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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Dec 09. 2017

심플 라이프

  

  지지난 겨울에 주방을 고치게 되었다. 주방을 고친다는 건 며칠 동안 주방을 사용할 수 없다는 걸 의미했다. 식사 준비를 할 수 없으니 사나흘 동안 주방이 바뀌어 가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때가 되면 적당히 나가서 먹든가 먹을 걸 사 오면 되겠다 싶었다. 며칠 동안 식사 준비와 설거지에서 놓여날 수 있으니 은근히 즐거웠다고 고백해야 할 것 같다. 공사 전 현장 점검하러 오신 분들에게 주문한 건 냉장고를 계속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게 전부였다. 


기존의 주방

 
  공사 시작 이틀 전부터 주방의 수납장에서 그릇들을 꺼내 옮기기 시작했다. 기존 수납장이 모자라서 선반장을 하나 덧붙여 사용하고 있었기에 제법 쓸 만한 그릇이나 도구들이 있을 줄 알았지만 선반과 서랍이 하나씩 비워질 때마다 거실 한편에 쌓여가는 살림들은 정말 볼품이 없었다. 가지고 있는 줄도 몰랐던 찻잔과 상자 속에 든 찬합과 다기와 온갖 소재의 크고 작은 접시와 공기와 대접, 컵들이 있었다. 색이 검게 변해버린 티스푼과 일회용 젓가락과 숟가락, 종이컵, 알록달록한 냅킨들과 행주들, 이곳저곳 흩어져 있는 비닐백과 저장용기와 유리병들, 꽃병으로 써볼까 싶어서 모아 둔 음료수병들까지. 행여 누가 볼까 부끄러워 서재 구석에 몰아넣고 보자기로 덮어 씌웠다.


  필요 없는 것들은 너무 많았고 쓸 만한 것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3일로 잡았던 공사가 일주일로 연장되면서 일의 진행상황을 지켜보는 것도 점점 지루해지고 그렇다고 집을 비울 수도 없어서 꼼짝없이 거실의 난로 앞에 자리 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책을 읽거나 뜨개질을 하는 것도 슬슬 지쳐갈 무렵 시간을 보내기 위해 새로 찾아낸 방법 중 하나는 쓸모없는 물건들을 골라내는 것이었다. 찌그러진 대바구니와 아까워서 못 버린 일회용 도시락들을 난로 속에 슬금슬금 던져 넣었다. 금이 간 찻잔과 색이 변해버린 플라스틱 용기들, 너무 오래 사용해서 빛을 잃은 도기 그릇들은 한 곳에 모았다. 몇 년 동안 사용하지 않은 것들, 있는지조차 몰랐던 것들은 일단 모두 버리기로 했다. 사라져도 전혀 불편하지 않을 만큼 벌써부터 잊힌 물건들이었다. 대신에 언제가 될지 모르는 ‘좋은 날을 위해서 아껴 두었던 그릇들을 매일 사용하기로 했다. 그릇장에 넣어두는 것보다 제대로 쓰이는 게 그릇의 본분이고 또 그것들을 가지고 있는 이유이니까.


 공사 중에는 식탁을 거실로 옮겨 놓고 매일 사용하는 컵들과 접시 몇 개를 올려놓았다. 사용한 컵과 접시들은 마당의 수돗가나 욕실에서 닦았다. 컵이 몇 개 안되었으므로 사용하고 나서 바로 씻어 두어야 했다. 주방의 싱크대 앞이 아니라 쪼그리고 앉아야 하는 마당의 수돗가나 좁은 세면기에서 조심스레 하는 설거지는 소꿉놀이를 하듯 재미있었다. 닦아야 할 그릇의 양도 적고 그때그때 꼭 필요한 일이라 그만큼 집중해서 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뜻밖에도 심플하게 산다는 게 이런 것일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주방공사를 하는 김에 살림을 간소화하고 생활도 단순하게 정리하고 싶었다. 불편하고 눈에 거슬리던 가구들을 다시 배치했고 서재에 널려 있던 남편의 옷가지를 모두 추방했다. 나오지 않는 볼펜과 몽당연필들도 정리해서 버렸다. 지난 생활의 무질서를 바로잡을 수도 있을 것처럼 보였다. 시작은 수월했고 신이 났다. 간단하고 심플한 삶이 인생의 모범답안처럼 느껴졌지만 이 정도면 되었는지 중간 점검을 할수록 버리고 싶은 물건, 정리하고 싶은 공간들이 점점 더 눈에 들어왔다. 여백이 많은 집에서 정결하게 살고 싶다는 마음은 끝없는 정리의 압박감으로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이 모든 것들이 단지 정리를 위한 정리라는 걸 불현듯 깨달았다. 단순하고 소박한 삶이라는 표어에 얽매어 자연스러움을 잃어버리고 억지를 부리고 있는 꼴이었다.



