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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Dec 30. 2020

너는 누구야?

빨간머리 앤과 자기만의 방

  학교가 불타버렸다. 나무로 지은 건물이라 골조도 남아있지 않았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잔해 앞에서 앤과 선생님은 망연자실하다. 무쇠로 만든 종과 난로는 남았을 뿐 모든 것이 사라졌다. 인쇄기도 사라졌다. 아이들이 하나 둘 도착한다.


“누가 그랬을까?”

“우리의 반항이 거슬렸던 사람들.”


  전날 마을회관에서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며 당당했던 앤과 아이들은 무너져 내린 학교의 잔해 앞에서 어쩔 줄을 모른다. 충격으로 말문이 막혔던 아이들의 입에서 한숨이 나오고 비난과 자책이 이어지려는 순간 스테이시 선생님이 나선다.  


“앤 탓이 아니다. 너희는 아무 잘못이 없어. 편협한 마음이 문제지. 사건의 진상은 모르고 알 방법도 없겠지만 이런다고 물러나거나 침묵하면 안 돼. 이건 비열하고 비겁한 짓이야. 하지만 우리가 영향을 줬다는 증거지.”



  

  넷플릭스에 드라마 [빨간 머리 앤]이 올라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지금까지 책과 영화, 드라마, 만화 등에서 만났던 앤들이 떠올랐다. 새로운 앤은 어떤 모습일까 살짝 궁금하기도 했다. 하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앤은 항상 앤이었다. 앤을 앤이게 하는 건 외모가 아니라 결코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상상력이었으니까. 다시 만난 앤은 방금 책에서 튀어나온 아이처럼 보였다. 작고 마르고 말 많은 아이, 제대로 오므려 들지 않으면 금방 열려버리고 마는 낡은 가방을 들고 당황한 매슈 앞에 선 말라깽이 여자아이는 그동안 봐왔던 앤들의 정수를 모은 모습이라 나는 흥분하고 말았다. 앤과 함께 프린스 에드워드 섬의 풍광을 배경으로 ‘반짝이는 호수’와 ‘환희의 하얀 길’을 지나 ‘초록지붕 집’에 도착하는 건 이미 잘 알고 있는 길을 가는 것처럼 편안한 여정이었다. 상상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는 건 즐겁다. 내가 드라마 [빨간 머리 앤]에게 기대한 건 바로 그것이었다. 익숙해서 느긋해진 시선으로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는 일, 이어질 다음 장면을 상상하고 다음 대사를 확인하고 곧 벌어질 사건을 기다리며 마음을 졸이는 것, 내가 바란 건 바로 그거였다.


  앤을 처음 만난 건 수십 년 전이다. 앤과 친구처럼 만났던 나는 이제 마릴라와 더 가까운 나이가 되었다. 책 속의 세계는 여전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너무 혼란스러워 며칠 후의 앞날도 점칠 수 없을 만큼 어지럽게 변해버렸다. 몽고메리가 창조했던 앤과 애번리 마을을 화면에 옮겨 놓는 것으로 그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갔을까? 나는 생경한 인물들과 낯선 이야기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드라마는 산딸기 주스와 길버트의 머리에 부딪혀서 깨진 석판, 초록색으로 물든 앤의 머리카락, 향료 대신 도포제를 넣은 케이크 등 원작 속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에 동성애, 인종차별, 페미니즘, 편견, 범죄, 원주민과의 갈등 등이 얽혀 들어간 다층적 구조다. 초록지붕 집에 숨어든 사기꾼들, 매슈의 첫사랑, 자신의 뿌리를 찾고 싶어 하는 앤 등 원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에피소드들이 앤의 세계를 넓힌다. 이 모든 것들을 끌고 가는 건 이름 끝에 e가 붙은 앤, 보다 정확하게는 앤의 말과 글이다. 그렇다면 내가 보고 있는 드라마는 [빨간 머리 앤]이 맞았다.


  앤과 길버트가 처음 만나던 날, 길버트는 앤에게 넌 누구냐고 묻는다. 이 질문은 곧 [빨간 머리 앤]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이 된다. 드라마가 진행되는 내내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대답하지만 우리의 관심은 앤에게 있다. 앤은 말이 많다. 궁금하고 놀라고 화가 날 때마다 마음에 담아두는 대신 소리내어 말한다.  떠오른 순간 말하고, 말하면서 정리하고, 결론을 낸다. 끊임없이 물어보고 감탄하며 반박한다. 처음이라 어색하고, 오해로 외면당하고, 편견과 선입견에 저항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장하느라 말은 점점 더 많아진다. 자기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지를 끊임없이 설명하느라 때로는 지쳐서 울다가 잠이 든다. 시즌 3에서 앤은 열여섯 살이 되었고 학보사에서 글을 쓴다.


