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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Dec 02. 2017

여자의 집

  얼마 전 부산에 갔을 때 제일 먼저 들른 곳은 반디앤루니스였다. 해운대에 잡은 숙소의 체크인이 오후 3시인데 부산에 들어선 건 12시가 조금 지났을 때였다. 비가 간간이 내렸고 바람은 많이 불어서 해변에 있기도, 그렇다고 호텔 로비에서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서점에 가서 시간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한동안 서로 흩어져서 서가 사이를 돌아다니다 다시 만났을 때 나는 그림책과 여행기와 소설과 에세이가 섞인 책 한 짐을 들고 있었다. 바다에 면한 통유리창을 가진 직사각형의 방은 책 읽기에 나무랄 데가 없었다. 넓은 방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방해하지 않았다. 


  물론 집을 나설 때는 숙소에 도착해서 각자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낼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이가 어렸을 때 짧은 여행을 종종 다녀왔던 부산을 목적지로 정한 것은 비행기나 배를 타지 않고 집에서 가장 멀리 떠날 수 있는 곳이고 오랜만에 옛날 생각에 젖어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그리 낯설지 않은 곳이라 무엇을 하든 편안하고 자연스러울 것이라는 다소 안이한 판단의 결과였다. 


  아침 일찍 집을 떠나 긴 시간을 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한 후에 한다는 일이 고작 침대에 눕거나 소파에 파묻혀 책을 읽는 것이라는 사실이 나는 흥겨웠다. 집에서도 언제든 할 수 있는 보통의 일을 이렇게 특별한 시간에 집이 아닌 다른 공간에서 해 나갈 수도 있다는 게 신기했다. 식사시간과 산책시간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책만 읽었다. 종합 선물세트를 받아 든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과자를 마지막까지 남겨두는 것처럼 한 권의 책만 남기고 모두 읽었을 때 집으로 돌아왔다. 하루에 두어 권을 너끈히 읽을 수 있었던 부산에서와 달리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여러 날이 지나도록 남은 한 권의 책을 마무리짓기가 어려웠다.

 



  전업주부의 집은 그렇다. 무엇이든 가능하고 언제든지 가능해서 결국 그 무엇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한다. 다소 지친 식구들이 따뜻한 저녁식사와 달콤한 휴식을 꿈꾸며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부터 주부는 한층 강도 높은 집안일들에 치인다. 주부의 일은 대부분 끝이 없고 미리 해 둘 수도 없는 일이라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 깊은 물속에서 버둥거리는 것만 같다. 가라앉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발을 놀려야 하는 것이다. 언제쯤 닿을지 알 수 없는 해변을 향해 발과 다리를 버둥거리느라 몇 시간 내리 한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는다는 건 바랄 수도 없는 일이다.


  평온하고 정돈된 집은 사치스럽다. 보송하게 말려 반듯하게 접은 타월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젖은 채로 빨래 바구니에 담길 테고 말끔하게 정리한 책상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책과 전단지와 청구서와 영수증들로 뒤덮일 것이다. 만드는 데 두어 시간 걸렸던 음식들은 순식간에 사라지니 허무하기까지 하다. 이렇게나 소모적인 일상이 억울할 때도 많아서 언젠가는 부엌 바닥에 혼자 쪼그리고 앉아서 ‘집안일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이라는 어구를 넣어 짧은 문장들을 만들어보기도 했다. 



  집안일만 없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매일 반복되는 집안일의 부담에서 벗어난다면 공부도 할 수 있겠고 긴 여행도 모험도 글쓰기도 근사하게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하고자 마음먹었던 일, 도전하고 싶은 일들에 다가가기 전에는 뜸을 들이며 여전히 집안일에 머문다. '지금은 우선 청소를 좀 해야겠어'라거나, '밑반찬을 만들어두는 게 좋을 거야'란 말, '여태 미루던 일인데 부엌일 먼저 해놓고 나중에 하지 뭐'란 나태함이 전면에 나선다. '마음만 먹으면 나도 할 수 있다'란 생각, '별거 아닐 것'이란 호기, '하기만 한다면 누구보다 잘할 수 있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하다'는 핑계로 많은 것들을 우습게 여기고 미루기에 집만큼 안전한 피난처는 없다. 집에는 오랫동안 나의 불안과 불만과 초조함의 원인이자 핑곗거리가 되어줬던 집안일들이 언제나 구석구석 자리 잡고 있어서 내가 눈치채지 않게 발목을 잡는 것이다.



