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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Jan 19. 2022

1980년대에

최승자와 시몬 드 보봐르

    아무것도 쌓아둔 것이 없고 아무것도 기대하는 것이 없는 사람의 어깨는 슬프다. 너무 가냘파서 허공에 뜬 가랑잎을 쥐는 것만 같아 힘주어 붙잡을 수도 없는 어깨는 바로 최승자의 그것이다. 끌어안기조차 어려우나 어쩌면 우리가 마지막 기대야 할 것일지도 모를 그 어깨에 대한 묘사는 '황현산'의 [우물에서 하늘 보기]를 책장 구석에 세워두고 그대로 잊은 한참 후에도 혀 밑에 남아있는 쓴 약의 뒷맛처럼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얇은 코트를 잘못 입고 나간 겨울날이나 빗물에 젖은 셔츠로 어깨가 시린 장마철에 아주 잠깐 그건 누구의 어깨였을까를 생각했었다. '메이 사튼'의 산문집 [혼자 산다는 것]의 끄트머리에 짧게 붙어 있던 역자후기를 읽었을 때 느꼈던 기시감은 그러니까 근거가 없는 게 아니었던 거다. 여전히 아침이면 알라딘의 새로 나온 책을 훑어보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는 터라 잿빛 표지에 주름이 가득한 얼굴로 손가락 사이에 짧아진 담배를 끼운 사람의 표정과 몸짓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확신에 차 있는, 용기 있는, 두려움을 숨긴,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나이 든 여자의 사진이었다. 최승자를 만나는 순간은 그렇게 왔다. 불을 켜놓고 잠들면 가위에 덜 눌릴까 하여 켜 둔 스탠드 옆에서 핸드폰을 집어 들어 시간을 확인하고, 아침이 되려면 아직 멀었기에 한숨을 쉬고, 다시 잠 속으로  돌아가려고 뒤척이다가 에잇! 하고 일어나도 밖은 여전히 밤이던 어느 날에 시인의 뭉툭한 손톱을 바라보다가 주문한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에는 놀랍게도 <'가위눌림'이라는 시적 저항>이란 글이 있었다. 1980년대를 가위에 눌리며 건너왔고, 자신의 시는 가위눌림의 한 형태 혹은 가위눌림에서 벗어나려는 저항의 형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시인의 이야기를 징검다리처럼 밟고 내 1980년대로 건너가 며칠을 살았다.


    1980년대에 우리들은 사르트르를 읽었다. 지금 책친구들과 만나 함께 읽고 얘기하는 것처럼 그때도 그랬다. 사르트르를 읽고 보봐르를 읽다가 카뮈로 넘어갔던 시절이었다. 사르트르를 읽던 시기는 짧았으나 그 후로도 오랫동안 [말], [구토], [벽] 같은 작고 낡은 책들은 이사를 할 때마다 분주한 내 발걸음을 붙잡아 주저앉히곤 했다. 표지를 어루만지고 몇 문단을 읽는 것, 그게 전부였다. 전문을 다시 읽은 기억은 없다(지금은 내용도 기억나지 않고 책들도 사라졌다).


   최근 [작별의 의식]에서 사르트르를 다시 만났다. 평소 시몬 드 보부아르는 선이 굵고 거침없는 글을 쓰지만 동시에 정교하고 치밀하게 쓴다라고 여겼으므로 처음 몇 페이지를 읽고 든 생각에 - 그러니까 너무 빠르고 거칠어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맨발로 달려 내려가는 느낌이라 불편하다는 - 자못 놀랐던 걸 고백한다. 문장이 짧고 정제되지 않았으며 균형감도 부족해 이 사람이 그 사람인가 의심이 드는 부분마저 있지만 중간중간 황홀할 만큼 아름답고 서정적인 혹은 실제 고통이 느껴질 정도로 냉철하고 적확한 기록은 보부아르가 아니면 가능하지 않다. 죽음을 향해가는 사르트르의 곁을 지키면서 그가 노쇠해 약해지고 병들어 종내 무너지는 걸 바라본다는 게 어떤 일인지, 그 어둠과 침묵의 깊이를  타인은 가늠할 수가 없다. 누구나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 죽음을 언제나 남의 일로만 여기는 버릇을 좀처럼 버리지 못하는 나같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보부아르가 점점 느려지는 사르트르의 걷는 속도에 자신의 그것을 맞추듯 우리도 속도를 맞춘다면?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걸어온 긴 세월을 나 역시 조금 떨어져 계속 걸었다고 생각하면? 점점 죽음에 가까워지는 사르트르를 지켜보던 십 년 동안 보부아르 역시 그 옆에서 함께 늙어가고 있다는 걸, 자신 역시 노화와 소멸의 길을 걸으면서도 다만 내색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는 걸, 무엇보다도 나 역시 그 길을 함께 걷고 있었다는 걸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살아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다. 이 책의 진정한 미덕은 바로 그것일지도 모르겠다.


 가위눌림이 장기간에 걸쳐 계속되자, 그것으로부터 깨어나는 나의 방법 또한 몇 단계로 변화했던 것이 생각난다. 첫 번째 단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공포에 휩싸인 채 본능적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움으로써 내게 극심한 육체적 아픔을 가해 오는 가위눌림 속의 그 억압자를 쓰러뜨리고 깨어나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처음에는 본능적으로 온 힘으로 저항하다가 그 와중에 나 자신이 또다시 가위에 눌린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그리하여 이제는 공포감 없이, 싸우면 내가 이기도록 되어 있다는 확신을 갖고 싸워 깨어나는 것이다. 세 번째는, 가위눌림이 시작되자마자 그것이 가위눌림이라는 것을 의식하게 되고, 그러나 경험으로 보아 어쨌든 간에 조만간 깨어나도록 되어 있다고 생각하고서 그 억압자에 대한 저항 자체를 포기해버리고, 그러자마자 이상하게도 그 가위눌림이 서서히 풀어지는 것이다.
(중략)
가위에 눌려 본 사람(바로 나다. 종종)은 알겠지만, 처음에는 아무리 소리치려 해도 비명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다가 얼마만큼의 힘을 쓰며 저항한 뒤에야 비명이 터져 나오고, 그것이 자신의 귀에 들리게 되면서 비로소 그 가위눌림으로부터 깨어나게 되는 것이다.(최승자, 1989)



    그래서 씩씩하게 불을 끄고 잠든 지 사흘째 되는 날, 다시 가위에 눌렸고 어제는 불을 끄지 못했다. 무엇이 무서운가? 뭘 잘못했을까? 나는 시인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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