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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Oct 06. 2021

쓰는 사람 2 - 밤에 쓰고 새벽에 지우고

다와다 요코와 파스칼 키냐르

   어떤 실수는 돌이킬 수 없다.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기도 한다. 자칫 가족의 삶까지 파괴할 수도 있다. 그런 실수를 오랫동안 비밀로 간직해온 딸과 그 아빠가 등장하는 드라마를 보는 중이었다. 딸의 비밀을 알게 된 아빠가 딸에게 건넨 말은 미래를 희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실수 같은 건 없으니 다시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 달라는 거였다. 실망과 질책을, 어쩌면 분노까지 각오했을 딸의 표정이 터져 나오는 울음으로 일그러지는 장면에서 나도 울컥하고 말았다. 코가 맵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다가 쇄골 바로 위쪽부터 서서히 죄어들어와 숨이 막혔다.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서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어처구니없지만 그 순간을 쓰고 싶었다. 눈물과 코막힘과 목이 매이는 걸 그대로 옮기면 그 순간의 감정들, 후회와 용기와 안도와 엄청난 피로감 같은 것들이 제대로 드러날지 궁금했다.

   

   드라마를 중단하고 워드 파일을 열었다. 실패였다. 분명 눈물이 뜨거웠다고 썼으나 내가 느낀 뜨거움과 달랐다. 코가 막히고 가슴이 죄어들었던 그 순간을 고스란히 느낄 수 없었다.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돌려보았다. 딸은 매번 회한과 감동의 눈물을 흘렸지만 나는 아니었다. 눈물은 점점 줄어들고 숨이 막혀오지도 않았다. 보는 사람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얼마나 민망했던가. 사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문장 끝에 마침표를 찍을 때마다 숨을 몰아쉰다는 걸 깨달았다. 쓸 때마다 스스로를 막다른 곳까지 몰아붙이는 탓이다. 결국 쓰던 글을 놔둔 채 물러나야 했던 시간들이 있다. 그렇다. 아직 정확한 단어들을 고르지 못하고 제 자리에 쉼표를 찍지 못하는 것이다.


   비가 자주 내리는 계절을 지났다. 밤새 비가 내린 아침이면 마당은 빗방울로 동글동글해졌다. 빗방울은 잎 끝에 매달린 채 조금씩 커지다가 결국 제 무게에 못 이겨 한순간에 흘러내린다. 운 좋게 오목한 잎사귀에 올라앉은 빗방울은 반사경처럼 주변의 식물이나 하늘을 담고 있지만 빗방울로 만들어진 구(球)는 단단하지 못해서 미세한 움직임에도 버티지 못하고 이내 흩어져버린다. 마당을 이야기할 때 가장 쓰고 싶은 것들이다. 바람이 불어와 고인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순간, 꽃잎 위에 내려앉은 빛의 파동, 타는 듯 매캐한 공기의 냄새를 옮겨 쓰고 싶었다. 보고, 만지고, 느낀 것들을 글로 엮고 싶어 애를 썼지만 매일 실패했다. 새벽빛은 사라지고 글자들은 흩어진다.


   나는 자신을 이야기를 옮기는, 번역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자주 있는 건 아니지만 식탁에 놓인 두부조림 접시 아래에서 숨겨진 이야기들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런 날도 쓴다. 나는 접시 아래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던 여자를 일으켜 앉히고 다독이며 이야기를 들어준다. 그릇 밑에 왜 숨어있었는지 묻지는 않는다. 이유를 묻고 설명하는 건 시시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대로 옮길 뿐이다. 그러니까 ‘왜’와 ‘어떻게’ 같은 것은 읽는 사람들이 저절로 알게 되거나 혹은 모르는 채 읽어도 상관없도록 놓아두고 싶다. 무엇이든 다 드러난다면 시시하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도 있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있고 쓸모없는 것들도 많지 않은가.


   소설 [글자를 옮기는 사람]의 주인공은 번역가다. 번역한 글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 마치 처음부터 모국어로 쓰인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 – 변신한 것처럼 -이어야 하는데 자신은 그러지 못해 서투른 번역가라고 생각한다. 번역을 하는 중에 자신이 먼저 변신해 버릴까 봐 무서워하기도 한다. 지도 한쪽 끝에 있는 사람들이 쓰는 언어를 다른 쪽에 있는 사람들의 언어로 바꾸는 일이 번역이라면 안개가 짙은 날 집이 허공에 뜬 것처럼 여겨지는 느낌을, 장미가 꽃잎을 여는 모양을, 새 짖는 소리에 놀란 고양이를,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풀리는 순간을, 잠 못 이루는 밤의 목소리를 글자로 옮기는 것도 번역이다. 이국의 언어로 쓰인 글을 모국어로 바꾸는 이가 작업을 마친 후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듯 나도 글을 쓸 때마다 변신한다. 아침의 나와 저녁의 내가 다른 사람일 수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된다. 성숙이나 노회함과는 다른, 매일 반복되는 소란 - 우울에서 벗어나고 슬픔에서 일어나게 하며 의심을 거두고 신뢰를 회복하는 - 을 거쳐 덧옷을 한 장씩 겹쳐 입고 다른 사람이 되는 일. 저녁의 안도감은 번역자가 만족스러운 번역을 했을 때의 기분과 꼭 닮았다. 안도감에 휩싸인 평온한 밤은 그러나 오래가지 않는다. 밤은 새벽을 끌고 오고 새벽은 내게 다른 눈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낮에 뜬 베를 밤에 풀어버리는 페넬로페처럼 밤에 쓴 것들을 새벽에 지워버리는 게 바로 그 눈이 하는 일이다.


   <파스칼 키냐르>의 소설에 등장하는 사제가 정원의 새소리를 기보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사제는 새소리와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바람이 코트 안으로 휘몰아칠 때 복도의 옷걸이에서 나는 독특한 소리까지도 옮겨 적었는데 나는 이 짧은 소설을 읽는 동안 사제가 소리를 기보하던 방법을 훔쳐내고 싶어 안달이 났다. 이제 그건 누구에게서 얻을 수도 훔칠 수도 없다는 걸 안다. 나날이 언어에 민감해지고 싶다. 쓸 수 있는 문장은 가능한 정확하게, 가끔은 그 너머에 숨은 것까지 전달하는 방법을 찾아내고 싶다. 언어를 능숙하게 다룬다는 건 언어 사이의 틈을, 생략된 문장들까지 읽어낼 수 있게 하는 글을 쓰는 것일 테다.  글로 쓰인 문장과 생략된 문장들이 서로 만나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고 싶다. 지난밤에 쓴 글을 새벽에 지우고 아침에 쓴 글을 해가 저물도록 다시 쓰는 건 그 때문이다. 많이 쓰고 더 많이 지우는 것, 그게 요즘 내가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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