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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Jan 13. 2018

소란한 보통날 - 전업주부의 하루


꽈리고추가 한 바구니나 있었다. 콩자반과 장조림을 만들기로 한 날이기도 했다. 한 달에 두어 번 어머니에게 가는 남편이 내게 부탁한 밑반찬들이었다. 꽈리고추 절반은 밀가루를 무쳐 살짝 쪄낸 후에 갖은양념으로 무치고, 나머지 절반은 손질한 멸치와 함께 볶을 예정이었다. 콩자반과 장조림은 시간과 양념의 비율만 맞추면 되니 복잡하거나 어려울 게 없었다. 아침부터 내리는 비에 젖어 점점 색이 짙어지는 마당을 내다보면서 하루를 보내기에 딱 알맞은 일거리였다. 서리태를 씻어 불리고 고추와 멸치를 손질했다. 장조림을 만들 때 함께 넣을 계란을 삶고 통마늘 껍질을 벗겼다. 밑준비가 거의 끝나고 냄비를 올려 물을 끓이면서 양념들을 꺼내다가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앗, 간장이 없다!”


간장병이 거의 비어 있었다. 여분의 간장이 있을까 해서 식재료들을 넣어두는 선반들을 온통 뒤졌지만 헛수고였다. 그날 꼭 만들어야 할 음식들이고 그 음식들은 간장이 없으면 만들 수 없었다. 간장을 사러 나가야 했다. 손질해 둔 재료들을 냉장고에 다시 넣고 레인지의 불을 껐다. 옷을 갈아입고 장바구니와 우산을 챙기면서 ‘영화를 한 편 볼 거야’라고 중얼거렸다. 비에 젖어 미끄러운 언덕길을 엉거주춤 걸어내려 갔다. 동네에 작은 슈퍼도 없어서 간장 한 병을 사려해도 차를 타고 분당까지 가야 하는 시절이었다. 서현역에 영화관이 있었다. 아직 오전이니 시간은 충분했다. 버스를 탔다.



우디 앨런의 영화였다. 간장과 양상추, 계란이 든 장바구니를 발치에 놓고 앉아서 ‘미드나잇인 파리’를 봤다. 우디 엘런은 친절하게도 시험 보기 전에 교과서에서 예상문제를 짚어주는 선생님처럼  밑줄을 그어준다. 약혼녀와 함께 파리 여행 중인 할리우드의 시나리오 작가인 ‘길’은 1920년대의 파리를 동경하는데 어느 날 밤거리를 배회하다가 과거로 가는 자동차를 얻어 타게 되고 그곳에서 스콧 피츠제럴드, 피카소, 헤밍웨이, 달리, 거투르드 스타인 등을 만나 그동안 자신이 황금시대라고 여겼던 1920년대의 파리를 겪는다. 영화는 황금시대를 이야기하고 화면은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하는 내내 아름답고, 음악은 슬프게도 감미롭다. 내 황금시대는 언제인지 생각하다가 ‘위대한 개츠비’와 헤밍웨이의 ‘파리는 날마다 축제’를 다시 읽고 싶다는 충동으로 가득 차서 영화관을 나섰는데 비는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그칠 줄 몰랐다.





돌아와 장조림 냄비를 다시 올리고 고추를 볶았다. 간장을 부어 끓이고 무치고 볶는 틈틈이 창 밖을 내다본다. 시선을 고정할 나무들이 없었으면 흔들리고 허둥댔을 것이다. 영화 속 화려한 색채와 현란한 수사는 금세 내 부엌과 인식과 언어의 빈약함과 비좁음으로 가려진 듯했지만 완성한 반찬들을 밀폐용기에 옮겨 담고 냄비들을 닦는 사이사이 시선을 돌릴 때마다 집요하게 다시 나타났다. 주인공이 1920년대의 파리를 다녀온 것처럼 나도 다른 세계를 다녀온 기분이었다. 비에 젖은 파리와 간장 냄새가 가득한 주방을 오가면서 평소보다 공들여 뒷정리를 마친 부엌이 낭비가 없는 풍경을 만들었다. 창밖은 온통 비에 젖어 번들거렸지만 집안은 따스하고 편안한 불빛 아래 쉬는 것처럼 보였다.