  앤은 학교에서 발행하지만 애번리 사람들도 읽는 신문에 <공평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다. 여성은 남성과의 관계를 떠나 스스로 중요한 존재이며, 여성의 신체적 자율권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강요와 조롱 대신 거절이 받아들여져야 하며 여성의 기본권과 욕망을 남성들이 더 잘 안다는 말을 거부한다는 앤의 글은 학교 이사회 임원들의 심기를 거슬렸다. 학교 신문에 어떤 기사를 쓸 수 있는지를 이사회가 결정할 뿐만 아니라 앤 역시 더 이상 기사를 쓸 수 없다는 통보를 받고 아이들은 반발했다. 결국 인쇄기를 빼앗기고 학교마저 불타버렸으나 앤과 아이들은 그들이 저항함으로써 무언가를 쟁취했다는 걸, 어쩌면 세상이 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침묵은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순간 더 강력한 힘을 가진다. 침묵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건 진실이 언제나 말해져야 하고 쓰여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앤은 다짐한다.  


“어떤 미래가 기다리든 난 현재 상황의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계속 도발할 거라고!”


  앤의 필화 에피소드는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거론했던 셰익스피어의 누이, 주디스로 시작되는 일련의 논의를 연상시킨다. 셰익스피어가 활동했던 16세기에 재능을 가진 여자가 있었다면 그 재능이 글로 옮겨지는 대신 오히려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그녀들의 재능은 계속 방해받고 저지당했을 것이고, 내면에서는 기대되는 역할과의 충돌로 고통받고 찢겨서 건강과 온전한 정신을 잃고 말았을 것이며, 만약 글을 썼다면 익명으로 출간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우울한 이야기를 울프가 꺼낸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남자인 셰익스피어에게도 무수한 장애물들이 있었다. 그 역시 글을 쓰는데 방해가 되는 일들이 끊이지 않았고 돈도 벌어야 하며 건강은 악화되는 데다가 그가 글을 쓰든 말든 세상은 무관심했다. 그렇다면 여자들은 어땠을까? 글을 쓸 방도 없고, 돈도 없으며 글 쓰는 남자들을 향했던 무관심이 여자들을 향하면 금세 적대감으로 변해버리던 시절에 글을 쓰던 여자들은? 울프는 주장한다. 셰익스피어의 누이는 젊어서 죽었고 글 한 줄 쓰지도 못했지만 교차로에 묻힌 이 시인은 아직 살아있다고 말이다.


  그녀는 여러분 속에, 그리고 내 속에, 또 오늘 밤 설거지하고 아이들을 재우느라 이곳에 오지 못한 많은 여성들 속에 살아 있습니다. 그녀는 살아 있지요. 위대한 시인은 죽지 않으니까요. 그들은 우리 속으로 걸어 들어와 육체를 갖게 될 기회를 필요로 할 뿐입니다.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울프의 호소는 강연장에 앉아있는 젊은 여성들로 하여금 글을 쓰겠다는 의지를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비록 무명이지만 자신들의 힘으로 언젠가 살아날 그녀에게 기회를 줄 수도 있음을 확신했을 것이다. 만약 시간이 가진 힘이 있다면 그건 기억에서 온다. 차곡차곡 쌓인 기억으로 나의 현재는 두꺼워지고 깊어진다. 개인의 기억은 드러남으로써 모두의 기억이 되고 우리의 현재도 그만큼 넓어질 것이다. 앤의 수다가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다. 여자가 글을 쓴다는 건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16세기뿐만 아니라 19세기에도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고 앤도 예외가 아니었다. 21세기의 우리는 어떤가?

  

  드라마는 말의 성찬이다. 다르다는 건 나쁜 게 아니라 같지 않을 뿐이라고, 닮은 점이 많은 데도 사람들은 이상하게 바로 차이점부터 지적한다고, 기대할 것이 있으면 지금의 절망을 이겨낼 수 있다고, 그리하여 언젠가는 누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는 날이 올 거라고, 더 이상 남에게 나를 설명하느라 애쓰지 않아도 될 거라고, 나 자신으로 자유롭고 당당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어린 시절 책 속에서 처음 만났던 오리지널의 세계는 여전히 아름답고 옳다. 변화한 지금의 세계에 사는 우리들도 아름답고 옳은 것을 꿈꾼다. 그 사이에 앤과 셰익스피어의 누이, 그리고 우리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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