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로 Jul 14. 2024

늦비

- 늦은 밤, 자신만의 치유시를 적으며 마음 회복하기

늦비     


늦비가 내린다

그저 묵묵히, 선하고 순했던

깊이 꾹꾹 새겨진 발자국들을 지운다     


늦비가 내린다. 늦비는

무겁고 힘겨웠던 생을 기꺼이 들어준

그대의 고귀한 발자국이 그려낸 생의 흔적들을 지우며

새로운 내일을 맞이할 그대를 위해 과거의 길을 씻어낸다     


그대여, 이제는 뒤를 돌아보아도 되어라

이제는 고개 떨구고 아래를 보아도 되어라

자꾸만 뒤돌아보며 움츠리게 만들던 대지는

따스한 봄햇살에 녹아내린 겨울의 흰 눈처럼

소리 없이 고옵게 내리는 늦비를 맞으며

여름처럼 촉촉하고 싱그러워졌으니.     

아니, 그대여 이제는, 그대가 가을이 되어라

흐뭇하고 푸지게 열매를 내고 거룩한 겨울이 되어라     


그대를 위해 나는 오늘, 잔잔한 늦비가 되어라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아이 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 어머니, 아이가 아직 학교에 안 왔어요.     


  마음이 쿵. 알겠다고 전화를 끊고 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이나 걸어보지만 받지 않는다. 그날은 다행히 1교시 수업이 없는 날이었다. 직장동료들에게 혹시 2교시에 늦게 들어갈 수도 있을 거 같다고 급하게 양해를 구하고 집을 향해 뛰쳐나왔다. 가면서 담임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 혹시 저희 아이만 아직 안 왔나요? 아니면 아직 안 온 아이들이 혹시 더 있나요?     


  선생님께서 잠시 뜸을 들이시더니 나를 염려하며 달래주려 하시는 듯한 어조로 말씀하신다.     


  - 어머니, 실은 아이가 요즘... 계속 학교에 늦게 왔었습니다. 9시 많이 넘어서 교실에 들어오진 않았더래서 말씀 안 드렸어요. 너무 걱정마셔요. 늦잠 자고 있나 봅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었다. 알겠다고 하고는 전화를 끊는데 감사하게도 눈앞에 택시가 있었다. 집 앞에 도착할 때쯤 기사분께 잠깐만 집에 들어갔다 나오려 하니 죄송하지만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말씀드리고는 아파트 계단을 미친 듯이 뛰어 올라갔다. 내가 사는 집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40여 년 된 5층짜리 아파트다. 문 열고 집에 들어가니 다행히 아이는 정말 침대에서 곱게 자고 있었다. 급하게 아이를 깨우니, 잠시 어리둥절하게 있다가 시계를 보고는 얼굴이 시뻘개져서 울음을 터뜨렸다. 빠르게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야 하는지라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아이를 그냥 둔 채, 울 시간 없다고, 그냥 빨리 학교 가라고 하고는 또 뛰쳐 나와 택시를 타고 직장으로 돌아왔다. 평소에 30분 걸려 가는 거리를 왕복으로 20분 만에 다녀왔다. 미친 듯이 뛰어서 직장에 다시 도착해 교실 문을 여는데 2교시 수업 시작종이 울렸다. 세이프!     


   2교시 수업 끝나고 교무실로 돌아오니 핸드폰에 톡이 잔뜩 와 있었다. 아이다. 죄송하다고. 지금 학교 가고 있다고. 학교 왔다고. 미안하다고. 학교 늦은 내용은 없고 온통 엄마에 대한 미안함만 가득인 문자들. 갑자기 잠에서 깨어 깜짝 놀라 큰소리로 엉엉 울던 아이를 그냥 놓고 나온 게 생각났고, 그제야 큰 후회가 덮쳤다. 한 번 안아주고 나올걸. 괜찮다고 말해주고 나올걸.     


  나도 톡으로 장문의 답을 남겼다. 괜찮다고. 걱정말라고. 오늘 하루 잘 보내라고.     


  보통 8시면 집에서 나와야 한다. 그래야 직장에 8시 30분 안팎으로 도착할 수 있다. 출근 시간은 8시 40분이고, 버스가 늦게 오거나 날이 궂으면 40분 넘어서 도착할 때도 있다. 아침 일찍 나와야 하는 엄마 따라서 아이는 어린이집 다니던 3살 때부터 줄곧 8시도 안 되어 눈곱만 겨우 뗀 채, 집을 나오곤 했다. 올해 4학년이 되면서는 이젠 혼자 일어나서 학교 갈 수 있다고 하도 장담하길래 아이는 그냥 두고 나만 챙겨서 먼저 출근했다. 잘하고 있는 줄 알았다.     