  

  물건만 정리하면 내 삶도 시원스럽게 정리될 것 같다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정리’라는 명목으로 손에 잡히는 대로 치우고 버렸던 만큼이나 요즘은 복잡한 책상, 쌓인 설거지 감으로 가득한 싱크대에 대하여 관대해지려고 노력한다. 복잡하고 어수선한 집을 정리하려고 애쓰는 사이에 뒤틀린 인생은 눈에 보이지 않는 채 잊힌다. 물건을 정리하고 마음도 정리하고 그래야 맑고 투명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은 이제 좀 접어두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로 한다. 세상은 물론 나와 내가 사는 방식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를 연습한다. 기다리지 않아도 절로 오고 가는 계절처럼 우리들 인생도 이대로 괜찮다. 정리를 못한 건 내가 근성이 없거나 게을러서가 아니라 정도 많고 사랑도 많아서라고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아침이면 종이에 연필로 '오늘 할 일'을 적곤 한다. 여전히 목록에는 거의 매일  'ㅇㅇ 정리하기'가 있다. 책상 정리, 주방 서랍 정리, 안 입는 옷 정리, 마당 구석에 쌓인 빈 화분과 사용하지 않는 도구들의 정리, 사진과 메일함의 정리 등이다. 물론 메모에는 사야 할 물건들이나 그날의 메뉴, 납부해야 할 청구서들의 목록이 함께 들어있다. 밤에 다시 그 목록들을 들여다보면 구입해야 할 물건들이나 요리와 세탁 등과 관련된 항목은 쉽게 줄어드는데 비해 정리할 것들의 목록은 그대로이기 일쑤다. 그러나 다만 그뿐이다. 목록을 지워 버릴 수 없었을 뿐이며 했어야 할 일을 하지 못했다는 데서 오는 혼자만의 찜찜함이 남을 뿐 집안은 어제와 다르지 않다. 오늘은, 내일은 하고 마음을 먹지만 다른 일에 밀리거나 피곤하다는 핑계로 눈을 슬쩍 감아버려도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아 ‘정리’라는 단어 아래 모인 목록들은 오랫동안 살아남는다. 그래도 괜찮으니 이제 나는 자유다. 



  

  감당할 수 있는 것만 하기로 했다. 문제들을 끌어안고 끙끙거리면서 그게 열심히 사는 거라고 착각을 했던 어리석은 시절도 분명히 있었다. 물건이나 일 앞에서 복잡하고 피곤해질 때마다 지금 이것들이 내게 꼭 필요한가를 되뇐다. 정리하기도 예외가 아니다.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과 내 두 손으로 충분히 장악할 수 있는 공간으로 하루를 채울 수 있다면,  오늘이 저물면 내일이 오고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 내게는 그것이 바로 ‘심플 라이프’다. 


  새로 고친 부엌에서 엄마 집에 갔다가 들고 온 오래된 스테인리스 볼(중학교 시절, 얼음 얼릴 때 사용하던 것)에 콩나물을 무치고 샐러드를 버무린다. 물건의 용도와 쓰임을 장악할 수 있을 것, 볼 때마다 절로 웃음이 나니 이보다 더 좋은 살림이 있을까. 오래되고 찌그러졌다고 버리지 않기를 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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