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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Jan 20. 2018

휴가 다녀오겠습니다

돌아오기 위해 떠나요

눈을 감고 하나 둘, 숫자를 센다. 생각을 모으기 위해서다. 나는 몹시 피곤하고 지쳐있다. 하나, 둘, 셋, 숫자를 세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몸은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게 굳어서 숲길 어딘가에 방치된 통나무 둥치처럼 버려진 느낌인 데다가, 좀 움직여보려 하면 젖은 솜이불처럼 무겁고 늘어져서 걷기는커녕 일어나 앉을 수도 없으며 머릿속은 털실뭉치처럼 헝클어져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눈을 감는다. 아, 조금만 쉬었으면,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었으면, 이 지루하고 고단한 일상에서 좀 멀어졌으면.




더운 날이었다. 샐러드드레싱과 바질 페스토, 파스타 한 묶음, 딸기술 한 병을 담은 가방은 무거웠다. 땀을 흘리며 계동 길을 걸어 올라가는 중이었는데 전화기의 진동이 느껴졌다. 분명 약속시간은 아직 한참이나 남아있었다. 아무래도 자기가 흥분한 나머지 너무 일찍 도착해버린 것 같다는 친구의 목소리가 웃음소리와 버무려졌다. 배낭을 멘 친구를 만났다. 한옥의 육중한 문을 열고 툇마루에 짐을 내려놓았다.



친구와 내가 북촌의 한 한옥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한 날이었다.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면서 중간중간 시계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는 날, 어두워져도 집에 갈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날이었다. 근처에 둘러볼 곳도 먹을 곳도 많을 테니 하룻밤이 짧을 거라고들 했지만 우리에게 그 시간이 짧게 느껴진 것은 돌아볼 곳에 비해 주어진 시간이 적어서가 아니라 묻어둔 마음을 풀어낼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우린 집 안에 머물기로 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대에 해야 하는 비숫비슷한 일들에서 벗어나기, 그거면 충분했다.



한옥 한 채를 온전히 차지할 수 있어서 파스타를 삶고 밥을 짓는 일이 가능했다. 창호지를 바른 문을 활짝 열어놓고 마당을 내다보며 벽에 등을 기대고 앉거나 서늘한 방바닥에 누워서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하늘과 나무를 바라보았다. 상추를 씻고 설거지를 하면서 두런두런 나눈 이야기들은 예전의 만남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지만 시간을 체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집에 돌아가려고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날 저녁과 다음날 아침, 주방의 분주함에서 놓여났다는 사실에 마치 날개라도 단 듯 가벼워져서 목소리마저 통통 튀고 있었다. 결혼 25년 만에 처음 해보는 친구와의 외박이었다.



마당으로 난 문을 열고 빗소리를 들었던 밤, 목이 쉬도록 말을 했다. 지나간 시절, 빛이 바랜 욕심, 두고 온 집과 가족들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짧은 침묵이 중간중간에 끼어들 때면 떠나온 내 자리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였다. 웃음소리가 대문 밖에까지 흘러 나가 빗소리와 섞이니 밤이 깊었다. 고등학교 입학식 날에 나란히 앉았던 우리가 지금도 나란히 앉아서 툇마루 너머 비 내리는 안마당을 함께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신기하고 다행스럽고 감사했다. 그날 밤 잠에는 꿈도 없었다.


다음날, 친구는 내게 매일 자외선 차단제를 바를 것, 단백질을 먹어서 살이 찔 것을 주문하고  바스러질 것 같은 머리카락에 좋다는 샴푸를 알려 준 후에 남편과 두 딸, 강아지가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이왕 나왔으니 집에는 저녁 시간을 훌쩍 넘겨 들어가겠다는 게 나의 애초 계획이었다. 여름 오후의 뙤약볕이 화살같이 내리 꽂히던 인사동 길을 가로질러 종로통으로 나왔다. 서점에 들러 시간을 보내고 백화점에도 갈 생각이었다. 두 손으로 들 수 있을 만큼 책을 사고, 백화점 지하 슈퍼에서 군것질거리도 양껏 살 예정이었으나 마침 바로 앞에서 1150번 버스가 서는 것을 보자 그만 자동인형처럼 올라타고 말았다.



사소하지만 동시에 집요한 일상에서 빠져나와 보낸 하룻밤은 비현실적이었다. 거기서 제일 잘 보인 건 집에서의 내 자리였다. 예정보다 일찍 집에 가봐야겠다는 친구의 마음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한옥이건, 지하철 입구 작은 찻집이건, 버스가 지나는 소란한 도로변이건 온전히 우리 자신에게 집중했지만 그 시간의 뿌리는 우리가 문을 닫고 떠나온 각자의 집에 남아 있었던 걸 그제야 알았다. 벗어날 수 없었던 게 아니라 돌아가고 싶었던 거였다. 어이없기도,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웃음이 났다.


그렇게 벗어나고 싶어 하더니 고작 이거였어?



버스에서 내려 키 작은 옥수수가 나란히 서있는 저문 오후의 언덕길을 올라 집에 돌아왔다. 비를 머금은 듯한 구름이 언뜻 보였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마당에 나가서 풀을 뽑고 시든 장미를 잘랐다. 돌아와서 참 좋았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일상에 지쳐갈 때마다 나는 두어 해 전의 나들이를 떠올린다. 기억이 가진 힘은 여전히 세고, 나는 아직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떠난다면 그건 여기 아닌 다른 곳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돌아오기 위함이다. 다른 곳의 찻집에서 마시는 차 한 잔, 얼음 띄운 커피 한 모금에 놀라는 것은 그 맛이 집에서의 그것과 닮았을 뿐 아니라, 만드는 방식 또한 나의 그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갑자기 집이 그립다. 훌훌 털고 떠난 걸 칭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때, 내가 만든 질서로 이루어진 일상이 다시 그리워질 때다. 그리운 것은 쉽게 버릴 수 없으니 돌아가야 한다. 언제나처럼. 꿈에서 깬 아이처럼.



그러나 항상 여행의 힘은 돌아온 후에 더 빛난다. 밀린 세탁물, 비어 있는 냉장고, 흐트러진 서랍들 속의 일상에 그리운 것들이 숨어있다. 그런 일상을 깨트리는 것도, 뭔가를 더해 나만의 새로운 풍경을 만드는 것도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이 말이 하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러니까 말인데요.

저 있잖아요.

나무토막이고 젖은 솜이불이자 헝클어진 털실뭉치인

저 말이에요.

휴가 다녀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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