  수업이 끝나고 담임선생님께 죄송하다고 연락을 드렸다. 요즘 유튜브 종이접기에 빠져서 밤늦게까지 놀다가 자더니 그랬던 것 같다고, 혼내고 단도리 시키겠다고 말씀드렸다. 담임선생님께서는 학교에서도 요즘 쉬는 시간 내내 종이접기를 한다며 좋은 취미라고 생각한다고 허허 웃으며 지나가 주셨다. 일하는 엄마가 혼자 키우는 아이라는 걸 선생님은 알고 계신다. 안다. 아마 안쓰러운 마음이셨을 거다. 담임선생님과의 연락을 끝내고 그만 눈물이 터졌더랬다. 서러웠다. 왜 나는 든든한 친정 식구 하나 없는 걸까, 왜 나는 지독하게도 이렇게 혼자 모든 걸 다 해야만 하는 걸까. 나뿐이 아니다. 아이는 이미 너무 어릴 때부터 혼자 외롭게 자신을 챙기며 커 버렸다. 7살 즈음부터는 이미 엄마카드 들고 나가서 편의점에서 뜨거운 물 부어서 라면 끓여 먹고, 삼각김밥과 샌드위치를 사 먹을 줄 알았고, 아픈 날에는 벌써 혼자 병원과 약국도 다녀올 줄 안다. 아침 일찍 엄마랑 집을 나와서 엄마가 퇴근해서 집에 오는 저녁 7시까지 학원을 전전하며 몇 년을 보내온 내공도 만만치 않다. 피곤할 만하다. 지칠 만하다. 고작 열한 살이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아이와 떡볶이를 먹으며 긴 이야기를 나눴다. 내일부터는 다시 엄마랑 같이 8시에 학교 가기로 약속했고, 밤 9시 반이면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아이는 눈물이 그렁그렁하면서도 알겠다고 약속했다. 아이가 가장 속상해했던 부분은 이거였다. 놀 시간이 너무 없다는 것. 온종일 학원 가 있다 오고, 저녁 먹고, 엄마랑 공부하고 나면 보통 9시가 넘는데, 9시 반에 자야 하면 실제로 아이가 맘 놓고 노는 시간이 하루에 십여 분도 안 되는 셈이었다. 내가 아이래도 그렇게는 못 살 거 같았다. 아이는 틈틈이 친구들과 놀 수 있게 핸드폰 게임이라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핸드폰에는 유해한 앱이나 영상들을 차단하는 프로그램이 깔려 있는데 친구들과 가장 즐겁게 하는 게임 두 가지를 골라서 그 두 가지는 무한정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잠금을 풀어 주었다. 와우. 그게 뭐라고. 그날 밤, 아이는 아주 많이 행복해하며 잠들었다. 심지어 자기 전에 “엄마, 사랑해요.”를 몇 번이나 했다. 핸드폰 게임 만만세.     


  그날 이후, 아이는 나와 함께 다시 예전처럼 아침 8시에 집에서 나와 일찍 학교에 간다. 취침으로 정한 9시 반은 지키지 못하고 있다. 10시 즈음 되면 잔소리를 들으며 씻고, 실제로는 10시 반 안팎에 잔다. 곱게 잠든 아이를 보는데 그만 또 눈물이 울컥, 차오른다. 아이가 너무 고맙고 예뻤다.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세상 태어난 지 고작 십여 년인데 이 작고 여린 가슴 속에 슬프고 외롭고 속상한 기억들을 이미 제법 많이 담고 있는 아이. 그런데도 그러든 말든 아이답고 천진하게, 잼민파워 뽐내며 잘 살아내고 있는 멋진 녀석. 나는 아이를 사랑한다, 아니, 존경한다! 밤늦게 눈물바람 나고 있는 주책맞은 나보다 백만 배는 훌륭하다. 이런 눈물이 나는 날도 있구나. 잔잔한 눈물이었다. 억지로 꾹 참고 있다가 끝내는 터져서 내 안을 할퀴고 부수고 쓸어내는 억억한 울음이 아니었다. 비네, 비. 곱고 고운 비네. 느지막이 찾아와 촉촉하게 적셔주는 비 같은 눈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깊어지는 밤, 고요히 앉아서 나만의 치유 시 <늦비>를 썼다.     


  얼마 전에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인 김진주의 책 <싸울게요, 아직 안 죽었으니까>를 읽었는데 그 책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길을 걸으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고. 예전에는 그런 방식으로 걷지 않았다고. 앞만 보며 걸을 수 있었다고 말이다. 그 문장을 읽으며 류시화의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 생각났다. 그 책과 시들을 읽을 때마다 항상 맘 어딘가 한 켠이 달그락달그락, 불편했는데 김진주의 글을 읽으며 ‘아하, 그래서 그랬구나!’하고 나를 이해하게 되었던 적이 있다.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온통 버겁고 힘들기만 한 하루 같았고, 또 무슨 일이 날까 걱정하며 움츠러든 채 온갖 염려와 망상을 하는데 엄청난 에너지를 써왔던 것 같다.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살아갈 수가 없어서, 자꾸 뒤돌아보며 걷는 습관이 생겨서, 내 앞에 놓인 시간들이 너무 두렵고 무서워서 그렇게도 매일 피곤하고 힘들었다는 것을 그녀의 책을 읽다가 깨달아 버렸다. 그리고 <늦비>를 다 쓰고 나서 또 한 번, 아하! 하고 깨달았다. 잔잔한 눈물의 시간을 지나고 나니 지나온 길들을 되돌아보는 게 두렵고 아프지 않아졌다는 것을. 우리는 꼭 무섭고 두려워서 문득 과거를 뒤돌아보며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아프고 힘들었을지 모르지만 예쁘고 기특하며 뿌듯했기도 한 과거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이다. 내게 그런 과거를 만들어준 고맙고 사랑스러운 아이. 오늘의 시 <늦비>를 아이에게 바치고 싶다. 내 삶은 어느새 가끔 이렇게 조용하고 고요히 내리는 늦비를 만나기도 하는 삶이 되었구나. 이것이 변화이고 성장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삶이지만 정말 많은 게 변화한 삶이지 않은가. 나, 잘살고 있나 보다.

작가의 이전글 피노키오의 나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