하루를 잘게 쪼개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되새기고 음미하는 버릇이 생겼다. 맨숭맨숭하고 밋밋한 담벼락에서 하나씩 들어낸 벽돌 같은 시간들을 천천히 오래 바라본다. 미처 알아채지 못한 감정들을 앞으로 내세우고 살핀다. 기특하고 갸륵한 것, 수줍게 반짝이는 것, 어둡고 축축한 것, 실패로 절망스러운 것들이 섞여 있다. 뭘 어쩌자는 것은 아니다. 그저 알아채고 기억한다. 다만 실패와 절망이 어느 지점에서 일어났는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므로 그렇다. 긴 손가락으로 나른하게 삶을 어루만지며 떠나보낼 것들을 고르는 시간이다. 세월이 흐르면 아마도 비숫한 색과 질감의 블록들로 만든 울타리를 갖게 될 것이다. 영화를 볼 거라고 중얼거리면서 간장을 사러 나가기 이전의 나로 결코 돌아갈 수 없다는 걸 그때 알았다.




스콧 피츠제럴드와 헤밍웨이를 읽었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으면서 압도당하고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으며 낄낄거리다가 버지니아 울프와 제인 오스틴을 읽을 때는 연극배우 같은 표정을 짓기도 했을 것이다. 가스레인지 위에 올린 물주전자를 깜박 잊어 물이 반 넘어 졸아들었으며 김치를 볶는 냄비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태우기도 했다. 꼭 책을 읽느라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마당 귀퉁이에서 잡풀을 뽑거나 노트북 모니터의 반짝이는 커서를 쫒았다니는 동안 그런 일들이 벌어졌다. 고개를 들어 새들을 보았다. 숲 저편에서 날아오르는 새들은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제임스 설터나 앨리스 먼로가 했던 말들을 나는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떤 일을 잘할 수 있지만 그게 원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은 슬프다. 원하는 일을 모두 할 수 있는 게 아닌 다음에야.





‘간장과 영화의 날’ 이후로 5년이 지났다. 본가에 가는 남편의 짐 속에 고추 조림과 장조림, 콩자반을 끼워 넣은 것은 바로 며칠 전의 일이다. 욕조 가득 물을 받고 향기 짙은 오일을 떨어트렸다. 그렇게 하면 목욕이 끝난 후에 욕실 정리하는 시간이 두배로 늘어난다는 것도, 남편이 돌아오기 전에 점심준비를 할 시간이 모자라게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서두르느라 허둥대는 걸 무엇보다 싫어하지만 뻔히 내다보이는 것도 모른 척하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욕실은 뜨거운 김과 향기로 가득하고 나는 책장에서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을 뽑아 들고 물속으로 숨었다.


남편이 돌아온 건 머리도 채 말리지 못했을 때였다. 찬밥을 일인용 냄비에 담고 전날 먹다 남은 김치 콩나물 국을 부었다. 국이 끓어오르면 적당히 밥알이 풀어질 것이다. 대파를 좀 많다 싶을 정도로 썰어서 얹고 계란 하나를 풀었다. 냄비 하나를 더 올렸다. 물을 끓이고 김치 양념이 둥둥 떠있는 김칫국물을 한 국자 부었다. 안성탕면의 봉지를 뜯었다. 대파의 파란 부분을 넉넉하게 썰어 넣었다. 냄비 두 개를 식탁에 올렸다. 샤넬의 연초록색 바디크림 냄새를 폴폴 풍기면서 뜨거운 라면 가닥을 후루룩 삼켰다. 내 몫의 사치다.


집안일이 줄어들거나 바뀐 것은 아니다. 다만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한다면 언제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를 정할 때 나를 중심에 둔다.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도 애를 쓴다. 세상은 내가 설거지를 하루에 몇 번 하는지 관심이 없다. 냉장고의 물병이 비어 있어도 시간이 멈추지 않는다. 전업주부의 하루는 그저 보통의 날이고 보통의 날들에 부엌에서는 종종 간장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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