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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Sep 11. 2021

쓰는 사람 3 - 글쓰기에 부채감을 지닌 당신에게

그런 날은 오지 않아요


  아침에 유리 밀폐용기 하나를 깨트렸습니다. 싱크 문을 여는 순간 다른 밀폐용기들 위에서 기우뚱하게 얹혀 있던 그것이 미끄러져 주방 바닥으로 떨어졌어요.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마음속에 있던 무엇인가가 함께 바스러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순간에 누군가 내 속에서 말하고 있었지요.

"그것 봐!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다니까!"


  사실 아슬아슬하고 불안했던 느낌은 오늘 새벽부터였어요. 새벽에 잠에서 깼는데 누군가 내 앞에 서 있는 거예요. 키가 큰 남자처럼 보였지요. 믿을 수 없게도 나는 소리 지르지 않았고 당황하지도 않았어요. 다만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또 했어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곤 하면서요. 맞았어요. 그건 눈이 나쁜 내가 어두운 새벽에 키가 큰 의자와 그 의자 위에 걸쳐 둔 옷들을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잘못 본 거였어요. 꿈의 이미지와 어렴풋한 새벽빛이 빚어낸 환상이었어요. 곧 다시 잠이 들었고요. 아침 식탁에서 그 생각이 다시 났는데 글쎄 무섭더라고요. 식구들과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 사이사이에, 커피잔을 내려놓는 순간에, 설거지를 하면서 유리문 너머 고양이들이 꼬리를 물고 뒹구는 풍경을 보면서도 그 환영을 떨쳐내지 못했어요. 아침임에도 신경은 날카롭고 눈이 아팠습니다. 그러다가 쨍그랑! 깨뜨린 거죠. 이제 괜찮습니다. 남자는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책상 앞에 앉은 지금 나는 새벽의 환영을 다시 떠올립니다. 그리고 생각해요. 그 남자는 무엇이었을까? 혹시 내게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내가 잊고 있는 뭔가가 있는 건 아닐까? 갚아야 할 빚이 있다는 걸 알려주려던 건 아니었을까? 이게 혹시 은혜 씨가 종종 말하던 그것, ‘부채감’일까?


“글쓰기에 일종의 부채감이 있어요.”

은혜 씨가 자주 하는 말입니다.

“써 보세요!”

내가 대답합니다.


  며칠 전 토마토를 자르다가 손가락을 베었어요. 도마에 올려놓고 자르면 되었을 것을 토마토를 왼손으로 들고 오른손으로 칼을 밀어 넣다가 왼 손 새끼손가락 두 번째 마디를 베었습니다. 아얏!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죠. 잠시 들여다보았습니다. 피가 조금 비치는 것도 같았지만 신경 쓸 정도는 아닌 듯했어요. 토마토소스를 만드는 동안 손가락을 베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게 끝은 아니었지요. 손이 물에 닿을 때마다 베인 부분에 날카로운 통증이 다시 생겨났습니다. 그건 마치 바닷가 모래 아래 숨겨져 있다가 바닷물이 들어와 모래사장을 훑고 지나가면 드러나곤 하는 오래된 조개껍데기 같았어요. 상처는 잊을 만하면 날카로운 통증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렸습니다. 생각보다 상처가 깊었던 모양이에요. 지금 다시 보니 베인 곳 근처가 붉게 부풀어 올라와 있군요.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느냐는 듯한 은혜 씨의 표정이 떠오릅니다. 그래요, 내게 글쓰기는 아물지 않는 상처와 같다는 말을 하려고요, 평소에는 보이지 않고 아프지도 않지만 분명히 있는 어떤 것이죠. 상처는 자신을 알리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픕니다. 아프다고, 나도 모르게 베인 상처가 좀처럼 낫지 않네 하며 남편이나 아이에게 보여줘도 한결같이 시큰둥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대단한 상처도 아니고 그리 아파 보이지도 피가 나지도 않으니까요. 상처가 있다는 말을 한 사람이나 그 말을 들은 사람이나 곧 잊어버립니다. 그마저도 글쓰기와 닮았습니다. 쓰지 않는다고 뭐라 하지도 않고 밤을 새워 쓴다고 해서 당장 뭔가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래서 쓰기를 잊어도 세상에 뭔 일이 생기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같이 살아야합니다. 상처가 있는 내가 진짜 나라고 생각하면서요.


