식탁 아래 쌓여 있어 홀로코스트의 끔찍한 비극을 증거 하였다.

The Charnel house (1945), Pablo Picasso, Oil and Charcoal on canvas, 199.8x250.1cm, New York


<한국에서의 학살>은 1814년에 제작된 프란시스코 드 고야(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 1746-1828)의 <1808년 5월 3일의 학살(El tres de Mayo de 1808)>과 마네(Edouard Manet, 1832-1883)의 <멕시코 황제 막시밀리안의 처형(Execution of Emperor Maximilien of Mexico)>(1868-69)을 차용하여 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고야의 그림은 1808년 마드리드에서 발생한 프랑스 점령에 대해 스페인 민중들이 봉기와 프랑스군의 양민 학살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우측의 총을 든 군인들은 뒷모습만 보인채 익명성 뒤에서 그들의 잔인함을 감추고 있다. 반면 좌측의 쓰러진 시체들 곁으로 무릎을 꿇고 죽음을 기다리는 공포에 휩싸인 사람들은 명암의 극적 대비를 활용하는 낭만주의적인 특성을 드러내어 전쟁의 참상을 나타내었다. 마네의 그림은 멕시코 황제 막시밀리어안과 두 장군의 처형을 주제로 무책임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를 비판하는 작품이다. 마네는 1866년 재정난에 처한 나폴레옹 3세가 멕시코에서 프랑스 군대를 철수시키면서 베니토 후아레스(Benito Pablo Juárez García, 1806-1872)의 게릴라군에게 처형당하는 사건(1867년 6월 19일)을 작품을 통해 프랑스 정부의 무책임과 무능을 비판하였다.  

El tres de Mayo de 1808, (1814), Francisco Goya, Museo national Prado


이처럼 고야와 마네의 작품 구성과 구도를 숙지한 피카소는 고야의 그림속에 표현된 프랑스 군인들을 <한국에서의 학살>에서 미지의 기계적 인간으로 대체하여 직선의 단단함으로 표현하였으며 민간인을 향한 총부리를 통해 잔혹함과 냉혹함을 강조하였다. 이와 반대로 아이를 안고 공포로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는 어머니와 임신한 여성, 순진무구하게 뛰어노는 아이, 군인의 총에 겁먹은 아이는 곡선의 나체로 표현하여 군대의 총칼 아래에서 무기력한 인물 군상을 그리고 있다. 그는 좌우를 대칭으로 만든 구도를 통해 주제를 표현하는데 집중하였고 남성-여성의 대비를 통해 전쟁의 취약함은 약자에게 더 큰 희생을 치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였다.

그는 이 작품을 파리의 살롱 드 메(Salon de Mai)에서 전시하였는데, 소련을 지지하는 공산당의 당원이었던 피카소가 그린 군인들이 미군인지 소련군인지 애매하게 표현되어 해석에 많은 여지를 남겼다. 다만 이 작품이 전쟁의 참상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 많은 이들이 동의할 것이며, 그의 작품 활동이 조형적 탐구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적 관심과 재난을 작품에 직접적으로 투영함으로써 전쟁의 비극과 참상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Massacre en Corée(1951), Pablo Picasso, Huile sur contreplaqué, 110x210cm, Musée national Picasso



"저곳 철로 위에서 폭격과 기총소사와 지상군의 소총 사격으로 님들은 마구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곳, 쌍굴 안에서 60시간을 갇힌 채 기관총 사격으로 님들은 처참하게 숨져 갔습니다.… 우리를 돕겠다고 전쟁의 소용돌이를 헤치고 이 땅에 올라온 미군들이 그처럼 무지막지하게 님들을 죽일 줄이야 누가 알기나 했습니까."(2000년 노근리 희생자를 위한 추모사 중) 라는 정은용씨의 발언은 전쟁이라는 재난의 희생자는 결국 민간인과 약자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우리에게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1960년 노근리 사건의 피해자 정은용씨의 주한미군소청사무소에 손해배상과 사과 요구와 AP통신 기자, CNN 기자의 끈질긴 노력으로 54년이 지난 2004년에서야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법안인 노근리 사건 특별법이 국회의원 전원 찬성으로 제정되었다.


한국전쟁의 비극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군인과 민간인 등 최소 250만여 명이 사망자를 냈으며, 인적, 물적 자원의 토대를 무너뜨리고 수많은 고아와 이산가족이 비극속에서 만들어지는 슬픔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는데 있고, 세계인들이 비인격적인 전쟁의 참상을 목도할 수밖에 없었다는 데 있다. 또한 정전으로서의 전쟁은 현재까지 유효하다.

현대 예술가의 활동과 관심의 영역은 모든 영역에 개방되어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만, 특별하게 국가나 사회적 재난에 분노하고 그로 인한 희생자들이 우리의 곁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러한 슬픔을 나누어야 하는 것도 또 다른 책무임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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