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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ist in Atelier Jun 22. 2023

<런던 대화재> 작가 미상

재난(Catastrophe)은 항상 곁에 머문다_8

1666년 9월 2일 일요일 저녁, 런던에 위치한 토마스 패리너(Thomas Farynor)가 소유한 푸딩 레인(Pudding Lane)의 빵집에서 시작된 불은 오래된 가뭄과 동쪽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의 영향으로 피쉬 힐(Fish Hill)을 따라 템즈강을 향해 계속 번졌다. 특히 템즈강변에 비축된 기름창고, 브랜디 창고 등을 강타하며 삽시간에 불길이 번져 9월 5일까지 화마의 악몽은 계속되었다. 불길은 당시 35만 명이 거주하던 런던의 5분의 4 정도에 피해를 입혔는데 왕립 거래소(The Royal Exchange), 길드홀(Guildhall)을 포함한 13,200여 채의 집과 세인트 폴 대성당(St. Paul’s Cathedral)을 포함한 87개의 교회를 무참히 삼켜버렸다. 런던 대화재(Great fire of London)의 인명피해는 사망자가 단 6명뿐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불에 탄 빈민들의 생명은 기록되지 않아 사망자 수는 더욱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 해군 서기인 새뮤얼 페피스(Samuel Pepys)는 당시의 기록을 일기로 남겼는데, 당시의 참혹상이 인간과 재산뿐만이 아나라 동식물에게도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물건을 옮기려 애를 쓰고 강으로 던지거나 배에 싣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불길이 집에 닿을 때까지 그 안에 머무르다가 그제야 보트로 달려가거나 물가의 계단에서 다른 계단으로 오르내렸다. 그리고 불쌍한 비둘기들은 자신들의 집을 떠나길 싫어했지만, 창문과 발코니 주변에서 날아다니다가 날개가 타고 추락하는 것을 목격했다." - 9월 2일의 일기 중에서 -


The Great Fire of London in 1666, 작가 미상

작자 미상의 위의 작품에 묘사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멀리서 다가오는 화마를 피해 템즈강변으로 몰렸고, 무기력하게 런던의 불타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화마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비참한 심정은 새뮤얼의 일기에서 다시 드러난다.

"주여! 달빛 아래에서 보았을 때 얼마나 슬픈 광경이었는지, 거의 전체 도시가 불에 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울리치에서도 마치 그 옆에 있는 것처럼 그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 9월 5일의 일기 중에서 -


The Great Fire of London in 1666, Lieve Verschuier, Museum of Fine Art, Budapest

위의 작품에는 17세기 중반 런던 대화재 당시 화재를 피해 템즈강변으로 피신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당시 런던은 대부분 목조로 지어져 방수를 위한 피치(Pitch, 역청)가 칠해져 있었으며, 건물과 건물사이에 공간이 없게 지어져 화재에 취약한 상태였다. 런던은 도시의 설계가 무질서했으며, 화재 발생 시의 대처법은 양동이와 물뿌리개 정도만 이용해 진압해야 할 정도로 조직화된 소방대가 전무했다. 새뮤얼은 화재가 더 이상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화재의 경로에 있는 건물들을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했거, 결국 찰스 2세의 명으로 런던의 건물들을 파괴하여 방어벽을 세우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화마가 번져가는 것을 막기 위해  건물들이 부수어 방벽을 세우게 되었다.