 식구들이 나간 아침, 부산함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집은 고요하다. 나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혼자서 열두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빨랫감을 모아서 세탁기에 넣고 흐트러진 주방을 치운다. 설거지해서 엎어 놓은 그릇의 뒷모습, 보리차를 끓여 담은 물병, 다듬어 물에 담가 놓은 채소와 과일 등에 마음을 뺏기기도 하지만 더러는 그 모든 것들을 못 본 척하고 책 한 권을 들고 침대로 다시 기어들어가거나 의자에 파묻히기도 한다. 


  접시와 컵들을 정리하거나 마른 옷가지들을 접고 어젯밤 읽다 만 책의 마지막 몇 페이지를 넘기면서 어쩌면 오늘은 뭔가 시작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오랫동안 품어온 생각들을 글로 옮기는 일이라든가 더 알고 싶은 것들에 관해 본격적인 공부를 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알아본다거나 볕이 좋으니 몸속에서 마음이란 걸 끄집어내서 잔디밭 위에 널어놓고 보송하게 말려 다시 몸속으로 집어넣는다든가 하는 일들 말이다. 낮에 혼자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은 이런 상상 속에서 웃고 있을 때다. 식구들과 함께 있을 때 내가 만약 남편과 아이, 혹은 양파나 호박도 아닌 다른 어느 곳을 바라본다면 얼마나 낯설고 궁금하고 불편할 것인가. 


  돌아보면 집안일만 소모적인 것은 아니다. 아침마다 새로 주어지는 하루를 마음껏 낭비하면서 살고 있다. 오늘 일이 안 풀려 실망스러웠더라도 내일이 다시 주어진다니 이렇게 인심 좋은 삶이 여기 아닌 어디에 또 있을까 싶은 거다. 어차피 인생 전체가 매일 먹는 밥처럼 되플이되는 것이라면 바로 그 지점에서 서럽고 억울하고 약 오르는 나를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매일 해야 하는 그 일들에 집중하고 마음을 담아보자는 생각은 바로 여기서 출발했다. 그 모든 일들을 품 안에 담고 있는 집으로 하여금 나를 닮게 하는 것, 나를 닮은 집을 만드는 것, 자신을 다듬어 나가듯이 집을 꾸미고 정리하고 다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툭하면 집안의 가구를 옮기던 시절이 있었다. 침대나 책상의 위치를 바꾸고 의자의 방향을 바꾸기도 했다. 침실에 있던 서랍장을 거실로 옮기기도 하고 책장들을 모았다가 흩뜨리기를 반복했다. 아예 이 방과 저 방을 맞바꾸는 일을 벌이기도 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책상 앞에 무심코 앉아있다가 갑자기 창문을 등지고 있는 책상의 방향을 바꾸면 책상 앞에 앉아서도 고개를 돌려 나무가 흔들리는 모습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거나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바로 옆에 창문이 있어서 가까운 숲에 내려앉는 분홍빛 아침햇살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 나도 어쩌지 못했을 뿐이다. 방을 바꾸고 가구를 옮기고 책장의 책들을 뒤집던 그 모든 일들이 어쩌면 나 자신을 바꾸려는 노력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걸 깨달은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자신을 다듬듯이 집을 정리하고 내가 되고 싶은 모습과 닮은 집을 만들려고 애를 쓰다 보니 결국은 나 자신을 가꾸듯이 끊임없이 집을 뒤집어가며 못살게 굴고 있었던 것이다. 집과 사람은 서로를 닮는다는 말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남편과 아이에게 집은 물건과 같다. 필요할 때마다 편리하게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크며 이용한 후에는 마음대로 나가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주부인 내게 집은 그런 게 아니다. 나는 때로 집이 힘들어하고 우울해한다는 걸 안다. 집은 끊임없이 호소하고 보채며 종종 토라지기도 한다. 나는 집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지만 며칠만 떠나 있어도 금방 집이 그리워진다. 언제까지나 집을 떠날 수없다는 사실마저도 이미 알고 있다. 우리 둘은 이미 떼려야 뗄 수가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집이 다정한 연인처럼 말을 걸어오는 시간은 오후다. 눈 앞에 미처 끝내지 못한 집안일들이 놓여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상념에 잠긴 날, 내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에 관하여 곰곰이 생각하는 나의 귓가에 식구들이 돌아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마른 세탁물들을 제 자리에 가져다 넣어두고 쌀을 미리 씻어 불려둬야 밥이 보드랍게 지어진다고 속삭인다. 지금은 다시 벗어나고 싶었던 집안일들을 향하여 전속력으로 달려가야 할 시간이다. 버리고 싶었던 집안일이 오늘도 나를 안전하게 감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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