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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Feb 04. 2021

요리를 못해도 요리책은 쓸 수 있지요.

모리 오가이와 박찬일

  스가 아쓰코의 [밀라노, 안개의 풍경]을 다시 읽다가 '모리 오가이'의 글이 궁금해졌다.  오래전 나도 작가처럼 안데르센의 [즉흥 시인]에 빠져 있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친구 중 이 작품을 읽은 이가 없어 외로웠던 기억이 있는 터라 한층 더 그랬다. 일본에서는 모리 오가이의 번역으로 소개되었고 그 번역이 아름답고 빼어나 작가의 아버지가 딸이 '외국문학을 전공하기로 했을 때 일본어가 빈약해질까 우려해서 틈날 때마다 읽기'를 권했다는 장면 때문이었다. 그의 작품집을 갖고 있지 않았기에 혹시나 해서 일본 작가들의 수필 모음집인 [슬픈 인간]을 펼쳤다가 거기 한 편의 글이 있는 걸 발견했다. <사프란>이란 제목의 짧은 수필이었다. '한쪽 날개만 가진 사람'이란 문구 아래에 밑줄까지 그어놓은 건 필시 나일 것이었다. 처음부터 다시 읽어 내려가다가 역시 그 부분에서 다시 멈췄다.  글자 몇 자에 붙들려 옴짝달싹도 하지 못한다는 게 이런 걸까? 세계가 손안에 들어올 것처럼 축소되고 창밖의 숲이 순식간에 아득하게 멀어지는 순간에 나말고도 어딘가에 한쪽 날개만 가진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두리번거리고 만다.  그런 순간들이 우리를 끝없는 읽기로 몰아넣는 것일까?


  "책을 좋아해서 서서히 책에 탐닉하면서 그릇에 때가 끼듯 다양한 사물의 이름이 기억에 남았다. 그렇게 이름은 익혔지만 사물을 몰라서 한쪽 날개만 가진 사람이 됐다. 거의 모든 사물의 이름이 그랬다. 식물 이름도 마찬가지다."*


  밑줄을 그었을 때가 언제였든 이 문장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궁금하고 갖고 싶은 것들은 내 손에 닿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 가까이 있는 것 대신 먼 데 있는 것을 꿈꿨다. 어쩌면 그건 현실보다 책 속의 세계에서 더 자연스러웠던 아이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책에서 읽은 것들, 새로 알게 된 또 다른 책들, 꽃과 나무들의 이름, 향신료와 오일들, 오건디와 플란넬 같은 직물들의 이름까지 보물처럼 간직했던 아이가 아직도 내 속에 남아 있으니 한쪽 날개만 가진 사람이란 문구가 데인 듯 뜨거웠다. 하긴 무엇이든 그랬다. 가보지 못한 곳,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나는 글자로 만들어진 세상에서 방문하고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한쪽 날개만 가지고 있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엉뚱한 이야기이긴 한데 해물이나 육류로 조리한 음식들을 먹지 못함에도 그를 아쉬워하거나 그런 식재료로 요리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도 그 연장선에 있을 것이다. 요리책을 즐겁게 읽는다. 냄새, 식감, 맛을 묘사한 글만 읽고도 어떤 음식일지 알 것 같다. 먹어보지 않았어도 그 맛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나다. 밥과 김치만 먹고 나서도 곰탕 한 사발을 마신 것처럼 든든한 이유가 있다(이건 지금 든 생각인데 간을 보지 않고도 제법 음식을 만드는 비결이 여기에 숨어있는지도 모르겠다).


   BBC에서 [제인 오스틴의 후회]라는 필름을 만들었다. 중년이 된, 작가로서 성공한 제인 오스틴을 그렸다. 오빠인 헨리가 병에 걸려 제인이 곁에 머물며 그를 간호하게 된다. 오빠를 치료하던 젊은 의사에게 이끌렸던 제인은 그 의사가 조카인 페니에게 관심을 보이자 혼란스러워한다. 사랑 대신 글쓰기를 선택했던 것이 올바른 일이었는지 따져보고 싶은 마음이 아니 들 수가 없다. 잠 못 들고 벽난로 앞에서 우울해하는 제인에게 함께 지내던 여인이 친구의 말을 빌어 [센스 앤 센스빌리티]를 쓴 작가는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을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하자 제인이 말한다.


"요리를 못해도 요리책은 쓸 수 있지요."


  사랑을 하지 못했어도 사랑 이야기를 쓸 수 있다는 제인의 말이 씁쓸하다. 제인도 한쪽 날개만 가진 사람이었을까. 한쪽 날개만 가진 사람은 날 수 없지만, 남들은 그의 날개를 보며 다시 날기를 꿈꾼다. 사랑에 빠져 희망에 가득 찼던 때를 기억한다. 제인 오스틴의 독자들이 그랬듯이 마치 다시 한번 선택할 수 있을 것처럼. 빵을 사서 돌아오는 길, 두물머리는 아직 얼어붙어 있다. 눈 덮인 산은 순하다. 앙상한 나뭇가지들을 솜털처럼 덮고 둥글게 몸을 웅크려 봄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 시간을 다시 수는 없으니 그게 맞다. '모리 오가이'를 주문하고 기다리면 된다.


*모리 오가이, <사프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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