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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ist in Atelier Nov 18. 2022

<전쟁의 얼굴> Dali

재난(Catastrophe)은 항상 곁에 머문다_3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 1904-1989)의 <전쟁의 얼굴(The Face of War)>(1940)



전쟁으로 인한 어두움과 희생자들의 참상을 예술로 표현한 작품들은 많이 존재한다. 하지만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예술에서 어떤 목적성을 가지고 의도를 분명하게 밝히는 방식은 전통적 관습과 가치관을 수호하기 위한 기득권에 많은 견제를 받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근대 이전에는 예술의 후원자가 종교, 권력가들이었고 자본을 회화나 조각, 또는 건축에 후원하여 그들이 추구하는 바를 명확히 표현하기를 바랐으나, 그 이후에는 개인의 주체성이 점차 확립되며 작가가 원하는 표현과 양식을 스스로 선택하게 되었다. 



대항해 시대를 주도했던 스페인은 식민지 경쟁에서 밀리게 되었고, 나폴레옹의 정복전쟁(1803-1815)으로 인해 국력이 기울게 되었다. 따라서 스페인은 경제적인 혼란과 함께 부르봉 왕가(Maison de Bourbon)의 폐지로 '스페인 제1공화국'이 들어섰고, 알폰소 12세(Alfonso XII, 1874-1885)가 복위하는 등 정치적 혼란도 가중되었다. 1929년 미국의 대공황 여파로 스페인을 집권하고 있던 독재자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Miguel Primo de Rivera, 1870-1930)가 실각하였으며, 공화파가 득세하게 되어 군주제가 폐지되었고 '스페인 제2공화국'이 되었다. 공화국은 내분으로 사회적 불안이 계속되었고 지주, 자본가, 가톨릭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파와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의 대립이 심해졌다. 이후 좌파연합이라고 할 수 있는 인민전선(Frente Popular)이 승리하며 다양한 개혁을 실시하였다. 이에 1936년 호세 산후르호와 에밀리오 몰라가 주축이 된 보수 군부세력이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과 연합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국민파(Bando nacional)를 결성하였다. 이후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 주요 기반을 둔 인민전선 중심의 공화파와 군부 중심의 국민파의 내전은 국제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다. 스페인의 영토는 북부의 부르고스(Burgos)에서 국가원수로 추대된 프랑코의 국민파가 북부와 서부를 통치했고, 남부와 동부에서는 인민전선이 지배권을 가졌다. 1937년 4월 26일 국민파를 지원하기 위해 독일 공군인 콘도르 군단이 게르니카(Guernica)를 폭격하여 민간인들에게 많은 피해를 안긴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1939년 국민파의 거센 공세로 마드리드 근처의 일부만 장악한 공화파는 결국 프랑스로 망명했고, 그 해 4월 1일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내전 종결을 선포했다.   

이런 모국의 어지러운 상황은 공산당을 지지했었던 피카소를 프랑코와 독일이 저질렀던 게르니카에서의 폭격을 비난하게 만들었고, 프랑코를 열렬히 지지하였던 달리와는 파리에서의 교류에도 불구하고 소원해질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스페인 카탈루냐의 피게레스(Figueres) 출신인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 1904-1989)는 두 번의 미술학교 퇴학 후 1928년 파리로 이주하여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친분을 쌓았고, 초현실주의에 매료되어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1899)을 탐독하였으며, 다른 이미지가 떠오를 때까지 한 사물을 뚫어지게 쳐다보아 잠재의식에 접근하는 '편집광적 비판 방법(Paranoiac-critical method)'이라는 기법을 개발하게 되었다. 1934년 초현실주의의 창시자 앙드레 브레통(André Breton, 1896-1966)은 달리의 튀는 행동과 정치색을 못마땅하게 여겨 퇴출시키기 위해 회의를 소집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1939년에 프랑코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그를 퇴출시켰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초현실주의 자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퇴출될 수 없음을 명백하게 선언했다. 이후 달리는 미국으로 이주하여 상업적 성공을 거두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다시 스페인으로 귀국한 달리는 프랑코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전쟁의 얼굴(The Face of War)>(1940)은 전쟁의 상흔에 고통받는 인간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의 지성인들은 인간의 이성과 도덕적 신뢰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며 전통적 가치와 질서에 반기를 들었다. 이즈음 발생한 빈번한 전쟁으로부터, 초현실주의자 앙드레 브레통이 생디지에 병원에서 겪었던 것처럼, 많은 예술가들은 한편으로는 충격과 다른 한편으로는 영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The Face of War (1940), Salvador Dali, Oil on canvas, 67x79cm, Museum Boijmans Van Beuningen.

