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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Jun 14. 2021

작가만은 하지 말아야 할 사람이라고 하지만

다와다요코


  단어들은 연결되지 않고 떨어져 있다. 내가 늘어놓은 단어들은 높은 곳에서 떨어진 상자가 바닥에 부딪치면서 부서진 내용물의 잔해처럼 무참하다. 언제부턴가 문장 끝에 마침표를 찍을 때마다 숨을 몰아쉰다는 걸 깨달았다. 단어 몇 개를 엮어내고는 숨이 차서 다음 문장은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모니터 앞에서 물러난 때도 있다. ‘비가 내렸다’라고 쓴 후 그 걸 들여다보면 비가 내렸던 사실에 대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도무지 읽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실제 사물과 풍경, 관계와 감정들로 이루어진 세계의 뒤편에 언어로 만들어진 또 하나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말과 글이 실체를 정확히 반영할수록 표정과 행동과 사물에 가려진 아름다운 것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걸 상상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 두 세계의 경계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언어로 바꾸는 일이다. 그러니까 글 쓰는 이들은 바로 다와다 요코가 말하는 ‘경계의 주민’ 인 셈이다. 에세이 [여행하는 말들]에서 ‘어디에서나 통하는 얕은 영어로 하는 비즈니스 토크가 세계를 뒤덮으면 참 시시할 것’이라는 문장을 읽으면서 내가 떠올린 건 바로 초등학교 때 쓰던 일기였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 시절 더 불우했던 사람은 일기를 썼던 내가 아니라 일기 검사를 했던 선생님이었을 것이다. 남의 일기를 읽는 것은 감추어진 남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라 어느 정도는 견뎌야 하는 면이 있다. 거기에 보통은 몰래 하는 일이 주는 짜릿함이 더해져 읽기의 영토에서도 한층 특별한 구역을 차지하지만 그 일기가 초등학생의 학교 제출용 일기라면? 일기장이라 적힌 공책을 선생님 앞에 내놓았던 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감추고 싶은 비밀은 흔적도 남기지 않았으며 어른들을 걱정시키거나 혼날 만한 일들을 그 공책에 써넣는 모험은 절대 하지 않았다. 때로 어른들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비밀로 포장해 슬쩍 끼워 넣는 대담함도 있었으니 그 부분을 읽을 때는 선생님도 내가 괘씸했을 거였다. 그럼에도 천연덕스럽게 썼다. 검사를 받았던 일기의 마지막은 아마도 삼사일 주기로 등장하는 고만고만한 다짐들로 채워졌음이 분명하다. 다시는 실수를 하지 않겠다,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 되겠다, 예의 바른 사람이 되겠다 등등 무수한 반성과 다짐의 소리가 아무런 울림도 지니지 않은 채 나열된 일기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썼다. 아마 친구들의 사정도 나와 그리 다르지 않았을 테니 선생님으로서는 어느 것을 읽어도 비숫비슷했을 일기를 읽는 고역이 상당했을 것이다. 그 시절 우리의 빈약했던 언어는 지금 어디쯤에 있을까 궁금하다. 여전히 그 시절에 일기를 쓰던 얄팍한 언어로 말하고 쓰고 있어서, 항상 하는 말을 계속 똑같이 쓰고 있어서 우리의 삶이 이토록 시시한 것일까? 그런 점에서 [다와다 요코-글자를 옮기는 사람]의 역자가 남긴 말은 적어도 내게는 정확히 들어맞는 말이었다.      


