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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Nov 11. 2017

베이킹 테라피

리틀 포레스트의 이치코처럼

 일상은 좀처럼 닳지도 않고 바래지도 않는다.


나른하고 지루한 날들은 금방이라도 부글부글 거품이 생길 것처럼 그늘을 드리우고 흐물거리며 다가왔다가는 저만치 물러난다. 매끄러운 호수의 표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어둠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하는 게 느껴지면 일상을 리셋하는 버튼이 어디 없을까 두리번거리게 된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뭐라도 만들어 볼 요량으로 냉장고 안을 살피다가 붉은 물이 금방이라도 주르륵 흘러내릴 것 같은 토마토를 보았다. 그 순간 머리에 떠오른 음식 한 가지가 있었다. 구운 콩 요리다. ‘타샤의 식탁’에서 예전부터 눈여겨보던 레시피로 토마토 주스와 콩이 주재료다.


 아직 직접 만들어 본 적은 없지만 통조림에 들어있는 상태로 간혹 접하던 음식, 휴가지의 숙소에서 종종 보게 되는 아침식사 메뉴의 한 가지로 남편이 특히 좋아하는 것이었다. 공들여 레시피를 읽고 식재료를 점검했다. 완두콩이 필요했지만 냉동실에는 울타리콩과 강낭콩, 풋콩과 동부콩이 전부였다. 소시지와 베이컨도 없고 겨자가루도 없다. 시들고 무르기 시작하는 양파와 농익은 토마토가 내가 가진 전부였지만 물살에 휘말리는 작은 조각배를 탄 것처럼 제어할 힘을 잃은 날에 단순하고 소박한 질서를 되찾아 줄 무엇인가가 절실했다. 머뭇거리거나 뒷걸음질치고 싶지 않은 데다가 무엇보다 요리를 완성하기까지 8시간이나 걸린다고 하지 않는가. 일단 냄비에 콩을 담은 후 물을 붓고 가스레인지 손잡이를 돌렸다.


시장 바구니는 항상 무겁지만 정작 필요한 재료들을 언제나 구비하고 있기란 어렵다


 콩을 삶은 후에 베이컨과 소시지를 사 오고 무르기 직전의 토마토를 믹서에 갈아서 넉넉한 양의 주스를 만들었다. 양파를 얇게 썰어서 냄비에 담고 아삭할 정도로 삶은 콩을 얹었다. 베이컨과 소시지를 잘라 넣고 토마토 주스를 부어서 오븐에 넣어두면 끝이다. 120도에서 8시간이다. 가끔 냄비 뚜껑을 열어 눌어붙지 않도록 저어주면 된다. 생각보다 간단하지만 오븐 속에 뭔가 넣었으므로 구체적이고 형태를 갖춘 어떤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에 모자람이 없다. 오븐 안에서는 토마토 주스에 담긴 콩과 소시지가 느리지만 확실히 익어가고 있으므로 어쨌든 지금은 요리 중인 것이다.

 

 두꺼운 장갑을 끼고 냄비 뚜껑을 열어 나무주걱으로 뭉근하게 끓고 있는 콩을 뒤적이는 일, 책 속에서 찾아낸 문장들이 음식으로 만들어지는 신기함. 차츰 번지기 시작하는 냄새와 함께 오븐의 열기로 따뜻해지는 부엌에서 토마토즙에 담겨있는 콩에 집중했다. 나른함, 의심, 불안함, 막막함, 찜찜함, 무기력함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끓고 있는 찻주전자의 작은 공기구멍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김처럼 내 몸 여기저기서 피식피식 터져 나왔다. 쌓이고 쌓여서 더 이상 숨을 자리가 없었던 때문이리라. 그대로 놔두었다면 옷의 솔기가 터지듯 예상치 못한 곳으로 비어져 나오거나 터져버리고 말았을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밀가루와 버터에 두 스푼의 물을 넣어 만든 반죽, 냉장고에 두어 시간 두었다가 밀대로 밀어 파이껍질을 만든다


 매일의 식탁을 차리기 위해 밥을 짓고 익숙한 반찬들을 만들던 부엌에서 낯선 음식을 만들거나 밀가루와이스트로 빵을 굽는다는 건 갑자기 떠나는 여행을 닮았다. 여행이 일상의 공간에서 최대한 멀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빵과 쿠키를 굽는 모습도 보통날의 부엌 풍경과는 다를 터이다. 성질이 다른 밀가루와 물을 섞어 새로운 형태로 만드는 일은 지루하다. 팔과 손목이 아파올수록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는지 회의가 생기기도 하지만 힘을 주어 치대고 주무르는 지극히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복잡한 감정과 문제들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반죽을 해서 부풀리고 형태를 만들어 달구어진 오븐에 넣어 기다리는 과정을 거치면서 나 역시 점점 순해지고 부드러워진다.



