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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Jan 27. 2018

작가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출간 소식을 알립니다.


브런치에 위클리 매거진 ‘전업주부입니다만’을 연재한 지 15주째다. 주부가 쓰는 주부 이야기다. 전업주부로 산 지 30여 년이 다 되어가니 할 말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다. ‘주부’라는 단어는 세상의 다른 어떤 단어보다도 익숙하고 편안한 동시에 시큼하고 따뜻하며 날카롭다.  간장 냄새, 마늘 냄새, 세탁을 마친 젖은 옷들에서 풍기는 섬유 유연제의 냄새, 먼지 냄새, 온갖 열기와 단내, 축축하고 딱딱하고 물컹거리는 질감, 뜨겁고 차가움. 단어 하나가 이토록 가지각색인 일상의 감각을 지녔으니 그 주부가 만드는 세계는 미처 받아 적을 수도 없을 만큼의 단어와 문장들이 쏟아질 거라고, 그 문장들이 만드는 이야기가 넘실거려 그저 받아 적기만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2018년 1월, 눈


상상 속에서 나는 감 떨어지길 기다리는 감나무 아래의 아이처럼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날카로운 펜과 예리하게 벼린 칼을 들고 별처럼 쏟아져 내리는 문장들을 받아 적을 것이며  곁가지를 쳐내듯 필요 없는 수사와 겉도는 문장을 미련 없이 잘라 버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매일 새롭게 시작하는 아침부터 식사를 준비하고 장을 보는 천 번도 더 되풀이한 이야기가 있고, 혼자 있는 낮에 벌이는 고독한 소동과 대답 없는 외침을 털어놓을 것이며, 온갖 대소사를 앞두고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과 외로움을 고백할 것이었다. 가끔은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하소연도 들어갈 테니 18회로 예정한 목차 구성이 길게 느껴지지 않았고 무엇을 어떻게 쓸지 겁도 나지 않았다.



브런치 연재를 하면서 읽었거나 읽고 있는 책들로 쌓은 탑


일주일에 한 꼭지를 써서 올리는 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준비기간이 지나고 첫 번째 글을 올리고 나자 바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순식간에 사라진 자신감 뒤로 어떻게든 되겠지 했던 낙관은 무모함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알았다. 그렇게 할 말이 많았던 당당한 주부 대신 이 말을 해도 될까 소심하고 겁 많고 따지고 재고 눈치 보느라 가슴이 답답해지는 주부가 있었다.


내 안에는 내가 둘이었다. ‘주부이고 아내이고 엄마인 나’와 그냥 ‘나’다. 둘은 적당히 나설 때를 알아서 그런대로 사이좋게 지내는 편이지만 종종 서로를 주장하며 티격태격 싸우기도 했다. 내가 만든 질서로 이룬 평화를 지키고자 하는 나와 그런 자신을 답답하게 여기는 내가 싸웠다. 그 둘을 어르고 달래며 막막함과 절박함으로 구멍이 숭숭 난 외투를 몸에 말고 낯선 거리에 서 있는 기분으로 글을 썼다. 금요일 아침이면 글을 예약하라는 알림이 왔다. 토요일을 한두 시간 남겨두고 글을 올리고 나면 머리카락까지 젖어 있었는데 바로 앞에 다시 시작하는 한 주가 있었다. 어쩌자고 열여덟 개나 되는 목차를 구성했을까, 아니 애초에 연재를 하겠다고 뛰어들었을까. 혹시 미쳤던 건 아니었을까 별별 생각을 다 했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 며칠 전 내린 눈이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버린 풍경


당연히 이 글들은 머리로 쓴 글이 아니다. 위클리 매거진 '전업주부입니다만'은 나의 손과 발과 몸이 쓴 글들로 이루어졌다. 감자 껍질을 벗기다가 잘린 손톱과 고춧가루 물이 든 앞치마를 비벼 빠느라 시렸던 손목이 풀어놓은 기록이다. 딴생각하다가 태워먹은 조림 냄비를 문질러 닦는 동안에, 집안에 혹시 탄내가 남았을지 몰라 추운 날 문을 다 열어놓고 바람을 들이던 때, 냄새를 없애기 위해 켜둔 촛불을 바라보던 시간에 짧게 스쳐간 생각들을 식구들이 잠든 고요한 밤에 다시 불러와 하나씩 늘어놓은 기록이다.



눈 내리는 저녁과 밤, 창 안에서 본 바깥 풍경


물론 대부분의 날에 나는 제대로 쓸 수 없었다. 보통은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나서야 책상에 앉을 수 있었다. 주부의 세계에서 글 쓰는 사람의 세계로 가는 길은 너무 멀어서 가다가 지치기 일쑤였지만 써야 했으므로 하루에도 몇 번씩 그 길을 전속력으로 달리며 오갔다. 새벽 세 시까지 쓴 글을 한 번에 날리고 그대로 방바닥에 누워버린 날도 있었다. 최근 몸살을 앓았다. 잠에 취해있다가 잠시 눈을 뜨니 하얀 천장과 꽃무늬 벽지를 바른 벽 사이를 가로지른 장식 몰딩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몰딩의 아름다움에 대해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밖에는 눈이 내렸고 나는 장작이 활활 타고 있는 난로 곁에 담요를 덮고 누워있었는데 난로의 열기 때문인지 내 몸에서 나는 열 때문인지 멀미가 났다. 오래전 연탄가스를 맡고 멀미를 했을 때 엄마가 마시게 했던 동치미가 생각났다. 얼음이 갈라지는 것처럼 쨍하고 차가웠던 동치미 한 모금이면 벌떡 일어날 수 있겠다고, 그러면 나는 기억 속의 동치미와 방금 내가 마신 동치미에 대해서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또 한 번 내가 미쳤구나 생각했던 날이었다.



겨울 속의 봄, 2018년 1월

       

연재를 시작하면서 출간 계약을 했다. 위클리 매거진에 글을 올리면서 동시에 퇴고를 진행해야 했다. 주부로 사는 동안 이렇게 주방과 세탁기와 청소기에서 멀어진 적이 없었다. 학교 다닐 때 공부하면서도 하지 않던 밤샘도 해봤다. 우울하고 힘들었던 밤, 반짝이는 살림에 즐거웠던 날에 끄적였던 옛 일기들을 다시 보면서 부끄럽고 대견하고 슬펐다. 주부라서 주부 이야기밖에 쓸 수 없었음이 부끄러운 건 아니다. 무엇을 하면서 그 끝에 다가가고자 몸을 던져본 적이 없음을 글을 쓰면서 알았고 바로 그게 부끄럽다. 퇴고는 이번 주말에 끝낼 예정이고 연재 또한 한 달이면 끝난다. 다시 돌아갈 일상은 예전과 같을 것이지만 나는 이제 자신이 작가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는 주부가 될 것이다. 아마 조금은 겸손해질 것도 같다.




저의 첫 번째 책을 기억하는 분들이 가끔 새 책에 대해 물으셨어요. 민약 두 번째 책이 나온다면 첫 책 보다 더 잘 만들겠다는 대답을 하곤 했습니다. 이제 그 언젠가는 곧 다가올 봄이 되었어요. 더 잘 만들겠다는 말은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로 바꿉니다. 봄이면 새 옷을 입은 책이 나올 거예요. 글을 쓴 저보다 더 섬세하고 따뜻하게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위클리 매거진은 아직 3회가 남았습니다. 끝까지 마음을 담아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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