 다와다 요코는 다른 사람이 이야기를 하게끔 만드는 글을 쓰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바통을 건네는 릴레이 선수처럼, 이 책도 읽는 사람에게 글자, 글, 번역이라는 바통을 건네고 그것을 이야기하게 한다.
                                                 다와다 요코-글자를 옮기는 사람 p.103

 


  이 작은 소설의 주인공은 번역이 어쩌면 변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단어가 변신하고 이야기가 변신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 마치 처음부터 그런 모습이었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늘어서야 하는데 자신은 그러지 못해 서투른 번역가라는 얘기다. 주인공은 번역을 하는 동안 자신이 말보다 먼저 변신할까 봐 무서울 때가 있다고 고백하는데 왜 그렇지 않을까? 우리는 모두 매일 변하지 않나? 글을 한 편 쓰고 나면 나는 언제나 쓰기 전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책 한 권을 읽기 전의 나와 읽은 후의 내가 같은 사람인가? 아침의 나와 저녁의 나는 같은 사람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는 끝없이 변신한다. 때로는 변신이 사람의 본질이 아닌가 싶다. 성숙이나 노회함과는 또 다른 의미의 변신은 매일 반복되는 소란 - 우울에서 벗어나고 슬픔에서 일어나게 하며 의심을 거두고 신뢰를 회복하는 - 을 조금 더 수월하게 건너게 하는 방어기제 같은 것이다. 주인공이 소설의 뒷부분에서 번역을 마친 후의 기쁨과 안도감으로 다른 사람이 되어 있듯이.      


 나는 마을이 안개에 잠겨 우리 집만 허공에 둥둥 뜬 것처럼 여겨지는 느낌을, 수국이 조금씩 꽃잎을 여는 모양을, 새 짖는 소리에 놀란 고양이를,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풀리는 순간을, 잠 못 이루는 밤의 목소리를 글자로 옮기고 싶다. 가끔 나를 자연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는 사람이라고 상상한다. 나의 번역은 보통 순조롭지 않다. 내가 쓴 글이 내가 쓰고 싶은 글과 일치하지 않는 날이 계속될 때면 쓰고 싶은 기분이 사라진다. 그런 내게 다와다요코는 ‘작가만은 하지 말아야 할 사람’이라고 한다.‘글쓰기란 자기와 다른 몸을 가진 언어와 맞보는 일이니까’(여행하는 말들 p.212) 쓰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서는 작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와다요코는 일본어와 독일어로 글을 쓴다. 다와다는 1982년에 일본을 떠나 독일로 건너간다. 1987년부터 그는 두 개의 언어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가 글을 쓰는 방식, 모어가 아닌 외국어로 글을 쓰는 것(엑소포니 exophony) 은 모국어를 낯설게 느끼는 방식인 동시에 모국어를 재창조하고 풍요롭게 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모국어와 외국어 사이에서는 언어에 더 민감해지기 마련이다. 낯선 언어권에서 단어 하나만으로도 의사소통이 가능할 수 있는 상황들을 떠올려보라. 단어 하나로 세계와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지 않은가. 여러 언어를 능숙하게 다룬다는 사실보다 언어 사이의 틈, 좁은 공간이 중요하다는 작가의 말은 나 같은 사람에게도 언어가 가능한 곳이 어디까지인지 가보고 싶게 만든다. 내 유년의 기억들과 오래된 단어들이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으며, 비록 내 세계가 작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좁고 글은 오직 내 모국어로만 쓸 수 있을지라도 말이다.   

   

  그의 말대로 “작가만은 하지 말아야 할 사람”일지도 모르는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질 작정이다. 완벽하지 못해 만족스럽지 않아도 잎사귀에 고인 물방울에 대해 말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고 싶었던 말과 실제 쓴 글 사이의 거리는 조금씩 좁혀지다가 드디어 어느날 손가락 한 마디 길이의 틈만 사이에 두고 다가서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 글을 읽는 이들이 충분히 메울 수 있는 정도의 틈 말이다. 때때로 낯선 문장을 읽고 당장, 그리고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 때가 있다. 방금 읽은 그 문장이 바로 현실이 되는 느낌을 내가 글을 쓰면서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하려는 말을 온전하게 전달했다는 느낌을 받을 때 나는 징검다리도 없이 그 심연을 건너왔음을 안다. 그러니까 글을 쓸 때 나는 경계에 있는 사람이다. 나를 둘러싼 현실과 글로 지어진 또 하나의 현실과의 경계가 바로 내가 서있는 곳이다. 다와다의 말대로 모든 경계선은 넘기 위해 있으므로* 나는 어쩌면 이미 제 자리에 선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여행하는 말들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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