당시 화재진압에 사용했던 가죽양동이


결국 화재 나흘 만에 동풍이 잦아들며 바람의 방향이 남쪽으로 바뀌었고, 화재는 진압되었지만 이 기간 중에 많은 재난 상황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희생양이 필요해 거짓 소문이 퍼져나갔다. 당시 네덜란드는 암보니아(Amboyna) 사건(1623)으로 영국의 동인도 회사를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에서 철수시켜 네덜란드는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게 되었다. 암보니아 사건은 네덜란드의 동인도(인도네시아) 말루쿠 제도의 암보니아섬에 있는 네덜란드 길드 사무소가 영국 길드 사무소에 의해 습격당해 사무소 직원들이 살해된 사건을 말한다. 이로 인해 발생한 3차례에 걸친 영국-네덜란드 전쟁은 영국인들이 외국인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원인이 되었다. 특히 런던 대화재는 제2차 네덜란드-영국 전쟁(1665-1667) 기간 중에 발생했는데 증오의 대상이 적국이었던 네델란드인과 그들을 지지했던 프랑스인들에게 돌려졌고, 결국 프랑스 루앙의 시계 제조업자의 아들인 로베르 위베르(Robert Hubert)가 범인으로 지목되었다. 그는 고문 끝에 방화범이라고 자백할 수밖에 없었고 사우스워크의 화이트 라이온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위베르는 그가 타고 온 배의 선장의 증언으로 화재가 시작된 이틀 뒤에 영국에 도착했다는 것과 화재가 시작된 빵집에 큰 창문이 없었지만 위베르가 창문을 통해 불씨를 던져 불을 질렀다고 자백했던 것이 거짓으로 판명되어 무죄를 인정받았다. 그의 결백은 분명했으며 당국은 이를 인정했지만, 결국 희생양의 운명을 피하지는 못했다.


아래의 에칭은 교황의 지시에 따라 묘사한 그림이다. 오른쪽 하단부의 서있는 'Hubert' 글자 위에 묘사된 위베르는 예수회 신부인 'Pa.H'에게 무엇인가를 건네받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묘사된 예수회 신부는 하코트(Harcourt)인데 그는 왕을 살해하려 한 혐의로 체포되어 뉴게이트 감옥에 수감되었고, 그것은 곧 반역을 뜻하였으며, 두 사람의 운명은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마감한다. 결국 찰스 2세의 화재진압 실패에 따른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해 희생양이 된 위베르는 1666년 10월 27일 사형당한다.


Pyrotechnica Loyolana, Ignatian fire-works, or, The fiery Jesuits temper and behaviour, 1667



런던 대화재 이후 무너진 거리의 토지배분에 관한 법적 다툼으로 인해 대부분의 거리를 대화재 이전의 설계대로 유지할 수밖에 없었으나, 화재에 취약한 목조 건축물은 화재에 강한 벽돌로 대체되어 재건되었다.

이후 런던에서는 민영 소방조직이 마차를 이용한 공영 소방조직으로 바뀌었으며 석재 건축법이 생겼고, 대화재를 기회로 삼은 금융가들은 화재 보험을 만들어 부를 더하게 되었다.


The monument to the Great Fire of London


찰스 2세는 인명과 많은 물적 피해를 입혔던 런던 대화재를 추념하기 위해 발화지점인 푸딩 레인으로부터 61.5m 떨어진 곳에 기념비를 세우게 하였다. 대화재 기념비는 화재로 소실된 세인트 폴 대성당(St. Paul's Cathedral)을 위시해 50여 개의 성당을 재건하고 도시의 재설계를 맡은 건축가이자 천문학자인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 1632~1723)과 셀(Cell)을 관찰하고 명명한 과학자이자 건축가인 로버트 훅(Robert Hooke, 1635~1703)이 설계하였다. 기념비는 약 61.5m의 높이의 도리아식(Doric) 석재 기둥으로 세워져, 하단부에 비문과 카이오 가브리엘 시버(Caius Gabriel Cibber)의 부조, 전망대와 불꽃 형상으로 조형된 금색 단지가 결합되어 있다. 전망대는 311개의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면 런던 시내의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



우리는 1669년도에 통과된 런던 대화재 재건법이 주창했던 "이 끔찍한 방문의 기억을 더 잘 보존하는 것이 좋다(the better to preserve the memory of this dreadful visitation)"라는 언급을 통해 피할 수 없는 재난이 기억되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기념비에는 단지 화재가 3일 동안 계속되어 13,000채 이상의 주택을 포함하여 근처의 436 에이커를 황폐하게 만들고 6여 년이 걸려 기념비가 세워졌다는 간단한 정보만 표기되어 있을 뿐이다.

지금은 그들의 무능함과 아픔, 희생자들, 그리고 당대에 논의되었던 추념의 필요성은 지워진 채 후대인에 윤색된 기념비가 남겨져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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