달리는 예술적 동력을 "첫 번째는 리비도 또는 성적 본능이고, 두 번째는 죽음의 고뇌입니다"라고 노트에 기술할 정도로 그의 죽음에 대한 사유는 강렬했다. <전쟁의 얼굴>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황량한 사막 위에 머리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얼굴은 죽음의 체액이 점점 빠져나가 건조해지는 형상을 띤다. 못 박힌 그리스도의 몸에서 빠져나온 성스러운 구원의 체액은 더 이상 그의 그림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불가리아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1941~)는 이것을 실존적 위협과 죽음에 대한 공포인 아브젝트(Abject)라고 명명하였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사회로부터 더러운 쓰레기나 부산물로 여겨져 배척된다. 그런데 <전쟁의 얼굴>에서는 그렇게 몸으로부터 유출된 침, 고름, 수액 등은 고갈되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전쟁의 혼란함으로부터 자신과 타자와의 경계에 대한 불확실성을 느끼고, 삶과 죽음의 경계,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교란된다. 익숙했던 질서와 체계가 교란되는 아브젝시옹(Abjection)된 체제로 전환된 것이다. 이제 더러운 것이 빠져나가 가죽만 남아 인간의 존엄성은 더 이상 없고 인간은 사물이 될 뿐이다. 그래서 폐기된다. 


얼굴의 눈, 코, 입의 구멍은 모두 개방되어 있고, 그 안에서 얼굴의 중첩과 반복은 지옥 구덩이에서 끊이지 않고 반복되는 고통과 불안을 표현한다. 끊이지 않는 죽음의 반복에 대한 메시지, 구덩이 속에서 점점 해골로 변해가는 끝나지 않는 고통이 반복된다. 이런 점은 달리가 새겼다고 주장했던 우측 하단에 새겨진 손자국을 통해 근대국가적 폭력, 전쟁 기제를 증거 하는 증인이 되었다. 


<전쟁의 얼굴>에서 얼굴을 에워싸고 있는 뱀은 한편으로는 그리스 신화에서 아홉 개의 목을 가진 히드라(Ύδρα)를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르고 또 잘라내도 두배로 증식되는 불사의 머리처럼 희생자의 얼굴을 위협적으로 감싼다. 독사의 독이 마치 얼굴을 물기라도 한 것처럼 잿빛으로 변해가며 썩어 들어가는 창백함은 공포로 가득한 일그러져가는 얼굴과 함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상태에 처해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 그 얼굴은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e Caravaggio, 1571-1610)의 <메두사의 죽음(Die Erste Medusa)>(1598)의 무시무시한 얼굴을 상기시킨다. 전쟁의 공포스러움은 아름다움으로 가장한 메두사의 눈을 보고 돌로 변해가는 엄청난 충격과 공포스러움과 마주하고 있다. 그의 작품의 특징인 강한 명암의 대비를 극적으로 사용해 표현하는 테네브리즘(Tenebrism) 기법을 가감 없이 볼 수 있다. 

Die Erste Medusa(1598), Michelangelo Merisi de Caravaggio, Sala44, Galleria degli Uffizi, Firenze

역설적이게도 달리가 추종했던 프랑코를 지원한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 무솔리니(Benito Andrea Amilcare Mussolini, 1883-1945)는 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사지로 몰아넣은 독재자들이었다. 달리는 "나는 항상 제복에 꽉 조여진 히틀러의 부드럽고 살찐 등에 사로 잡혀 있다. 나는 벨트에서부터 어깨까지 가로지르는 히틀러의 가죽끈을 그리려 할 때마다 군복으로 포장된 그의 살의 부드러움에 두근거리는 바그너적 황홀경에 빠진다. 나는 사랑의 행위 중에도 이 같은 극도의 흥분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세 번째 세계, 김채린, p.287)고 할 정도로 히틀러를 찬양했으며, <히틀러의 수수께끼(The Enigma of Hitler>(1939)라는 그림을 통해 독재자를 찬양하는 듯한 제스쳐를 취한다.


