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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Jan 06. 2018

자기만의 방

설날은 2월 중순이나 되어야 올 테지만 새해 아침은 떡국을 먹고 싶었다. 한 해의 마지막 날, 가지고 있는 냄비 중 제일 큰 것을 불 위에 올려 양파와 대파 서너 줄기, 양지머리를 넣고 떡국용 육수와 고명들을 만들었다. 빨랫감들을 세탁기에 넣어 돌리고 냉장고를 뒤져 내용물이 거의 남지 않은 소스병이나 유통기한이 지난 식재료들을 찾아내서 버렸다. 모서리가 깨진 숟가락 받침, 충분히 오랫동안 사용해서 버려도 아깝지 않은 플라스틱 수지 머그 같은 것들을 골라내 분리수거통에 넣었다. 매일 하는 일인데도 하룻밤 지나고 나면 해가 바뀐다 하니 버릴 것을  고르고 음식을 만드는 일에 평소보다 집중했다. 한 해의 마지막 날도 일이 조금 더 많았다는 것 말고는 다른 날과 별 다를 게 없었다. 중간중간 내 방으로 숨어들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생겼다.



내 방은 명목상 서재다. 주방 바로 옆에 붙어있는 방이라 하루에도 수십 번, 문이 열려 있는 방안을 들여다볼 수 있지만 낮에는 좀처럼 들어갈 짬이 없다. 세탁실과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둔 게 전부라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 때도 있다. 세탁이 끝났음을 알려주는 알람 소리를 절대 놓칠 수 없을 만큼 가깝다. 냉장고에 붙여 둔 알람이 울리면 몇 걸음 만에 버튼을 누를 수 있는 방,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다가 요리책이 필요할 때 가장 빨리 찾아낼 수 있도록 문 바로 옆에 있는 책장에서도 내 눈과 비슷한 위치의 선반에 자주 보는 요리책들을 세워 둔 방이다. 정리하기 전의 택배 상자와 온갖 우편물들이 모이는 방이고 외출했다 돌아와 미처 옷걸이에 걸지 못한 겉옷들이 의자 위에 대충 올려진 방이다. 이사 와서 처음 시어머니께서 오셨을 때 이 방을 일컬어 일하는 아줌마의 방이라 했었다. 



낮 동안 어둑하고 조용한 채 침묵으로 기다리던 방은 밤이 되어서야 온전한 나의 방으로 깨어난다. 초를 하나 켜고 흐트러진 물건들을 제 자리로 돌려보내고 의자에 앉으면 절로 한숨이 난다. 하루치의 긴장을 풀어도 좋다는 데서 오는 안도의 한숨이다. 창을 열면 바로 작은 숲이 보이고 화력 좋은 벽난로도 있다. 얼마 전에 이층에 있던 커다란 책상을 끌고 내려오면서 잘 벼린 칼로 무 한 토막을 싹둑 잘라내듯이 하루의  몇 시간을 잘라 내기로 했다. 읽고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이 방에서 내가 제일 많이 하는 일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안 하기’다. 밤과 방이 하루 동안 수고한 내게 주는 선물 같은 시간이 여기에 있다. 



하루를 끝낼 즈음에는 절실하게 고요가 그립다. 종일 외부로 향했던 촉수를 거두어들여 쉬게 해줄 수 있는 시간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세상은 종종 내게 무관심해서 나는 소외되고 오해받기 일쑤다. 저녁에  방은 종일토록 이해받지 못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굳어진 마음과 외로운 어깨를 풀어주고 감싸 안는다. 명절이나 제사처럼 일이 많은 날이나 이런저런 일들로 몸도 마음도 치인 날에는 일을 하다가도 방으로 들어와서 손에 닿는 아무 책이나 꺼내 들고 바닥에 주저앉아 책을 읽었다. 장바구니 속의 냉동식품이 녹을지도 모르고 접다 만 타월 무더기가 열어놓은 방문 밖으로 흘낏 보여도 모르는 척했다. 냉동식품이나 타월보다내 마음이 소중하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견딜 수 없었을 뿐이다.




물론 처음 이 방에 책장과 책상을 들일 때는 근사한 서재를  꿈꿨다. 내리 몇 시간을 앉아서 읽고 또 읽는 것, 읽기가 이끌어준다면 쓰기도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창을 열고 앉아있거나 고개를 떨구고 졸아도 괜찮았다. 실제로도 멍하니 앉아서 미세하게 흔들리는 촛불이 주위의 어둠을 한층 두텁게 만드는 걸 바라보거나 무엇이 될지 모르는 뜨개질감을 다시 잡는 것이 전부인데도  마음이 가라앉는 걸 느낀다. 휴식이란 단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이 방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가능하면 많이 읽고 싶다. 매일 일기를 쓰려고 노력한다. 며칠에 한 번은 가계부 정리도  한다. 흐트러진 책들을 반듯하게 쌓거나 책장에 꽂는다. 핸드폰의  메모를 열어서 낮에 입력해 둔 단어나 문장들을 읽어보기도 한다. 단어들이 마치 콩나물이나 시금치라도 되는 냥 재료로 삼아 짧은 글을 쓰기도 한다. 그리하여 다음 날 아침 어제보다 더 단단해진 마음, 더 맑은 눈, 언제든지 감동받을 순수하고 청정한 나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한다. 무엇보다도 방해받지 않고 온전히 나 자신으로 있고자 한다. 오늘도 여기 앉아 있다. 혼자 있지만 쓸쓸하지 않게.



아직도 내 서재에서는 사유와 고뇌의 냄새가 나는 대신 뜨개  바구니에서 생겨나는 먼지와 귤껍질, 빈 찻잔이 쌓일 뿐이지만 언젠가 내게 무엇인가 가능해진다면 그건  바로 나의 방 덕분일지도 모른다. 이 방에서 보내는 조각난 시간들은 버지니아 울프의 말처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 화를 내지 않기 위해서, 두려움과  쓰라림을 연민과 관용으로 바꾸고 사물을 그 자체로 생각하는 자유'를 얻기 위한 밑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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