  드러나지 않는 상처는 글쓰기를 갚아야 할 빚처럼 여기는, 아니 연인으로 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바로 은혜 씨 같은 사람들이죠) 글쓰기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닮았습니다. 가끔 건드려져야만 대수롭지 않게 여긴 그 상처가 아물지 않은 채로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어쩌면 조금 더 곪아 있을지도 몰라요. 글쓰기라는 상처를 낫게 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써 나가는 일’입니다. 시간은 표정이 없습니다. 무심하지요. 우리가 시간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도 잊을 정도로 쓰는 일에 몰두할 때만 상처가 아뭅니다. 맞아요. 지금이 몇 시인지 확인하는 일이 아무 의미가 없을 때, 다만 쓰기에만 굴복할 때, 그제야 상처는 사라집니다. 좀처럼 그곳에 닿지 못한 사람들은 시름시름 앓기도 합니다. 시간이 좀 있었으면 하고 되뇌기도 합니다. 시간이 도무지 나지를 않네, 누군가 이 일을 내 대신 해 줬으면, 그러면 글을 쓸 수 있을 텐데 하고 말이죠. 그런데 그런 시간이 생기기는 할까요?


  어느 날, 가방 속에서 연필을 한 자루 꺼내 들며 은혜 씨가 말했습니다.

“필기감이 좋은 연필도 한 자루 샀답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도 볼펜을 한 자루 꺼내 들었던 거, 우리가 서로의 연필과 펜을 바라보며 웃었던 거 기억나요? 손에 들고 있는 새 연필과 펜의 힘을 빌어서라도 무언가에 대해 계속 쓰고 싶던 마음들이 연필 끝에서 달랑거렸죠. 그러나 은혜 씨는 그때 이미 매일 뭔가를 쓰는 사람이었어요. 비록 그 쓰기가 (은혜 씨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단순한 일일 뿐이었다고 해도 말이죠. 그렇지만 정작 쓰고 싶은 건 당시에 매일 쓰고 있던 글들이 아니라고, 쓰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다고 했어요.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건 은혜 씨의 어머니와 시어머니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한 집에서 두 분의 어머니를 모시는 딸이자 며느리였던 은혜 씨는 기록하고 싶었던 거죠. 치매 초기의 두 어머니와 함께 하는 생활,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마음과 드러내고 싶었던 마음들을 말이에요. 은혜 씨의 새 연필이 반갑고 기뻤습니다. 도무지 바랠 줄 모르는 일상의 빛에 가려 점점 투명해져 가는 자신을 돌보겠다는 마음이었으니까요. 더 이상 자신을 그대로 사라지게 놔두지 않겠다는 바람이 은혜 씨의 몸 안에 가득 차서 넘치는구나, 더 이상 담아낼 곳이 없어서 저절로 밖으로 흘러나왔구나 싶었습니다. 연필을 꺼내 들고 웃던 은혜 씨가 이뻤어요.

 

또 다른 어느 날에 은혜 씨가 내게 다시 묻습니다.


 “내년이면 좀 괜찮지 않을까요? 지금 하고는 많이 다르겠지요? 아이가 졸업하니까 생활 패턴도 바뀔 거고 스트레스도 줄지 않을까요? 그러면 조금씩이라도 쓸 수 있겠지요?”


 혹시 그때의 내 대답을 기억하세요?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을 거라고, 지금 하고는 많이 다를 거라고, 시간이 생길 거라고, 그러니 글을 쓸 수 있을 거라고 했지요. 그런데 그거 거짓말이에요. 그런 날은 결코 오지 않아요.


그러니 은혜 씨가 해야 할 일은 지금부터라도 글을 쓰는 일이에요. 시간은 무자비하게 흐릅니다. 왼 손 새끼손가락 두 번째 마디의 상처는 언젠가 아물겠지만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저절로 생겨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아요. 그러니 고단한 밤이지만 써보는 거예요. 수험생의 불안과 노년의 허무는 책상 옆에 부려놓고요. 어때요? 시작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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