타르트를 만드는 시간의 대부분은 타르트쉘을 만드는데 바쳐진다.  얇지만 탄탄하게 제대로 구워진 타르트쉘에 다양한 재료를채워 넣고 타르트를 만드는 건 소꿉놀이처럼 즐겁다


  일상에서 떠나고 싶을 때마다 실제로 여행가방을 쌀 수는 없지만 여행가방을 싸듯이 냉장고와 선반을 뒤져 필요한 재료를 꺼내고 다듬을 수는 있다. 가뿐하게 떠날 수 있도록 단순하고 익숙한 재료들, 설레기에 충분할 정도의 새로운 레시피, 지치거나 지루하지 않을 만큼의 난이도와 시간이 필요한 음식들을 고른다. 여러 가지 색이 고운 야채들을 썰어서 초절임을 만들거나 양파를 볶아서 수프를 끓인다. 샌드위치를 만든다는 핑계로 아랫동네 슈퍼에 어슬렁거리며 다녀오거나 초콜릿 칩이나 말린 과일을 찾아내서 밀가루와 베이킹파우더와 함께 반죽해 스콘을 굽기도 한다.


버터를 넣은 정통 스콘, 생크림을 넣어 부드러운 스콘도 있지만 이것은 요구르트를 넣어 포근하게 만들어서  따뜻할 때 먹으면 좋은 스콘이다


 자칫 마음을 놓아서 너무 빨리 완성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설거지감이 쌓이고 주방에 열기가 더해지는 만큼 신경도 누그러지고 머리도 맑아진다. 김이 나는 냄비, 물이 끓는 주전자와 달궈진 오븐의 수다에 끼어 있다 보면 불확실함과 어지러운 시절에 대한 염려가 사라진다. 반죽을 하고 양파를 다지고 계란 흰자로 거품을 만드는 자신을 남 구경하듯 바라보는 동안에 무엇이 어긋나서 내 마음이 이토록 삐걱거리는지 절로 알게 된다. 바로 잡거나 깨끗이 포기하는, 어쩌면 어려웠을 일들이 부엌에서 잼을 조리고 쿠키를 만드는 동안 절로 제자리를 찾는 것이다. 부엌은 파이를 굽고, 시럽을 만드느라 뜨겁고 크림을 굳히고 젤리를 만드느라 시원하다. 온탕 냉탕을 오가면서 몸을 단련하는 것처럼 마음을 단련하기에 부엌만 한 곳, 파이를 굽는 시간만 한 것이 또 있을까? 나만의 베이킹 테라피다.



반죽하는 이치코의 손 -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이치코는 한여름에 장작난로에 불을 피워 빵을 굽는다. 습기와 싸우는 것이다. 습기는 곰팡이를 앞세워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주걱들을 못쓰게 만들고 부엌을 점령하고 급기야는 온 집안을 정글처럼 만들어버릴지도 모른다. 습기 따위에 져서 의기소침해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난로에 장작을 넣고 불을 지핀다. 집안은 조금씩 말라서 보송해질수록 그만큼 더워진다. 한여름이라 난로에서 나오는 열기는 견디기 어렵지만 바로 그 상황을 이용해 빵을 만들기로 한다. 반죽을 하고 부풀 때까지 기다리는 과정을 두어 번 되풀이하고 난로의 열기가 잦아들기를 기다려 반죽을 넣는다. 황금빛으로 구워진 빵을 꺼낼 즈음이면 집은 가볍게 습기를 털어 버렸고 지쳐있던 미치코의 얼굴도 순하게 맑아져 있다.


 엄마는 집을 나가버렸고 연인과는 헤어졌지만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는 느낌이 표정에 묻어난다. 난로의 불은 꺼졌지만 갓 구운 빵 한 덩이가 남아있듯이 인생의 막은 거듭 열리기 마련이다. 이치코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엄마가 구워주던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다시 굽고, 당근 케이크에서 받은 영감으로 양배추 케이크를 굽기도 한다. 비록 오꼬노미야끼 맛이 나는 양배추 케이크를 먹느라 곤욕을 치르더라도 멈추지 않는 것이다. 한 번의 실패는 언제까지나 되풀이될 수백수천 번의 상상보다 확실한 것이고 확실함은 불안함을 몰아낸다.



버터와 레몬과 계란을 듬뿍 넣고 만든 마들렌,  갓구운 마들렌은 마음만 먹으면 한 판 정도는 앉은 자리에서 다 먹을 수도 있다


 한바탕 부엌을 휘저어놓고 나면 나도 이치코처럼 상황을 그대로 대면할 용기가 생긴다. 이치코가 버리고 떠났던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케이크를 굽고 고구마를 말리고 쌓인 눈을 치우는 것처럼 호수 아래 가라앉은 온갖 감정들이 절로 몸을 드러내고 말간 얼굴을 보여 줄 때까지 그대로 놓아둔 채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내딛으며 나아간다. 낯선 레시피들을 들여다보며 만든 요리나 익숙하더라도 순서를 지키고 시간을 들여야 제대로 완성할 수 있는 빵은 그 과정 전체를 함께 해주는 친구 같은 것이다. 그늘진 곳 바로 옆은 여전히 밝고 따스하니 나는 아직 그곳에 머무르면 된다는 걸 곰살맞게 알려주는.


남은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쿠키


 베이킹 테라피는 쉽다. 밀가루와 물과 이스트가 있으면 된다. 간혹 버터와 설탕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빵을 굽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은 생각만큼 복잡하지 않고 그 방법 또한 어렵지 않다. 가장 중요한 건 서두르지 않는 마음, 기다릴 줄 아는 여유다. 하루를 한 장의 종이라고 한다면 빵을 굽는 날은 여백이 많은 일기를 쓰는 날. 시간이 지날수록 글자가 없는 부분이 사실은 그날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음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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