<히틀러의 수수께끼>는 잎사귀가 하나도 없는 가지가 잘린 생기 없는 마른 나뭇가지에 우산과 송수화기가 걸려있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박쥐는 흡혈귀 같이 유럽의 피를 빨아먹는 전쟁, 전화기는 전쟁을 위한 통신선, 전화기가 끊어져 있다는 것은 협상의 결렬을 의미한다. 우산은 영국의 총리였던 체임벌린(Arthur Neville Chamberlain, 1869-1940)을 상징한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1937년 9월 30일 독일의 히틀러와 영국의 체임벌린을 포함한 이탈리아, 프랑스 4개국이 평화를 위한 회담 결과로 뮌헨협정을 체결과 6개월 뒤 독일의 협정 파기로 인한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히틀러 사진이 담긴 접시와 주변에 떨어져 있는 몇개의 콩에 주목해 볼 만하다. 먹다 남은 콩인지, 아니면 콩을 몇 개 밖에 담지 못하는 상황을 그리는 것인지 추적해 보아야 한다. 추측컨데 미국 대공황의 여파로 빈곤과 대량 실직의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는 유럽의 상황을 묘사한 것이리라. 그의 경향을 살펴볼때, 그림에서 묘사된 떨어지는 눈물은 달리에게는 전쟁을 앞둔 사람들에게 다가올 비극에 대한 조금의 연민이라도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의 언급처럼 환상만을 보았던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The Enigma of Hitler (1939), Salvador Dali, 95x141cm, Oil on canvas, MUSEO REINA SOFIA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과학의 힘에 압도된 달리는 <멜랑콜리, 원자, 우라늄의 목가(Melancholy, Atomic, Uranic idyll)>(1945), <비키니섬의 세 스핑크스(Three Sphinxes of Bikini)>(1947)등을 그렸다. 사실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많은 예술가들이 충격을 받았는데, 달리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다. 그는 '핵 신비주의(Nuclear Mysticism)'라는 용어를 만들며 <멜랑콜리, 원자, 우라늄의 목가>를 그렸다. 이런 점은 훗날 반물질 선언(1958)에서 "초현실주의 시대에 나는 내 아버지 프로이트의 내부 세계와 경이로운 세계의 도상학을 창조하고 싶었다. 오늘날 외부 세계와 물리학의 세계는 심리학의 세계를 초월했다. 오늘 나의 아버지는 닥터 하이젠베르크이다"라고 밝힐 정도로 과학과 기술에 매료되었다. 작품에서의 검은 배경은 원자와 전자가 뒤섞인 벙커에 브롱크스 폭격기 형상의 눈코입을 가진 남자와 폭격기로 불리는 뉴욕 양키스 선수가 그려져 있다- 브롱크스는 뉴욕양키스의 홈구장이 있는 곳이다. 뒤쪽에는 달리 특유의 가느다란 다리를 가진 코끼리가 무차별적으로 폭탄을 터뜨린다. 알프스를 넘었던 카르타고의 한니발(Hannibal Barca, BC247-183)의 끊임없는 공격과 진군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었을까? 그런 힘에 짓눌려 결국 녹아내리는 얼굴과 형상들은 결국 대량 살상과 세계의 종말을 의미한다. 

Melancholy, Atomic, Uranic idyll, (1945), Salvador Dali, Oil on canvas, 66.5x86.5cm, Reina Sofia


<비키니섬의 세 스핑크스>는 달리가 천착했던 원자와 핵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미국은 서태평양의 미크로네시아의 비키니 환초(Bikini Atoll)에서 1946년에서 1958년까지 23번의 원자폭탄 실험을 했다. 방사능의 여파로 주민들은 1968년까지 섬에 들어가 생활할 수 없었다. 하지만 1969년 다시 섬으로 이주 후 1978년도에 사람이 거주하기 힘들 정도의 치명적인 방사능 수치가 밝혀지자 섬에 살던 주민들은 다시 강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폐허가 된 것이다.

Three Sphinxes of Bikini, (1947), Salvador Dali, Oil on canvas, 66.5x86.5cm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세개의 유사한 뒷모습 형상이 근경으로부터 사람, 나무, 구근 모양의 버섯구름의 이미지로 구분되어 화면에 배치되었고, 버섯구름은 인간과 자연을 파괴하는 형상처럼 표현되었다. 이로 인해 황폐화된 사막이 그 배경을 이룬다. 작품명은 비키니 섬의 환초 3개가 핵 실험으로 사라졌다는 사실에 기초하였고, 핵의 위력을 스핑크스 괴물에 빗대어 작명하였다. 



정치적인 상황에 휘말리기를 거부했던 달리의 언행과는 다르게 그의 작품과 행적에 다양한 정치색이 부여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는 일본에 원자폭탄이 터졌을 때 초토화된 일본에는 관심조차 없다고 진술했고, 단지 폭발 뒤 생명이 사라지고 난 후의 '극한의 고요함'에만 주목한다고 말한 점을 볼 때, 그가 기술의 사용에 대한 결과보다는 기술 자체에 매료된 것이 분명하다. 달리와 정치적으로 반대의 입장을 취했던 조지 오웰(George Orwell, Eric Arthur Blair, 1903-1950)이 그를 "사람들은 달리가 훌륭한 기초자이면서 역겨운 인간이라는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머릿속에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말로 평가한 점을 상기해 본다.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 1942-1945)'로 원자폭탄 개발을 주도했던 오펜하이머(Julius Robert Oppenheimer, 1904-1967)는 '트리니티(삼위일체, Trinity)'라는 작전명으로 1945년에 미국이 최초의 핵실험에 성공하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실제 원자폭탄이 사용된 것을 목도하고 인간에 대한 연민과 세상의 종말에 대해 경고하며 핵무기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가 흰두교의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The Bhagabad Gita)를 인용하며 "나는 죽음의 신이요, 세상의 파괴자다"라고 언급한 것처럼 기술을 사용하는 주체의 견해와 관점이 중요한데, 그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내 손에는 아직도 피가 묻어 있다"라고 말하며 과학과 기술의 진보가 가져올 수 있는 윤리적 문제를 후세에게 남겼다. 핵무기 개발과 동시에 평화주의를 추구했던 아이러니한 그의 삶은 아직도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으며 이러한 울림과 떨림은 현대의 예술가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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