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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Jan 19. 2021

고집불통이 작가의 조건이라고?

폴 오스터와 헬렌 한프

    오후는 나른하다. 고장난 보일러 탓에 하루가 부산하다. 수리로 해결될 것인지 보일러 자체를 교체해야 하는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마음이 어수선해서 무엇에도 집중하기가 어렵다. 마음속만큼 정리가 안된 책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폴 오스터의 [겨울일기]를 꺼내 들었다. 일흔이 넘은 작가가 자신이 살았던 공간을 연대기처럼 써 내려간 부분을 읽는다. '좋건 나쁘건, 그가 <집>이라고 부른 장소'들이다.


   8번째 집은 맨해튼, 웨스트 115번가 601번지의 방 두 개짜리 아파트로 폴 오스터가 처음으로 혼자 얻은 집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대학교 3~4학년을 보냈는데 당시 콜롬비아 대학교는 격렬한 데모와 연좌 농성, 동맹휴학, 퇴학이 이어졌고 오스터 역시 연좌농성에 참여했다가 유치장에 수감되기도 했다. 그가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 자기 얘기도 남 얘기하듯이 툭툭 던져놓다가 느닷없이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물에 빠지거나 폭탄이 터지는 것처럼 읽는 이급박한 상황에 던져놓는 것, 정신 차리고 보면 거기 서서 "거 봐, 내가 뭐랬어. 조심하라고 했잖아." 하며 키득거리는 그의 잔기술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는데도 또 넘어갔다. 아니, 넘어갈 뻔했다. 그의 책은 섣불리 잡으면 안 되는 책이라 평소 같았으면 해가 완전히 기울어 방 안이 어둑해질 때까지 글자의 숲을 헤매기 십상이었겠지만 이번만은 예외였다. 최근 봤던 영화 [84번가의 연인] 때문이었다.


  헬렌이 프랭크와 편지를 주고받은 건 1949년 10월부터였다. 둘은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늙어가는 중이고 1960년대에 들어 편지 왕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헬렌이  마커스 서점의 직원에게서 프랭크가 죽었다는 소식이 담긴 편지를 받은 날은 헬렌이 콜롬비아 대학에서 시위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경찰과 말싸움을 하다가 호송차에 실린 그날이다. 폴 오스터가 농성장에서 끌려 나왔다는 문장을 읽는 순간 영화 속 시위 장면이 떠올랐다. 유치장에서 풀려 나와 집에 도착하자마자 켠 텔레비전에서 경찰 호송차에 실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우스워하던 헬렌은 잠시 후 그 날 도착한 우편물에서 프랭크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흘린다. 책장에서 [채링크로스 84번지]를 찾았다. 프랭크의 사망 소식을 받은 날짜를 확인했다. 1969년 1월 8일에 보낸 편지였다.


  폴 오스터가 교도소에 갇히게 된 것이 1968년에 몇 주 동안 계속된 연좌농성 때라고 했으나 내가 영화 속에서 본 시위일 가능성은 매우 낮을 것이다. 영화의 원작인 [채링크로스 84번지]에도 콜롬비아 대학에서 벌어진 시위에 관한 언급은 없다. 오스터는 농성장에서 끌려 나와 유치장에 수감된 다음 날 아침 <데일리 뉴스>에 그의 사진이 실렸던 걸 회상한다. 질질 끌려가 호송차에 실리는 그의 모습이 찍힌 사진 밑에는 <고집불통 청년>이라는 제목이 붙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순순히 일어나 걸어 나가지 않고 힘을 빼고 몸을 축 늘어뜨린 때문이었다고. 경찰에게 질질 끌려나가야 했던 오스터의 모습에 영화 속 헬렌 한프의 모습이 겹쳐진다.


  사실 두 작가의 연결점을 찾느라고 영화를 다시 보고 책을 뒤질 필요는 없었다. 오스터는 경찰에 '비협조적인 고집불통 청년'이었고 헬렌은 궁금한 건 묻고 부당한 말에 반박하며 할 말은 해야 하는 고집불통 아줌마였으니까. 게다가 한 사람은 신문에 사진이 실리고, 한 사람은 텔레비전에 등장했다! 나는 고집불통인가 잠시 생각해본다. 때로 고집을 부리기도 하지만 고집 부리는 사람에게 지는 경우가 훨씬 많다. 신문에 난 적도 텔레비전에 나온 적도 없다. 어떤가요? 당신은? 폴 오스터와 헬렌 한프가 혹시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같은 장소에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찰나의 가능성을 확인하느라 영화를 다시 돌려보고 책을 뒤지느라 법석을 떠는 동안 저녁이 왔다. 보일러 문제는 아직 해결 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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